그랜저 성공신화의 비밀① 그랜저는 어떻게 성공의 상징이 되었나? [차부심 EP.10]

▶ 프롤로그 : 그랜저는 '아직도' 성공한 인생의 상징일까?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 김완선씨와 대한민국 최고의 MC 유재석씨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두 사람 모두 ‘그랜저’ 오너였다는 점이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두 사람의 그랜저에 대한 평가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김완선 씨의 경우 “와 진짜 성공했구나. 대단하다” 이렇게 칭송받았지만
유재석 씨의 경우 “와 진짜 검소하구나. 대단하다” 이렇게 칭송받았죠

왜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게 된 걸까요?

현대 그랜저가 7세대 풀체인지 모델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랜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대형 세단입니다. 36년이라는 시간동안 판매된 가장 오래된 대형 세단이고, 200만대가 넘는 가장 많은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차량이죠. 하지만 그랜저가 ‘최고급’ 대형 세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과거 '회장님 차' 였던 그랜저는 ‘최고급’ 쇼퍼드리븐 차량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랜저’라는 단어 세글자에서 ‘성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어째서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는 한 가지 재미있는 지표가 있습니다. ‘회장님 차’ 그랜저가 처음 탄생했던 1986년, 그 회장님에서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위한 법안'인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6년의 역사를 나란히 걸어온 최저임금과 그랜저를 따라, 36년동안 변해 온 '성공'의 의미를 알아봤습니다.


▶ 정주영 현대 회장도 '그랜저' 안 타서 무시당했다…1세대 각그랜저의 위엄

사실 그랜저는 탄생 배경에는 현대의 치욕스러운 과거가 존재합니다. 1986년 초 그랜저가 시장에 등장하기 직전이었던  당시, 국내 최고급 자동차는 현대가 아닌 대우자동차의 ‘로얄 살롱 슈퍼’ 였습니다.

로얄 살롱 수퍼는 국내 최초로 컴퓨터 엔진분사 제어시스템을 탑재한 차량이었고, 그에 걸맞게 국내 최고가를 기록하며 높으신 분들의 상징과도 같은 차량이었죠. 그런데 ‘2인자’ 대우자동차가 이렇게 선전하는 동안, 내수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던 현대의 최고급 플래그십 차량은 무엇이었을까요?

출처 : MBC PD수첩

그런 거 없었습니다

사실 현대에도 ‘그라나다’ 라는 이름의 최고급 플래그십 세단을 만들어 왔었습니다. 정주영 회장도 애용하던 '진짜 회장님 차' 였죠. 문제는 그라나다가 현대가 직접 만든 차가 아닌, 라이센스 생산 차량이었다는 겁니다. 그라나다의 원 제작사인 미국 포드 사는 1985년 부품 생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는 더 이상 '플래그십' 그라나다를 생산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기술 독립을 하지 못한 회사의 비극이었던거죠.

대우자동차의 로얄 살롱 슈퍼에 밀려 ‘최고급’ 자리를 내놓은 굴욕을 당한 현대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본의 미쓰비시였습니다. 미쓰비시의 대형 고급 세단 기술을 제공해줄 테니 현대가 디자인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대형 세단 [데보네어]의 차세대 모델 공동 개발을 제안한거죠.

그랜저 아닙니다 2세대 데보네어입니다...

사실 미쓰비시도 다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실 1세대 데보네어는 일본 현지에서 무려 22년동안 풀체인지 없이 생산하는 '사골 중의 사골' 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구닥다리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렇다고 미쓰비시가 작정하고 신형 개발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고급차 시장은 ‘쇼퍼드리븐’ 영역에서는 도요타 센추리가, ‘오너드리븐’ 영역에서는 도요타 크라운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성공이 불투명한 도전이었죠. 미쓰비시로서는 현대와 합작한다면 디자인 비용이라도 절감하는 효과를 볼 수가 있었고, 동시에 한국 시장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심산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결과, 기술독립을 하지 못해 플래그십 증발이라는 굴욕을 겪었던 현대는 다시한번 외세(?)의 힘을 빌려 대형 세단 공동개발에 착수했고, 그 결과물이 우리가 익히 아는...

각 그랜저, 그랜저 1세대였습니다.

1986년 그랜저가 첫 선을 보였습니다. 사방이 각져있는 엄격-근엄-진지한 아우라는 당대 우리나라 ‘높으신 분’들의 취향을 직격했죠. 군사정권 시절이다보니 ‘각’ 잡힌게 먹혔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비록 5단 수동 트림밖에 없었고, 사이드미러도 손으로 직접 접어줘야 했지만 '운전 기사'를 두는 회장님들에게는 큰 장애물이 아니었고,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컴퓨터 자동조절 에어컨, 운전자 주의 경고,. 풀 플랫 시트 , 슈퍼 밸런스 서스펜션 등 국내 최초이거나 동급 유일 사양만 해도 9가지가 넘었죠. 결정적인 킬링 포인트는 그랜저가 ‘전륜구동’이었다는 점입니다.

본디 높으신 분을 태우는 ‘쇼퍼드리븐’ 차량은, 승차감이 좋은 후륜구동의 선호도가 높은 편이지만, 당시 산간 지형이 많고 4계절이 뚜렷해 빙결현상 대응이 필요했던 우리나라에선 전륜구동 차량이 높으신 분을 더욱 ‘안정적’으로 모실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랜저는 출시와 동시에 로얄 살롱을 따돌리고 ‘회장님’들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의전차량으로 그랜저가 선정되며, 올림픽 참관을 온 왕족과 해외 귀빈들이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뻗어나갔습니다. 당시 88 올림픽 개막식 시청률은85%에 달했고, 이 뒤로는 전 국민에게 [그랜저=왕족이 타는 차]라는 공식이 각인되었죠.

그렇게 그랜저가 명실상부한 ‘회장님 차’로 등극한 1988년, 그 회장님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최저임금’이 실제로 책정되어 시행되었습니다.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이후 2년 만의 일이었죠. 최초의 최저임금은 특이하게도 직업군에 따라 2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최’저’임금의 취지에 맞게, 가장 낮은 최저임금은 1986년 당시 462.5원이었습니다.

올림픽 중계로 ‘스타’가 된 88년형 그랜저의 가격은 1790만원이었죠. 최초의 최저임금으로 깡통(?) 그랜저를 사기 위해서는 무려 38702시간을 일해야 했습니다. 하루 8시간 기준으로 13년 3개월동안, 하루도 안 쉬고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가능한 금액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그랜저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었고,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명백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랜저를 타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당해 치를 떠는 사람 중에는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높으신 분'도 있었는데요, 바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90년대 초 정계에 진출한 이후, 검소한(?)이미지를 얻고자 평소 타고 다니던 그랜저 차량을 쏘나타로 바꿨습니다. 문제는 그랜저를 타고 다닐 때에는 아무런 제지 없이 자유롭게 국회 출입이 가능했는데, 차를 쏘나타로 바꾸자마자 차가 세워져 검문을 당한 끝에 간신히 국회로 들어갔던 후일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 회장의 비서실장이 [차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가 얼마나 심한지 기가 막힌다]고 회고한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단순히 차량 번호 등록 유무 때문에 일어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의 정주영 회장조차도 그랜저를 타지 않으면 무시(?)를 당하던 시대의 우스운 단편이죠.

그렇다고 단순히 그랜저가 [이름값]에만 기댄 건 아니었습니다. 그랜저 오너로 널리 알려져 있던 프로야구 득점왕 출신의 LG이광은 선수와 인기절정을 달리던 가수 김완선씨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큰 부상없이 복귀해 활동을 재개하자, ‘좋은 차가 튼튼하기까지 하다’며 그랜저를 향한 선망의 시선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심지어 ‘그랜저를 빨리 출고하는 비결이 있다’며 높으신 분들만 골라 등쳐먹은 사기꾼이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 '회장님 차'에서 '회장놈 차'로...증오의 대상이 된 2세대 그랜저

현대 또한 소비자들의 이러한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상품에 반영했습니다. 1992년 등장한 뉴 그랜저는 단언컨대, 같은 시기의 '국산차' 중 가장 안전한 차였습니다. 국산차 중 유일하게 '에어백'이 장착된 차량이었기 때문이죠.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기아의 고급 세단 '세이블'이 벌써 80년대 후반에 에어백을 장착한 것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아 세이블은 [포드 세이블]을 국내 라이센스 생산 및 판매한 것이기 때문에 '국산차'로 분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2세대 뉴 그랜저(LX)는 국산차 최초 에어백 장착 외에도 안전과 주행에 관련된 당대 첨단기술을 아낌없이 도입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구동력을 컨트롤하는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을 탑재했고, 초음파로 노면상태를 파악해 서스펜션의 감쇄력을 제어하는 프리뷰 ECS등 각종 안전 기술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전기술을 잔뜩 보강한 뉴 그랜저의 가격은 어떻게 변했을까요?당연히 인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뉴 그랜저를 사려고 딜러를 만나보면...?

실 구매층의 '구매 부담'은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당시 뉴그랜저의 최저트림 출시가는 1850만원, 92년 최저임금은 925원이었습니다.  즉, 최저임금으로 정확히 20000시간치 시급이었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약 6년 10개월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한푼도 쓰지 않고 모으면 그랜저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최저임금으로는 그랜저를 살 수 없었다는 얘기죠. 하루도 안 쉬고 일하고 한 푼도 안 쓴다는 대전제가 현실성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당시 그랜저 할부기간은 기간에 따라 변동이 있긴 했지만 24~36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사람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풍부해진 안전장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렴해진 그랜저의 가격은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2세대 그랜저는 1세대를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그랜저 오너가 늘어난 것이 현대에게는 상상도 못한 악재로 돌아왔습니다. '회장님 차'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랜저가, 조금씩 '회장놈 차'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랜저 오너'가 행패를 부렸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프라이드 구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4년 당시 롯데그룹 신준호 부회장의 아들이었던 신동학씨가 친구들과 같이 ‘그랜저’ 차량을 타고 가던 도중, 그랜저 차량 앞으로 끼어든 프라이드 차량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프라이드 차량 운전자를 집단 폭행한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이 일로 그랜저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긴 했지만,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몇달 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건 바로...

‘지존파 사건’입니다. 당시 지존파는 ‘부자를 죽인다’는 행동강령 아래, (1) 부자를 죽인다-> (2)그랜저 타는 사람은 부자다’->(3)고로 우리는 그랜저 타는 사람을 죽인다’는 끔찍한 발상을 실제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조직원6명이 전원 사형됐습니다.

그랜저를 타는 사람이 요즘 말로 ‘갑질’ 범죄를 자행한 데 이어, 그랜저를 타는 사람이 끔찍한 범죄의 대상이 되자 그랜저의 사회적 위신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정주영 회장조차 좌지우지했던 ‘회장님 차’ 그랜저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죠. 그리고 현대는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랜저를 버리기로 했던 겁니다.

현대는 96년 출시된 그랜저의 고급형 페이스리프트 차량의 이름을 ‘다이너스티’로 개명하고, 미쓰비시와 다시한번 ‘최고급 세단’ 합작 개발을 선언합니다 (이 차량이 훗날 에쿠스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현대가 그랜저를 버리려고 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랜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장님 차’로서의 존재감을 남기고 있었고, 그 명성 덕분에 대형차 시장 판매량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현대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그랜저의 존재감을 다시금 느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1997년에 벌어졌던 [신창원 탈옥 사건]이었죠.

신창원은 1989년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흉악범입니다. 이후 1997년 탈옥에 성공한 신창원은 2년 넘게 도주하면서 희대의 탈옥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탈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7년 초, 신창원은 주민 신고로 경찰에 검거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창원이 훔친 그랜저 차량을 몰고 세차장을 이용했는데, 세차장 주인이 신창원을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세차장 주인이 ‘탈옥수 신창원’을 제대로 알아보고 신고했었던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세차장 주인은 [젊은 사람이 그랜저를 타고다니는데 수상하다]는 이유로 누군지도 모를 [젊은 그랜저 오너]를 경찰에 신고했던 거죠. 즉 현대가 그랜저를 버리려고 했던 것과 별개로 여전히 그랜저는 [젊은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겁니다.

2세대 그랜저는 수입차시장 개방과 다이너스티 출시라는 악재 속에서도 꾸준히 대형세단 판매량 1위 자리를 지켜냈고, 브랜드가치 평가도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위엄을 보여줬죠. 현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랜저는 어느새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패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습니다. 가뜩이나 ‘다이너스티’를 출시한 상황에서 미쓰비시와 고급 쇼퍼드리븐 차량 개발에 착수중이었기 때문에 그랜저를 계속 ‘회장님 차’ 포지션으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예상치 못한 외통수에 고뇌를 거듭하던 현대는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닿게 됩니다.


'[회장님 차] 그랜저를 가만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라면…'


'[그랜저]가 회장님 차가 아니면 해결되겠네?!'



▶ 인생사 새옹지마…‘강등’당한 덕분에 ‘대박’난 그랜저 XG

공룡이 멸종된 이유를 아마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가장 유력한 학설은 ‘운석 충돌’입니다. 지구를 지배해오던 생태계 회장님 공룡은 운석 충돌과 함께 멸종되었고, 작은 덩치로 숨어지내던 포유류들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죠.  1998년,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도 이 ‘대멸종’을 방불케 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었습니다. 바로 IMF였죠. 내노라하던 우량기업이 부도처리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와중에 1998년, 현대는3세대 그랜저 그랜저 XG를 출시합니다.

‘내가 이끌어가는 세상’이라는 그랜저 XG의 캐치프레이즈는 의미심장했습니다. 전 세대까지 운전기사가 운전을 하고 소유주는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아가는 ‘쇼퍼드리븐’ 카였던 그랜저가, 이제 오너가 직접 운전을 하는 ‘오너드리븐 ‘차로 변했기 때문이죠.  현대는 새로 자체개발한 EF쏘나타의 플랫폼을 베이스로 3세대 그랜저를 오너드리븐 차량으로 재정립했습니다.

예전 [쏘나타] 칼럼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실 쏘나타를 키워낸 건 8할이 그랜저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그랜저가 쏘나타의 플랫폼을 쓰면서 쏘나타가 그 관계가 뒤집힙니다. 그래서인지 ‘회장님 차’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기능인 ‘뒷좌석 전동 리클라이닝’기능도 과감하게 삭제했죠. 하지만 과거 공룡 대멸종 시기, 거대한 공룡이 멸종되는 와중에 덩치를 줄였던 포유류가 살아남아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처럼 ‘회장님 차’ 간판을 벗어던진 게 3세대 그랜저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IMF 이후 우리 사회는 IMF의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렸습니다. 호화 사치품 구입, 해외여행 외화탕진 등 ‘개인의 과소비’로 인해 경제위기가 촉발되었다고 말이죠.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서도 버젓이 실려 온 국민에게 ‘절약’이 강요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아나바다’라는 네 글자가 사회를 지배했던 시절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진짜 회장님’이 아니고서야, 좀 먹고 살만하다는 이유로 ‘회장님 차’를 구매한다면 ‘과소비’를 한다며 매국노 취급받기 딱 좋은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랜저 XG는 ‘오너드리븐’으로 차급이 ‘강등’된 덕분에 이러한 비난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3세대 그랜저는 ‘오너드리븐’을 지향한 덕분에 가격 인상을 큰 폭으로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사상 최초로 ‘최저임금으로 계약할 수 있는 그랜저’ 가 되었죠. 1998년, 2060만원으로 출시된 가장 낮은 등급의 그랜저 XG는 1525원이었던 당시 최저임금으로 약 13508시간을 일해야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 8시간 기준으로 환산하면 4년 8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한푼도 쓰지 않고 모은다면 60개월 할부한도 이내로 최저트림 그랜저를 아슬아슬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 프레임리스 도어를 적용한 XG쏘나타 (출처 : 넷플릭스 서울대작전 예고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랜저가 ‘품격’을 모조리 내려놓은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내 최초로 프레임리스 도어를 채택하며 디자인 혁신을 시도했고, 체어맨 등 쇼퍼드리븐 차량에나 달리던 ‘풋브레이크’를 장착하고 모든 엔진 트림을 ‘6기통’으로 통일하면서 ‘4기통’이 일반적인 중형차와는 확실한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그 덕분에 3세대 그랜저 XG는 쏘나타와 플랫폼을 공유하면서도 쏘나타보다는 확실하게 ‘끕’이 높은 차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고급차를 원하고 구매할 경제적 여건은 되지만, 사회 풍조상 ‘회장님 차’를 사기에 눈치보였던 실수요층들이 가장 마음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차가 되었죠.

특히 IMF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소득 5분위 상위 20%의 소득은 더욱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지며, 대한민국의 양극화가 심화되게 됩니다. 이 시기, 경제회복에 연이은 소비심리 회복과 더불어 소득이 증가한 부유층들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거품소비’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죠.. 그랜저 XG는 더 이상 ‘회장님 차’는 아니었지만, ‘중형차 이상의 고급차’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고 그러면서도 소득 대비 가격수준은 이전 세대보다 낮아지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구하기 쉬워졌습니다. 덕분에 그랜저 XG는 ‘거품 소비’의 대상으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30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랜저가 시장에서 잘 팔리면 팔릴수록 그랜저의 희소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이는 현대에 있어 양날의 칼과도 같았습니다. 과거 1세대 ‘각그랜저’ 시절의 권위와 상징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죠.

사상 최대의 대성공을 거둔 그랜저 XG 너머로, 현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과거 각그렌저 시절 ‘명품’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을 것이냐
현재 진행형인 ‘대중적인 인기’에 집중할 것이냐

이 양립할 수 없는 외통수 속에서
현대는 다시 한번 기막힌 묘수를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2부에 계속됩니다


▶ 영상으로 미리 보는 뒷 이야기...!
▶ [차부심 EP.10] 신형 그랜저 '성공신화'의 비밀! 그랜저가 36년째 우리를 설레게 만드는 이유 // 100만 뷰 돌파 구독자 경품 이벤트에 참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