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별’ 국정원 블랙 요원, 순직조차 알릴 수 없는 숙명

김남일 기자 2024. 10. 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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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24일 국가정보원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름 없는 별’ 앞에서 방명록을 쓰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중앙 현관에 들어서면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검은색 바탕에 19개 은빛별이 두줄로 붙어 있다. 중앙정보부(1961∼1981), 국가안전기획부(1981∼1999), 국가정보원(1999∼현재) 요원으로 활동하다 순직한 이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별 밑에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 문구가 적혀 있다.

국가정보원 요원 2명이 지난달 말 네팔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9일 확인됐다. ‘탈북 경로 개척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알려졌지만, 국정원은 사망 경위 등은 확인해 주지 않았다. 공작 중 순직이라면 이름 없는 별의 숫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목숨 거는 블랙요원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은 2018년 문재인 정부 때 새로 만들어졌다. 기존 50여개였던 별은 박근혜 정부 마지막 국정원장이었던 이병호 원장 지시로 18개로 줄었다고 한다. 해외공작 임무 수행 중 순직 등 공적을 평가해 별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 군인이었던 이병호는 예편 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국제국장 등을 맡아 공작 임무에 밝은 ‘내부 출신’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청사에도 작전 중 숨진 요원을 기리는 ‘추모의 벽’(Memorial Wall)이 있다. 현재 140개의 별이 대리석 벽에 새겨져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6월 국정원을 방문했는데, 그 사이 별의 숫자가 18개에서 19개로 하나 늘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묵념 뒤 “2018년 제막한 ‘이름 없는 별’에 그 사이 별 하나가 더해진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름과 직책조차 남기지 않은 채, 오직 ‘국익을 위한 헌신’이라는 명예만을 남긴 이름 없는 별들의 헌신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고 했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요원은 외교관 여권을 가진 ‘화이트요원’과 신분을 위장한 ‘블랙요원’으로 나뉜다. 국정원 대북공작 부서에서 25년 근무했다는 정일천 가톨릭 관동대 초빙교수는 최근 ‘정보기관의 스파이들’이라는 책을 냈다. 책에서는 블랙요원의 활동을 이렇게 묘사한다.

“블랙요원들은 민간 개인회사 등의 협조를 받아 직원이나 지사장 등으로 위장 신분을 얻기도 하지만, 블랙요원이 직접 사업체를 설립하여 활동 기반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업체 즉, 위장업체이다. 블랙요원이 직접 운영하기도 하지만 공작에 참여하는 하부 공작원이나 협조자와 같은 에이전트를 내세워 운영하기도 한다.”

정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블랙요원에 대해 “까마귀라고도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짜 스파이”라며 철저한 익명성과 보안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6월4일 국가정보원을 방문해 국가정보원 개혁성과 보고회에 앞서 청사 내 ‘이름없는 별’ 조형물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순직 사실은 어떻게 공개됐을까

그래서 순직 요원 신분도 공개되지 않는다. 어떤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했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국외공작을 하는 블랙요원의 활동은 해당 국가 주권침해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수년간 노력해 현지에 구축한 비밀첩보 네트워크인 ‘휴민트’가 붕괴할 수 있다. 희생한 요원과 가족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망 사실이나 경위조차 알릴 수 없는 것이 최고 정보기관 스파이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번 국정원 요원들의 안타까운 희생과 별개로 사망 사실이나 ‘네팔’ ‘탈북 경로 개척’ 등 구체적 공작 내용이 전언 형태로 국정원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심각한 정보 유출에 해당한다. 관련 내용은 지난 8일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9일 요원 사망 경위 등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드러나지 않아야 할 국정원 활동이 드러나는 일이 최근 잦다. 지난 7월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화이트요원들이 한국계 미국인 북한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에게 ‘공작’을 한 사실이 미국 연방검찰 공소장을 통해 모두 공개되기도 했다.

국정원 퇴직자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재직 당시 알고 있던 설익은 내용을 공개하기도 한다. 지난달 조선일보에는 “국가정보원이 2022년 11월부터 민주노총·창원·제주 간첩단 등 ‘3대 간첩단’ 사건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북한 연계 혐의자 100여명을 포착하고도 수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내사 대상자로만 분류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정원 퇴직자 하동환씨의 인터뷰 내용에 기반한 보도였다. “최소 2∼3년의 내사 기간만 줬더라면 간첩단 조직 실체를 규명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근거로 혐의·내사 단계 내용을 퇴직 뒤 언론에 밝힌 것이다.

국가정보원직원법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직무와 관련된 사항을 발간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공표하려는 경우에는 미리 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비밀 엄수 규정을 두고 있다. 2011년 국정원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저서에 대해 이 규정을 근거로 출간 불허한 바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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