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러시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던 현대자동차그룹이 다시 한 번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불과 2년 전 단돈 1만 루블(약 14만 원)에 매각했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되살릴 수 있는 ‘바이백(재매입)’ 옵션의 마감 시한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그룹 내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러시아 땅에서, 현대차는 “돌아갈 것인가, 완전히 떠날 것인가”라는 가장 어려운 질문과 마주했다.

러시아 공장, 한때 ‘푸틴의 자존심’이던 생산기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단순한 조립 공장이 아니었다.
2010년,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가 직접 준공식에 참석해 운전대를 잡았을 만큼, 이곳은 한·러 경제 협력의 상징이었다.
이 공장을 기점으로 현대차와 기아는 러시아 시장에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2021년 기준으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라다가 1위(35만 대), 기아가 2위(20만 대), 현대차가 3위(16만 대)를 차지했다.
사실상 러시아 승용차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현대차그룹이 점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모든 상황이 뒤바뀌었다.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자 현대차그룹도 결국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현지 기업 ‘아트파이낸스(Art Finance)’에 단돈 1만 루블에 매각했다.
다만, 향후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공장을 되살릴 수 있도록 2년 내 재매입권(바이백 조항)을 계약서에 남겨두었다.

공장 되찾으려면 ‘1조 원’…가격 폭등의 덫
문제는 이제 그 약속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올해 12월 31일, 바이백 옵션이 만료된다.
하지만 상황은 2년 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당시 장부가로 약 2,800억 원 수준이던 공장은, 지금은 아트파이낸스가 운영하는 러시아 브랜드 ‘솔라리스(Solaris)’의 생산 기지로 변했다.
이 회사는 현대차 크레타, 엑센트(현지명 솔라리스), 기아 리오 등을 외관은 그대로 두고 로고만 바꿔 판매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중국 광저우자동차(GAC)의 부품을 들여와 위탁생산까지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공장은 현재 러시아 내수시장에서 다시 ‘황금알을 낳는 공장’이 됐다.
아트파이낸스가 이 공장에 붙은 상표권과 생산라인 가치를 모두 포함해 평가할 경우, 현대차가 되사야 할 가격은 최대 1조 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이른바 “14만 원에 넘겼던 공장이 1조 원짜리 청구서로 돌아온 셈”이다.

러시아의 ‘몽니’, 그리고 현대차의 딜레마
러시아는 현대차의 재진입을 반기지 않고 있다.
현지 당국은 “한국 기업이 자발적으로 철수했으며, 현재 공장은 정상 가동 중”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즉, 현대차가 되돌아오려면 새롭게 계약을 체결하고, 현재 가동 중인 브랜드 운영권까지 인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현대차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하나는 ‘재진출’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사업 복귀가 아니라, 전쟁 중인 국가에 다시 투자한다는 국제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선택이다.
글로벌 3위 완성차 제조사로 성장한 현대차그룹 입장에서 브랜드 이미지 훼손은 치명적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완전 철수’다.
하지만 이 경우 러시아 시장뿐 아니라, 현대차의 기술력과 설비를 기반으로 성장 중인 ‘솔라리스’ 브랜드를 중국 업체와 러시아가 함께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현대차의 자산이 경쟁자의 무기가 되는 ‘부메랑 리스크’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전쟁 종전도, 협상도 ‘불확실’…트럼프 변수 남아
러시아 재진출의 최대 변수는 여전히 전쟁의 종전 여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2주 내 헝가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나 종전 논의를 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종전 선언이 나오지 않는 한, 현대차그룹의 러시아 복귀는 정치·경제적 리스크가 너무 크다.
업계에서는 “트럼프의 외교 행보가 현실화되면 현대차의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시계 제로”라고 분석한다.
러시아 시장, 여전히 놓기 힘든 ‘미련의 땅’
현대차그룹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러시아는 한때 현대차와 기아가 유럽 수출 물량을 대체할 정도로 높은 수익성을 거둔 시장이었다.
노동 비용이 저렴하고, 유럽과 가까운 물류 환경 덕분에 생산 거점으로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현대차의 흔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솔라리스 브랜드가 최근 러시아 내에서 급성장 중이다.
2024년 1~9월 판매량은 2만 2,700대에 달하며, 전년 대비 120% 급증했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자신이 세운 ‘공장’과 ‘기술’이 경쟁 브랜드의 성공 발판이 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셈이다.

결단의 시간, 두 달 남았다
현대차는 철수 이후에도 꾸준히 러시아 내 상표권을 유지하며 ‘언젠가 돌아올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올해에만 ‘ix10’, ‘ix40’, ‘ix50’ 등 10건 이상의 상표가 등록됐다.
기아 역시 ‘마이 모빌리티’, ‘그린 라이트로 가는 더 나은 방법’ 등 브랜드 관련 상표를 현지에 등록하며 ‘미래를 위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5년 12월 31일, 바이백 권한이 만료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완전히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치욕의 공장’을 되찾을 것인가, ‘독이 든 성배’를 내려놓을 것인가
현대자동차그룹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기회의 땅이자 아픈 기억의 무대다.
단돈 14만 원에 넘겼던 공장이 이제 1조 원짜리 ‘시험대’로 돌아왔다.
전쟁, 외교, 국제 여론, 그리고 경영 현실 — 그 모든 변수가 얽힌 채 현대차의 결단은 피할 수 없다.
재진출은 위험하고, 철수는 더 위험하다.
현대차가 이 ‘독이 든 성배’를 다시 들 것인지, 영원히 내려놓을 것인지 —
그 답은 올해 안에 내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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