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EV9로 호주를 여행하다!

평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에 일거리를 가져가는 세상 못난 남자…. 바로 나다. 지금 당신이 읽는 이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모님께 허락은 구했어요? 정말 괜찮겠어요?”

신혼여행으로 호주 가는 김에 현지 시승기 써보겠다고 했더니 현대차그룹 담당자가 펄쩍 뛰었다. 그의 걱정대로 그녀도 내키지 않아 하긴 했지만, 내 자동차 사랑을 알기에 이미 허락한 뒤였다. 그러나 삶은 역시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현대 스타리아 또는 i20 N 시승차를 요청했건만 엄한 답이 돌아왔다. “내연기관 차는 좀 뻔하고, 우리나라에 호주 전기차 시승 콘텐츠가 없던데 EV9 타보실래요?” 그 넓은 땅덩어리에서 전기차를…? 그래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 없었다. “그, 그러죠 뭐.”

시드니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외곽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꺼리는 전기차 장거리 시승을 충전 시설 열악한 호주에서, 더구나 신혼여행에서 하게 됐다. 그나마 레이 EV 같은 작은 차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11시간 비행 동안 이코노미 클래스를 인내하고, 덜컹거리는 낡은 택시를 탄 뒤 기아 시드니 본사에서 만난 EV9는 5성급 호텔처럼 아늑했다. 넉넉한 차체에 올라타 폭신한 스티어링휠을 잡으니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달까.

“호주는 규정 속도를 조금만 넘어도 얄짤없이 단속하니까 절대 과속하지 마세요.” 기아 호주 담당자가 당부했다. “넵! 헤드업 디스플레이에 뜨는 제한 속도 보면서 철저히 지킬ㄱ…. 아니,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디 갔죠?” 청천벽력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이 차는 EV9 숏레인지 뒷바퀴굴림 에어 모델이라서 기능이 없어요.” 귀를 의심했다. 롱레인지 네바퀴굴림 모델의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 454km(우리나라 기준)에 맞춰 계획 다 짜놨는데, 배터리 용량이 23.7kWh나 작은 76.1kWh 숏레인지 시승차라니. 호주 제원표는 443km를 달린다고 표시하지만, WLTP 기준이라 10%를 덜어낸 실제 예상 주행가능거리는 400km에도 못 미친다. 내가 뭐 기아에 실수했나?

옆에 탄 아내가 걱정할까 봐 일단 내색하지 않고 출발했다. 시드니 외곽 주택가로 향하는 길, EV9는 부드럽게 도로를 흐르며 생소한 환경에 긴장한 우리를 누그러뜨렸다. 이런 평화가 그리웠다. 이명이 생길 정도로 지속적인 비행기 소음과 삐걱거리는 택시 하체 소리에 한순간도 귀가 쉬지 못했던 탓이다. 역시 전기차는 정숙성 하나만큼은 발군이다. 그 대가로 주행가능거리 걱정을 가슴 한편에 심어놓긴 했지만.

첫 5일간은 시드니 안팎의 명소를 훑었다(그래도 신혼여행이 먼저니까). 오페라 하우스, 블루 마운틴, 세인트 메리 대성당, 본다이 비치 등등. EV9는 도심 근교 여행에 적격이었다. 높직한 시야와 커다란 옆 창문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그만큼 덩치가 컸지만 보닛이 네모 반듯해 너비가 한눈에 들어오고 큼직한 사이드미러가 사각지대 없이 옆을 비춰 좁은 호주 도로에서 운전하기도 수월했다. 걱정했던 전기차 충전 문제는 없었다.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무료 충전기를 꽂았더니 따로 시간 낼 필요도 없을뿐더러 충전비가 한 푼도 들지 않아 되레 좋았다(대신 주차비가 비싸다). 희망도 생겼다. 도심 주행 중 전비가 6.1km/kWh까지 치솟으며 100% 충전했을 때 계기판 예상 주행가능거리가 500km를 넘었다.

6일째, 드디어 광활한 호주를 맛볼 본격적인 자동차 여행을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출발해 경치 좋은 140km 해안 코스 ‘그랜드 퍼시픽 드라이브’를 거쳐 남쪽으로 4일 동안 왕복 1000km를 넘게 달리는 나름의 대장정이다. 본디 숏레인지 모델 주행가능거리에 맞춰 계획을 손볼까 고민했지만, 뛰어난 전비를 보고 원래 일정대로 강행했다. 시드니를 벗어나 두어 시간 달렸을 즘이었을까.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쭉 뻗은 도로가 수직으로 가르는 대륙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래도록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로망을 실현하는 순간이다. 비록 상상 속에선 미국 8기통 머슬카에 앉아 있었지만, EV9는 멋만 조금 부족할 뿐 전혀 아쉽지 않았다. 머슬카처럼 여유롭게 최대토크 35.7kg·m를 뿜을 뿐 아니라, 완전히 잠재운 파워트레인 진동은 8기통 엔진의 풍요로운 회전 질감 따위 우스웠다. 무엇보다 1950년대 길이 5.7m 거대한 머슬카가 그랬듯이 2.3t 육중한 무게와 3.1m 기다란 휠베이스로 너그러이 노면 충격을 삼키며 직선로를 미끄러졌다. 금발은 아니어도 옆자리에 귀여운 미녀까지 탔으니 진정 꿈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이렇게 안 쓰면 영원한 꿈에 빠질지도 모른다).

왼쪽엔 푸른 태평양, 오른쪽엔 깎아지른 절벽, 그 사이를 달리는 그랜드 퍼시픽 드라이브 도로 풍경은 가히 점입가경이었다. 도저히 창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어 구르는 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로 시원한 파도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고 12월 호주의 따뜻한 바닷바람이 목덜미를 휘감았다. 오픈카였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천장 높고 창문 커다란 EV9도 절경을 만끽하기에 훌륭했다. 그제야 시승차 사진 찍을 때마다 오리너구리처럼 입을 내밀던 아내도 인정했다. “EV9 잘 받은 것 같아, 오빠라면 분명 가장 싼 경차 같은 차만 렌트했을 테니까.”

절벽을 따라 굴곡진 도로는 멀리서 봐도 멋졌지만, 직접 달리니 더욱더 좋았다. 커다란 코너를 꺾어 돌아가면 또 다른 절벽이 파노라마로 나타나니 지루할 틈이 없다. EV9도 매끄럽게 선회하며 황홀한 분위기를 지켜냈다. 부드럽게 조율한 서스펜션이 무색하게 바닥에 내리깐 463kg 배터리를 무게 추 삼아 쏠림 없이 코너를 공략했고, 전기모터가 코너 진입 감속과 코너 탈출 가속을 선형적으로 이으며 쾌적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호주 동부 해안을 타고 모두 415km를 달린 뒤 출발 후 첫 충전기를 물렸다. 제원표 예상 주행가능거리 400km 훌쩍 넘긴 셈이다. 배터리 잔량이 겨우 2%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지만, 이상적인 신혼여행 일정을 그대로 지켜내 다행이었다. 약 40분가량 해안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확인한 배터리 잔량은 91%. 350kW 초급속 충전을 여과 없이 들이키는 800V 시스템이 사뭇 대견하다. 여태 무료였던 충전기와 달리 1kWh에 520원(0.6호주달러) 충전 비용을 냈으나 그래 봤자 3만원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이후 다시 충전 비용을 내는 일은 없었다. 사흘간 묵은 호텔에 무료 완속충전기가 있어, 아침마다 배터리 100%로 여정을 시작한 덕분이다. 400km 남짓한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는 직접 여행 다니며 타보니 충분했다. 호텔을 기점으로 피시 앤 칩스 맛집을 찾아 150km 거리를 달리고, 치즈 케이크 먹으려고 아예 치즈 산지를 방문하는 등 헤프게 쏘다녔지만 하루 400km는 웬만해선 넘지 않았다. 멀리 달리기 도전이 아닌 느긋한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에 여행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 그만한 거리를 달릴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이윽고 그토록 오지 않기를 바랐던 자동차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시승차를 반납할 시드니를 향해 북쪽으로 쉼 없이 달렸다. 참 같은 길인데 여행 출발과 복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설레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고, 여행 내내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구경하던 아내도 피로가 쌓였는지 잠에 푹 빠졌다(서운할 정도로 한 번을 안 깼다). 새삼 본래 원했던 스타리아나 i20 N을 탔으면 어땠을지 그려봤다. 스타리아는 이토록 고요하게 달리지 못하고, i20 N은…. EV9 트렁크에 널어놓은 29인치 여행용 캐리어 두 개와 각종 식료품을 그대로 실으면 아내가 누울 공간이 없을 테다. 음, EV9라서 다행이다.

다음날 아침, 기아 시드니 본사에 도착해 9박 10일간의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반납 직전 확인한 계기판 트립컴퓨터 숫자는 누적 주행거리 1402.1km, 평균전비 5.7km/kWh다. 호주 공인전비 5.1km/kWh를 훌쩍 뛰어넘은 결과다. 충전 비용으로 쓴 돈은 한차례 급속 충전 비용 3만2000원이 전부. 충전기 문제는 없었고, 충전만을 위해 낭비한 시간도 없었다. 그만큼 계획을 꼼꼼히 짜긴 했지만, 으레 겁먹었던 호주 전기차 시승은 우리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겼다. 편안히 이동했고 남다른 시승 콘텐츠까지 챙겼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다 한 셈이다.

호주에서 아내와 하루를 더 보낸 뒤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이번 여행 어땠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국 가기 싫을 정도로 행복했어, 자동차 여행도 너무 좋았고." 휴~ 그녀가 만족한 성공적인 신혼여행이었다.

글·사진 윤지수

<탑기어> 2024년 3월호(102호)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