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번번이 무산, 땅주인 줄줄이 감옥행…양재동 '터미널 부지'의 저주
지난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에서 양재IC까지 차량으로 이동했다. 서울 경계에 있는 양재IC는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권에 진입하는 첫 관문이 되는 도로다.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거의 하루 종일 전 도로가 꽉꽉 막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날 역시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 길이 막혔다. 양재시민의숲역에서 양곡도매시장까지 차로 이동하면 이론상 5분 안팎이면 충분한데, 20분 만에 겨우 도착했다.
파이시티는 터미널 부지 용도를 변경해 유통타운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고, 2004년부터 복합유통센터 건설을 추진했다. 지하 6층~지상 35층, 연면적 75만8606㎡ 규모로, 단일 복합유통센터로는 국내 최대 규모 시설을 계획했다.양재IC 사거리 일대는 서울 노른자 땅으로 불린다. 교통·물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경기 판교테크노밸리와도 가까워 기업과 연구소가 일찍이 자리 잡았다. IC 주변에는 현대자동차그룹글로벌경영연구소와 현대기아자동차본사 빌딩, LG전자 서초R&D 캠퍼스, 양곡유통센터·도매시장, 화훼공판장 등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IC사거리 남서쪽 부지 8만㎡는 허허벌판으로 방치된 채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양재동 옛 화물터미널 부지로 현재 식품기업 하림이 물류단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땅이다. 하림은 땅을 산 이후 7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림이 땅 주인이 되기 34년 전부터 이 부지는 끊임없이 개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사업 관련자들이 비리를 저질러 줄줄이 감옥에 가고, 시행사 대표들이 해외나 옥중에서 숨을 거두면서 부동산 업계에서는 ‘화물터미널의 저주’라는 말까지 나왔다.
■ 진로그룹→파이시티→하림…시행사만 세 차례 바뀐 ‘오욕의 땅’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화물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89년이다. 서울시는 도심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용산에 있던 시외버스터미널을 서초동 한국트럭터미널 자리(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로 옮기기로 했다. 한국트럭터미널의 모회사이던 진로그룹은 트럭터미널을 양재동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1987년 하반기부터 양재동에 9만6000㎡의 부지를 확보해 터미널을 신축했다. 1989년 9월에 트럭터미널 이전이 마무리됐고 1991년 한국트럭터미널은 진로유통과 합병, 진로종합유통으로 출범했다.
진로그룹은 주류회사에서 유통, 백화점, 건설 등의 분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진로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2004년 1월 법원 경매를 통해 양재동 부지는 시행사 파이시티에 넘어갔다.
이 시기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전임 서울시장이었던 시기와 맞물리는데, 개발 과정이 정권 관계자들의 각종 로비 의혹으로 얼룩지게 됐다. 파이시티의 계획은 기존 화물터미널 부지를 업무·판매시설을 짓는 것이 가능하도록 부지의 용도를 변경해야 가능한 사업이다. 용도변경을 하면 기존 화물터미널 운영으로만 수익을 내는 구조에서 벗어나 땅값이 오르고, 수익도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 실세로 알려진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오 시장 최측근으로 알려진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 등이 파이시티 인허가를 위해 거액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 관련자들은 모두 실형 선고를 받았다.
오세훈 서울 시장과도 악연이 있다. 오 시장은 보궐선거 과정에서 파이시티 인허가 문제로 공격을 받았다. 오 시장은 선거 과정에서 “파이시티는 내 임기 중에 인허가한 사안이 아니다”고 밝혔는데, 한 시민단체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포에 해당한다고 경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사업주들의 말로도 좋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진로그룹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 장진호 회장은 진로그룹 부도 이후 분식회계, 비자금 횡령 등으로 구속기소 돼 2004년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장 회장은 집행 유예기간 중 캄보디아, 중국 등에 도피 생활을 하다 2015년 4월 베이징에서 심장마비 증세로 사망했다. 파이시티 이정배 대표도 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횡령과 배임 혐의로 2017년 대법원에서 징역 8년형이 확정됐으며 2021년 2월 복역 중 숨을 거뒀다. 강철원 실장은 오 시장이 서울시장에 다시 취임한 2021년 이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됐다.
■ 서울시-하림 용적률 갈등 벌이며 사업 다시 표류
2016년 하림이 4525억원에 이 땅을 매수하면서 멈췄던 물류 사업이 재개됐다. 2015년 국토교통부가 이 부지를 도시첨단물류산업단지 시범사업지로 선정했는데, 이후 하림은 이 땅을 매입해 물류센터 복합단지 개발을 본격화했다. 하림은 “도심 내 식품 라스트마일(주문한 물품이 고객에게 배송되는 마지막 단계)물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림산업에 따르면 2029년까지 서울 서초구 양재동 225번지 일대 8만6000여㎡(2만6000평) 부지에 총 6조3000억원을 투입해 지하 8층~지상 49층짜리 물류·업무시설과 공동주택(998가구)·오피스텔(342실) 및 숙박시설을 포함한 복합단지를 지을 예정이다. 용적률 800%, 연면적이 147만5245㎡짜리인 초대형 개발 사업이다.
하지만 하림도 난관에 부딪혔다. 용적률을 놓고 서울시가 사업 초기부터 제동을 걸었다. 2016년부터 2021년 6월까지 서울시와 하림이 근거 법에 대한 입장 차로 갈등을 벌이면서 사업이 또 표류했다. 결국 2021년 하림이 “서울시가 위법·부당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며 감사원에 공익감사 청구를 신청했고, 감사원이 하림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시 사업 추진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양재동 물류단지 개발, 오세훈 시장이 또 결정권 쥐어
시와의 갈등이 일단락된 이후인 2021년, 공교롭게도 오세훈 서울 시장이 다시 돌아오면서 오 시장이 양재동 하림부지 인허가 전반에 대한 결정권을 쥐게 됐다. 도시 개발에 대한 의지가 높은 오 시장은 양재동 하림부지 개발이 진척될 수 있도록 물류 관련 부서를 신설해 하림부지 개발을 전담하도록 했다. 다만 논란이 많은 만큼, 오 시장도 신중한 결정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개발 규모와 용도에 대한 문제가 이슈로 남았다. 업계에선 서울시가 또다시 불필요한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터미널은 도심 알짜 부지에 있는 경우가 많고, 기존 용적률이 낮거나 개발에 제한이 걸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용도변경 과정에서 사업자에 대한 특혜 시비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며 “상습 정체 지역인 양재IC 옆에 물류·업무시설 외 대규모 주택을 짓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글=김리영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