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범이 받은 8,000만 원 대출... 법원이 은행에 책임 물은 까닭은

장수현 2026. 9. 1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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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범에게 명의 도용 대출을 당한 피해자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근 은행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법원이 명의 도용 대출을 전자금융거래법상 '사고'로 보기 시작하면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5단독 오연수 판사는 지난달 21일 보이스피싱 피해자 A씨가 명의 도용 대출이 된 은행과 카드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0-3부(부장 제갈창)도 6월 23일 피해자 B씨가 명의 도용 대출된 은행 두 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서 은행들이 6,500여만 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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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사칭한 피싱범에 주민등록증 보내 피해
법원 "부정 접근 매체 사용한 '사고'에 해당"
피해자 다수는 면책 안 돼... 대출 계약 유효
피해자 측 "은행 본인 확인 방법 법에 명시해야"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이스피싱범에게 명의 도용 대출을 당한 피해자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근 은행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법원이 명의 도용 대출을 전자금융거래법상 '사고'로 보기 시작하면서다. 하지만 피해자가 책임을 떠안는 경우가 여전히 다수라는 점에서 은행의 대출 전 본인 확인 책임을 강화하는 쪽으로 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빠,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신분증 빼낸 피싱범

보이스피싱. 게티이미지뱅크

서울중앙지법 민사45단독 오연수 판사는 지난달 21일 보이스피싱 피해자 A씨가 명의 도용 대출이 된 은행과 카드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오 판사는 은행과 보이스피싱 현금 인출책 최모씨 등이 공동으로 2,700여만 원, 카드사가 660만 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0-3부(부장 제갈창)도 6월 23일 피해자 B씨가 명의 도용 대출된 은행 두 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서 은행들이 6,500여만 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A씨와 B씨는 자녀를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에게 명의 도용 대출을 당했다. A씨는 2021년 11월 "아빠 나 휴대폰 분실보상금을 받으려면 인증번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대신 사이트에 접속해서 번호 좀 받아줘"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 시키는 대로 원격제어 앱을 다운받았다. 자녀인 줄 알았던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주민등록증 사진도 보냈다. 조직원은 A씨 명의로 발급받은 모바일 OTP를 통해 4,900여만 원의 대출과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B씨는 2022년 11월 "엄마 나 휴대폰이 고장났는데 엄마 폰을 쓰려면 원격프로그램 설치하고 엄마 신분증 사진을 보내줘야 한대"라는 문자를 받고 마찬가지로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냈다. 보이스피싱범은 8,000여만 원의 대출을 받아 빼돌렸다. A씨와 B씨는 이자 부담 등을 피하기 위해 먼저 대출금을 갚은 후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은행이 배상해야 할 '사고'로 판단

피해자들은 대출이 전자금융거래법상 '사고'라고 강조했다. 법 9조 1항 3호는 "전자적 장치 또는 정보통신망에 침입해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접근매체의 이용으로 발생한 사고"의 경우 금융회사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다. A씨와 B씨는 피싱범들이 대출을 받을 때 명의를 도용해서 획득한 모바일 OTP, 공동인증서를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은행들은 피해자 잘못으로 사고가 났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법 9조 2항이 "사고 발생에 있어 이용자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책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자 부담으로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약정을 미리 체결"했을 때 피해자에게 손해배상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A씨 사건에선 "피해자가 직접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피싱범에게 넘겼다"고 했고, B씨 사건에선 "성명불상자의 문자 메시지만을 믿고 최소한의 확인도 안 한 채 주민등록증 사진 등 정보를 제공했다"고 했다. 피해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법원은 두 사람이 개인정보를 넘긴 건 '중대한 과실'이 아니라고 봤다. 앞서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싱범에게 속아 계좌번호와 계좌비밀번호, 주민등록번호, 보안카드번호 등을 모두 전달한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는데, A씨와 B씨가 이 정도의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보이스피싱범이 한 대출 계약은 '사고'가 맞고, 은행에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은행 본인 확인 의무 강화해야"

유동수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이 3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9회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두 사람은 책임을 피했지만 여전히 많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할 처지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을 상대로 보이스피싱 피해 고객이 낸 소송의 확정판결 중 승소한 건 전체 32건 중 6건에 불과하다.

일각에선 법원이 은행에 비대면 금융거래 시 본인 확인 의무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은 결과라고 해석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전보다 은행의 본인 확인 의무를 축소하는 취지의 판결을 내놨다. 앞서 하급심 법원들은 신분증 사진을 미리 촬영해 제출하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본인 확인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유효하다고 인정했다. 은행이 해야 하는 본인 확인 방법도 기존엔 △영상통화 △접근매체 전달 과정에서의 신분확인증표 확인 등 총 7개 방법 중 3가지 이상으로 정했는데 대법원은 "확인 절차가 당시의 기술적 수준에 부합하는 적정한 것이었는지 등" 추상적인 기준으로 대체했다.

B씨도 이런 대법원 판례가 나오며 패소할 뻔했다. B씨는 1심에선 "은행이 미리 촬영해둔 신분증 사진으로 확인하고 대출해줘 본인 확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대출 계약의 효력이 없다"며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하지만 2심 진행 중 대법원 판례가 나오자 2심 재판부는 "은행 계약은 효력이 있다"고 주장을 기각했다. 다행히 예비 청구한 손해배상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피해자 측은 특히 보이스피싱 사기 수법이 고도화하는 만큼 은행의 본인 확인 책임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씨를 대리했던 박재형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영상 통화로 신분증을 확인하는 등 본인 확인 방법을 조문에 직접 넣는 방식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금융회사의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금융회사가 우선 피해금을 보상하도록 하는 '무과실 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상 거래 예방 체계를 갖출 역량이 되는 금융회사에 주된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의 과실 여부는 부차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취지다. 국회 정무위원회엔 이런 내용의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이 다수 계류돼 있다. 반면 금융회사 측은 보이스피싱 사기에 관련된 통신사 등은 빼고 본인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건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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