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Monthly] 기쁨의 몸짓

지난 6월 28일 문학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SSG 랜더스의 시즌 8차전. LG는 5회까지 상대 선발 투수에게 힘을 쓰지 못하며 6 대 1까지 뒤처졌다. 야구에서 적잖게 느껴지는 점수 차. 하지만 6회부터 연속 안타로 야금야금 차이를 좁힌 LG는 8회 홍창기의 적시 3루타로 기적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이때 중계 화면에는 3루 베이스를 밟고 팀 더그아웃을 향해 세리머니를 하는 그의 모습이 잡혔다. 더욱이 평소 내성적인 편이라던 그였기에, 그가 목에 핏줄이 서도록 크게 포효하는 모습에 팬들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의 파이팅 덕분일까. 경기의 흐름은 순식간에 뒤집혔고, 이윽고 터진 결승타로 LG가 승리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이처럼 거대한 흐름을 빼앗아오기 위한 크고 작은 몸짓들은 오늘도 야구장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7월 14일 작성)

에디터 전윤정 사진 나인비,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 KT 위즈, SSG 랜더스

세리머니(ceremony). 사전적인 의미로는 격식을 갖춘 의식을 일컫는 말로, 축하의 의미가 담긴 본질을 생각하면 셀레브레이션(celebration)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이에 축구에서는 득점 뒤 축하 행위가 나올 때 ‘골 셀레브레이션’이라는 표현도 으레 쓰곤 하지만, 야구계에서는 아직 ‘세리머니’가 익숙한 모양.

야구에서는 경기 중 나온 긍정적인 상황에 대해 행하는 다양한 동작들을 모두 세리머니의 범주로 보는 편이다. 득점까지의 플레이 과정이 끊기지 않고 연속적인 축구, 농구, 배구 등의 종목과 달리, 야구에서는 1점을 내기까지 여러 가지 분리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안타, 볼넷 등 하나의 플레이가 이뤄지고 나면 볼 데드가 선언되기 때문에 야구에서는 타 종목보다 세리머니를 행할 기회가 빈번히 주어지는 것이다.

#나의 기쁨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건 안타나 홈런을 때려낸 타자의 세리머니다. 공을 쳐 내고 누상에 나간 그들은 주먹을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리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등의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그 기쁨을 표현한다. 점수를 내는 타자들과 달리 점수를 막는 투수들은 감정 표현에 인색한 편이다. 하지만 우리 팀 투수가 승부처에서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뒤 주먹을 불끈 쥐거나 포효하는 장면을 포착하면 더한 전율이 올라오곤 한다.

배트 플립(타격 후 방망이를 던지는 행위) 역시 홈런 세리머니의 일종으로 꼽을 수 있다. 투수를 자극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여겨 온 메이저리그와 달리 KBO리그에서는 배트 플립에 관대한 탓에 세계 야구팬들 사이에서 배트 플립이 KBO리그 특유의 문화로 자리 잡기도 했다. 사실 배트를 던지는 행위는 타자의 풀 스윙에서 비롯된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홈런이라는 기록 자체의 극적인 측면 때문에 ‘빠던(빠따 던지기)’이라는 용어와 함께 세리머니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만의 상징적인 모션으로 트레이드 마크를 만든 선수들도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홈런을 바친다는 의미로 하늘을 향해 두 번 손짓했던 최준석, 홈런 뒤 베이스를 돌며 3루 주루 코치와 가위바위보를 했던 박병호와 양석환이 그 예다. 특히 양석환의 가위바위보 세리머니에는 2021년 판당 5만 원, 2022년 판당 50만 원의 내기가 걸려 있었기에 팬들 사이에서 더욱 화제가 됐다. 지난해까지 두산에서 뛰었던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는 안타를 치고 나가면 더그아웃을 향해 손날을 아래로 휘두르는 ‘넥 슬라이스’ 세리머니를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의 기쁨

어떤 플레이가 나온 상황이 중요한 경기일수록, 플레이가 경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선수들의 몸짓은 더욱 거세진다. 앞서 이야기한 홍창기의 거친 포효처럼 말이다. 지난해 LG와 키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역전 직후 쐐기 솔로포를 쳐낸 뒤 배트를 땅바닥에 힘껏 투척한 이정후의 퍼포먼스 역시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2021시즌까지 거슬러 가보면, 두산과 LG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친정팀을 향해 두산 유니폼을 펄럭이며 친정 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은 양석환의 사례도 떠오른다.

선수들이 선보이는 강렬한 동작들은 기쁨의 표출이기도 하지만,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해 의도된 전략이기도 하다. 지난 3월 개최된 WBC(World Baseball Classic) 조별리그 B조 1차전 호주전에서 화제가 됐던 강백호의 세리머니 사건을 떠올려 보자. 5 대 4로 뒤처지고 있던 7회 말, 담장까지 공을 보내며 2루에 나간 강백호는 짜릿한 어퍼컷을 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진 틈을 놓치지 않은 상대 2루수의 태그로 그는 어이없게 횡사하고 말았다. 대회의 분수령이라고 평가받은 중요한 경기였기에 경기 직후에는 그에 대한 비판이 쇄도했다. 그러나 도를 지나친 비난들에 도리어 그에 대한 옹호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는 끌려가던 경기의 분위기를 가져오려는 그의 의도가 팬들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정후의 배트 투척 세리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팬들에게 잊지 못할 전율을 선사함과 동시에, 거친 퍼포먼스로 더그아웃의 분위기까지 한껏 고조시키는 데 성공했다. 홍원기 감독 역시 해당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의 배트 투척 행위가 벤치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양석환의 유니폼 세리머니에 대해서도 역시 일부 비판적인 시각이 있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을야구에 임하는 선수들과 팬들의 열기와 몰입감을 더욱 고조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하나

팀에 따라서는 출루 시 사전에 함께 합의해둔 대로 일정 기간 제스처를 통일하기도 한다. 가령 올 시즌 SSG와 키움, 한화는 팀명의 이니셜을 본딴 손동작을 팀 세리머니로 선보이고 있다. SSG는 엄지와 검지를 수직으로 펴 ‘Landers’의 맨 앞 철자인 ‘L’을, 키움은 엄지, 검지, 중지를 펼쳐 ‘Kiwoom’의 ‘K’를, 한화는 둘째, 셋째, 다섯째 손가락을 펼쳐 ‘Eagles’의 ‘E’를 나타낸다.

오랜 기간 우승을 목표로 달려오고 있는 LG에게는 유독 우승에 대한 기대를 담은 세리머니가 많다. 올 시즌 LG는 세 번째 우승에 대한 염원을 담아 세 손가락을 펼치는 ‘V3’ 세리머니를 행하고 있다. 여기에 경기에서 승리할 경우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이 마운드 부근으로 둥글게 모여 발을 구르는 승리 세리머니도 함께 진행하며 그들만의 유대감을 과시하고 있다. 2021년에는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감싸는 이른바 ‘롤렉스 세리머니’라는 특별한 세리머니도 등장했다. 이는 1998년 고(故)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향후 한국시리즈 MVP에게 선물하기 위해 보관해 둔 롤렉스 시계를 꺼내 오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같이 훈훈해지는 팀 세리머니도 있다. 두산은 지난 5월 한 달간 공익 플랫폼 네이버 해피빈과 함께 ‘기부럽 캠페인’을 진행해 학대 피해 아동을 지원했다. 안타나 홈런이 나올 때마다 각각 10만 원과 100만 원을 적립하고, 선수들은 손으로 하트를 마구 발사했다. 선수단 내부적으로는 세리머니를 잊으면 커피를 사기로 약속했다는 후문. 하트의 시작은 구장을 찾은 가족들에게 마음을 전하던 양석환으로, 두산의 이번 캠페인은 그의 작은 몸짓이 선수단 전체로 번져 뜻깊은 결과로 남은 사례다. 출루한 선수마다 하트 동작이 달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는 반응이다.

작년에는 KIA 선수단의 ‘시옷 세리머니’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2일, KIA의 소크라테스 브리토는 안면에 패스트볼을 맞고 코뼈 골절 판정을 받았다. 당분간 에이스 타자의 결장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맞은 다음 날. 나성범은 소크라테스를 위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응원가 안무인 ‘시옷 댄스’를 팀 세리머니로 활용하자며 선수단에 제안했다. 그 덕분에 주로 팬들이 즐겨 왔던 안무를 선수들도 함께 즐기는 광경을 7월 한 달간 목격할 수 있었다.

세리머니가 펼쳐지는 공간은 비단 그라운드 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선수들이 모인 더그아웃도 그 현장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근래 유행하고 있는 더그아웃 홈런 세리머니다. 경기 중 홈런이 나오면 소품을 활용해 이를 축하하는 팀들이 있는데, 한화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2021시즌 어느 순간부터 홈런을 치고 나면 이글스 선글라스를 끼고 축제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2022년 초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 ‘한화이글스: 클럽하우스’에 따르면, 당시 외국인 타자였던 에르난 페레즈가 선글라스 착용을 통해 홈런에 대한 좋은 기억을 축하하고자 했다는 후문이다.

이후 한화 선수들은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캐릭터 ‘티모’ 모자를 쓰거나 ‘Our Time Has Come(우리의 시간이 왔다)’이라는 문구가 적힌 목걸이를 착용하는 등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쁨을 마음껏 만끽했다. 거기에 올 시즌부터는 친정팀으로 복귀한 오선진의 아이디어로 홈런을 친 선수를 폴라로이드 사진에 담아내는 앙증맞은 세리머니까지 펼치고 있다. 외에도 삼성에서는 ‘SL’ 로고가 달린 힙합 목걸이를, 키움에서는 왕관, 벨트, 카우보이모자를, KIA에서는 호랑이 탈을 홈런 세리머니 소품으로 활용해 왔다. 특히 KIA는 경기 중에 그치지 않았는데, 수훈 선수에게 호랑이 담요를 둘러주고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틀게 한 뒤 퇴근길에 팬들 앞에서 행진하는 세리머니를 선보이기도 했다.

#특별한 오늘

매일 보기는 힘들지만 특별한 오늘을 추억하기 위해 행하는 세리머니도 있다. 설령 그날이 마냥 기쁜 날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바로 경기가 우천으로 순연된 날이다. 오래간만에 찾아간 야구장에서 비로 인해 경기가 취소되거나 경기 중 노게임이 선언된다고 생각해보자. 생각만 해도 허탈하지만, 이때 그 아쉬움을 달래주러 선수들이 출동하기도 한다. 경기장에 찾아와 준 팬들에게 짧게나마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그라운드를 달려 방수포 위로 슬라이딩하는 일명 ‘우천 세리머니’다. 빗물에 자신들처럼 흠뻑 젖어버린 선수들을 보며 팬들은 또 하나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곤 한다.

하지만 더 짜릿한 물 사용법은 따로 있다. 이번엔 빗물이 아니라 생수다. 9회 말 혹은 연장 상황. 끝내기가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벤치에 있던 선수들은 어쩐지 몸을 점점 앞으로 내밀기 시작한다. 그 후 한순간 터진 끝내기 안타에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타자를 집요하게 쫓아 물을 뿌려댄다. 더운 날 시원한 물세례를 맞으며 희열을 느끼는 선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팬들로서는 그만큼 짜릿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끝내기 물세례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오며 야구에서 가장 전통적인 이벤트 중 하나로 굳어졌다.

사실 비단 끝내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 물세례는 그라운드에서 익숙하게 등장한다. 특히 활약 후 방송사 인터뷰를 마친 선수나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운 선배 선수에게 갑자기 물을 들이붓는 깜짝 이벤트를 상당히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지난해 통산 150승을 달성한 양현종과 올해 130승을 거둔 장원준은 팀 내에서 고참급 선수임에도 후배들의 물 폭탄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올 시즌 개막전에서 부임 후 첫 승을 거둔 이승엽 감독도 꽃다발 전달식에서 선수단이 뿌린 물을 꼼짝없이 맞아야 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만세를 부르지 않는데도 세리머니라고 불리는 이색적인 문화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무관심으로써 가장 큰 관심과 축하를 표현하는 ‘사일런트 트리트먼트’가 바로 그것이다. 사일런트 트리트먼트란 본래 심리학 용어지만, 야구에서는 데뷔 첫 홈런이나 이적 후 첫 홈런 등 특별한 홈런을 때려낸 타자를 놀릴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타자가 홈을 밟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면 벤치에 있던 선수단 전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에게 어떤 축하도 건네지 않는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메이저리그 문화에서 넘어온 이 세리머니는 한국에서도 ‘무관심 세리머니’, ‘침묵 세리머니’로 불리며 최근 자주 나타나는 추세다. 물론 첫 홈런 이후 터진 홈런에 대해서는 팀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띤 축하를 건네며 훈훈한 풍경을 자아낸다.

대상도 방식도 다양한 세리머니들. 하지만 개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이 우승 세리머니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반년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자 1년에 단 한 팀만 누릴 수 있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배터리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로 승리를 지켜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만세를 부르고 포옹하는 것부터 모든 선수가 뛰어나와 얼싸안고 뛰는 것, 우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샴페인 축포를 터뜨리는 것,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까지. 그 순간을 장식하는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세리머니가 돼 팬들의 가슴에 전율을 일으킨다.

이때 팀마다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를 미리 정해두고 동시에 행하며 멋진 한 컷을 남기기도 하는데, 최근 2019시즌 두산의 ‘셀카 세리머니’, 2020시즌 NC의 ‘집행검 세리머니’, 2021시즌 KT의 ‘줄다리기 세리머니’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과거 본지 117호(2021년 1월 호) ‘더그아웃 팁’ 코너에서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에 대해 소개한 적 있으니, 역대 챔피언들의 단체 세리머니가 궁금하다면 해당 기사를 참고하길 추천한다. 아무쪼록 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기쁨의 몸짓들이 그라운드에서 앞으로도 계속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


                    ▲ 더그아웃 매거진 148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3년 148호 (8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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