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가가 안정은 사장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1년 전 최대주주 SK스퀘어가 11번가에 대한 콜옵션(매도청구권)을 포기한 뒤, FI(재무적투자자)와 지분 동반매각을 추진 중인 만큼 안 대표는 회사의 밸류업 전략에 고삐를 당길 전망이다. 각자대표를 지냈던 하형일 SK스퀘어 최고투자책임자(CIO)의 퇴임으로 11번가 매각 업무를 위임받은 송재승 SK스퀘어 CIO(부사장)와 안 대표의 호흡도 향후 관심사다.
안정은·송재승의 호흡
SK스퀘어는 지난 5일 2025년 조직개편 및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하형일 SK스퀘어 CIO의 퇴임에 따라 자연스레 11번가는 안정은 사장의 단독 대표체제로 운영된다. 11번가 매각 관련 작업은 포트폴리오 관리 담당 송재승 SK스퀘어 CIO가 이어받아 진행할 예정이다. 송 CIO는 지난해 SK쉴더스 매각을 포함해 원스토어 투자유치, 나노엔텍 지분전략매각, 티맵모빌리티 투자유치 등을 주도한 인물이다. 포트폴리오 회사의 매각과 밸류업 활동 지원에 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5년생 안 대표와 1979년생 송 CIO가 호흡을 처음 맞추는 건 아니다. 둘은 앞서 2018년 나란히 SK그룹에 합류했다. 안 대표는 SK플래닛으로부터 11번가의 인적분할과 함께 서비스 총괄 기획 및 운영을 맡았고, 같은 해 한 사모펀드 운용사에서 근무하던 송 CIO는 SK텔레콤 전략투자담당으로 영입됐다. 이때 11번가는 지분 80.3%를 쥔 SK텔레콤 산하에 편제돼 2023년을 목표로 기업공개(IPO) 여정을 시작했다.
이후 SK텔레콤과의 물적분할로 투자 전문 중간지주사 SK스퀘어가 출범한 2021년 11월을 전후로 두 인물의 접점은 급속히 늘었다. 3월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 인수전을 비롯해 8월 11번가와 아마존의 해외직구 서비스 제휴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합을 맞췄다. 11번가는 물적분할과 동시에 SK스퀘어(지분 80.3%)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2022년부터는 11번가 이사회에 함께 참여하며 사업상 주요 결정을 조율하고 있다. 송 CIO가 2021년 9월 기타비상무이사로 먼저 선임됐고, 안 대표는 2022년 5월 당시 COO(최고운영책임자)에 오른 직후 사내이사로 합류했다. 이듬해 1월 안 대표는 11번가 각자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매각 속도 낼 수 있을까
안정은 단독 대표이사 체제 아래 11번가는 매각 기반을 다지는 데 속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올해와 동일하게 수익성 강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 2025년을 헤쳐나갈 계획이다. 올 3분기 누적 524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 중인 11번가로선 ‘흑자전환’이 당장 기업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주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주력인 오픈마켓 사업에서 목표 도달까지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11번가는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연속 이 부문 흑자를 내는 데 성공했다. 리테일(직매입) 부문을 포함하면 다시 적자로 돌아서긴 하지만, 올 3분기까지 영업손실 규모를 6개 분기 연속 줄였다는 점도 안 대표 유임에 힘을 실어준 지점이다. 마케팅 효율화 및 사옥 이전 등 고정비 절감 노력이 동반된 결과다.
그간 안 대표는 버티컬 서비스 론칭을 통한 고객 경험 확장과 체류시간 확보에 공들여 왔다. ‘신선밥상’, ‘우아럭스’, ‘키즈키즈’, ‘리퍼블리’, ‘OOTD’ 등이 대표적이다. 특가 중심의 전문관인 ‘9900원 샵’, ‘쇼킹히어로’를 통해 고객의 초저가 수요를 충족시킨 전략도 유효했다. ‘신선밥상’은 3분기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45% 성장했으며, 가성비 전문관 ‘9900원샵’은 오픈 1년 만인 지난 9월 최대 월 거래액 실적을 달성했다.
문제는 매출이 쪼그라들었다는 점이다. 올 3분기 11번가의 누적 매출은 4280억원으로 전년 동기 6019억원과 비교해 28.9% 줄었다. 이대로라면 2018년 법인 설립 이래 처음 역성장하게 된다. 현금흐름을 비롯한 곳간 사정도 악화했다. 3분기 영업활동현금흐름은 41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말 이 지표가 517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올해 11번가가 본업으로 벌어들인 현금이 크게 줄었다는 의미다. 3분기 말 기준 FI가 들고 있는 11번가 지분 18.2%에 해당하는 장부금액도 178억원에 불과했다. 해마다 11번가의 순자산이 감소한 영향인데, 2018년 말 FI 측 장부금액은 958억원에 달했다.
1년 동안 쳇바퀴... 난항 예상
11번가는 지난해 말 매물로 나왔다. 당초 2018년 FI인 나일홀딩스컨소시엄(H&Q코리아·국민연금·새마을금고)한테서 5000억원을 투자받으며 2023년 9월까지 IPO를 약속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하면서다. 계약에 따라 FI는 콜앤드래그 옵션을 발동했다. FI가 SK스퀘어 지분(80.3%)을 끌어다 매각(드래그얼롱)을 추진하되, 그 전에 SK스퀘어가 FI 지분(18.2%)을 되살 수 있는 권한(콜옵션)을 준 게 골자다. 그러나 SK스퀘어는 지난해 11월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고 FI 주도로 동반매각 절차가 시작됐다.
하지만 새 주인은 1년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초반 신세계, CJ 등이 관심을 보였고 중국 알리바바그룹이나 큐텐 등 이커머스 업체도 매각 협상에 나섰으나 결렬됐다. 올 8월에는 식자재 유통업체 오아시스와의 인수합병(M&A) 작업이 주요 FI인 국민연금의 반대로 무산됐다.
유통 생태계가 쿠팡으로 재편된 이상 11번가 매각은 앞으로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2018년과 비교하면 낮아진 기업가치에 FI의 원금 회수마저 불투명하단 우려다. 실제 FI는 투자 당시 11번가의 몸값을 2조7000억원 수준으로 책정했고 증시에 입성한다면 4조원대까지도 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최대주주 SK스퀘어 역시 11번가 지배지분 80.3%에 대한 장부금액을 최초 1조494억원에서 2000억원 이상 상각된 8340억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SK스퀘어가 콜옵션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계약상 SK스퀘어는 내년 말 한 번 더 콜옵션 행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잇따른 매각 고배로 FI의 기다림이 한계에 도달한 만큼, 지분을 되사옴으로써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돕지 않겠느냐는 이유다. 다만 이 경우 SK스퀘어 또한 막대한 자금 출혈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11번가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쉽사리 가시지 않을 거란 관측이다.
박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