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이 있기에 살맛 난다”...필드 위 ‘증오’를 이용하는 냉혹한 “쩐의 전쟁‘ [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2024. 10. 27.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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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KBO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중인 KIA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스. <연합뉴스>
올해 한국프로야구(KBO) 대단원의 막을 내릴 한국시리즈의 주연은 기아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스입니다. 미디어는 대진이 결정됨과 동시에 두 구단의 라이벌 관계를 주목했습니다. 양 팀은 40여년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한국시리즈를 각각 11회, 8회 제패하며 역대 트로피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들입니다. 원년부터 영호남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마스코트 역시 사자와 호랑이라는 백수의 왕들이라 라이벌 구도를 잡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1993년 혜성같이 등장한 두 천재 양준혁과 이종범의 데뷔 구단이기도 하지요.

다만 실제 팬들이 상대를 라이벌로 여길지는 미지수입니다. KBO 10개 구단 팬들 모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저 팀에게만은 지고싶지 않아”라는 강력한 라이벌 의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허구연 KBO 총재의 다음 숙제는 바로 이 ‘라이벌 구도’ 강화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력한 라이벌은 리그의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팬들의 몰입감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이벌은 돈이 됩니다. 사무국도 구단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라이벌 구도의 ‘경제적 효과’는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동네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대학 농구팀 경기도 지정해주는 965호 법안
미국 대학풋볼 라이벌중 하나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의 경기 <출처=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홈페이지>
지난 6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회에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965호 입법안이 발의됐습니다. 내용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내의 대학들이 지역내 다른 대학들과 적어도 연 1회는 미식축구·농구 등 경기를 치르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법안의 실질적인 내용은 노스캐롤라이나대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등 주내 강팀들이 인근 팀들과 경기 대신 다른 지역과의 교류전을 갖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입법기관이 대학의 스포츠 경기 일정을 강제하는 법안을 낸 것은 경제적인 문제와 결부돼 있습니다. 법안은 “스포츠 관광이 노스캐롤라이나 경제에 필수적이며, 대학스포츠는 주에 수백만 달러의 경제적 영향을 미친다”며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지역내 스포츠 라이벌리를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즉 강팀이 지역 라이벌이 아닌 타지 팀과 경기를 하면 관중들이 모이지 않을 것이란 뜻이지요. 법안을 낸 의원은 “(지역 라이벌전이 없어지면서) 레스토랑은 덜 붐비고 호텔은 만실이 되지 않았고, 이런 큰 경기에 의존하는 많은 소도시의 경제 발전에 타격을 입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연고지가 작거나 성적이 신통찮은 팀들은 강한 지역 라이벌과의 경기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실제로 에반 오스본 미국 라이트대 경제학과 교수는 2008년 ‘라이벌들’이란 논문을 통해 이에 대한 실증적 근거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뉴욕 양키스 덕좀 본거죠”...라이벌전이 불러오는 ‘돈돈돈’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대표 라이벌 관계인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경기에 벌어진 타격(?)전 <출처=US weekly>
오스본 교수는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영원한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간의 관계를 주목했습니다. 당시 기준 월드시리즈 우승횟수는 양키스가 27번, 레드삭스가 7번으로 격차가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레드삭스는 1918년 이후 단 2번의 월드시리즈 반지를 획득했을 뿐, ‘악의 제국’ 양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습니다. 1900년 이후 양키스 대상 승률은 45.7%에 불과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양키스를 상대로 한 최악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드삭스와 양키스의 라이벌 관계는 이런 숫자와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스본 교수는 “레드삭스는 양키스와 라이벌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며 “반면 양키스는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데 레드삭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레드삭스의 이런 전략은 꽤나 잘 통했습니다. 레드삭스는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MLB 구단들의 가치 평가에서 양키스, LA 다저스에 이어 3위(45억달러)를 차지했습니다. 보스턴보다 훨씬 큰 도시를 연고로 하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보다 54%나 큰 수치죠.

끈끈한 라이벌 관계는 구단 가치와 무관치 않아보입니다. MLB 상위 5개 구단은 양키스와 레드삭스,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 치열한 각축전을 보이는 팀들로 차있습니다. 나머지 한 구단은 컬트적인 팀문화로 지역에 관계없이 큰 인기를 끄는 시카고 컵스입니다.

라이벌전이 중요한 것은 실제로 들어오는 ‘현금’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1년에 단 12번밖에 경기를 하지 않은 미국 대학 미식축구는 스포츠 라이벌전의 경제적 가치를 손쉽게 볼수 있는 종목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한적한 곳중 하나인 아이다호주에선 보이시주립대와 아이다호대의 경기가 지역 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기 하나만으로 100만달러 이상의 경제효과가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앞서 지역 라이벌전을 ‘법제화’하려는 시도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올해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간 크리켓 대항전도 라이벌전이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올해 미국과 서인도제도에서 펼처진 크리켓 T20 월드컵에선 서로를 못죽여 안달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만났습니다. 당연히 팬들의 관심은 엄청났고, 티켓 가격은 최대 2만달러까지 치솟아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리그가 견원지간 ‘싸움’ 부추기는 이유는? 경쟁이 만드는 팬심의 마법
21세기 축구계의 두 아이콘인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출처=AP>
실제 리그를 운영하는 사무국들도 이런 라이벌전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미국프로풋볼(NFL) 32개팀은 4개팀씩 나뉘어 8개 지구로 분류돼있습니다. 이는 2002년 NFL 사무국의 재편 계획에 따른 것인데, 당시 지구를 나누면서 팀간의 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인접 지역 구단 팬들이 서로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8개 지구중 팬들의 라이벌 의식이 가장 강한 2곳이 지구내 팀들의 구장간 거리의 총합이 가장 짧은 곳이란 분석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리보다 강한 라이벌이 지는 것을 보기 위해 라이벌팀의 경기를 보는 팬들이 많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죠.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의 팬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눈물을 보기 위해 포르투갈 경기를 보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구단들 역시 경쟁이 치열한 상대들과의 경기를 포장해 팬들의 충성심을 끌어올리죠. 2016년 독일 쾰른 대학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격렬한 라이벌 구도는 팬들의 집단적 자존감과 응집력을 키우고, 이는 곧 팬들을 팀에 묶어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대팀에 대한 반감을 그 팀의 후원 브랜드에 전가한다는 분석도 있을만큼 ‘몰입’하는 팬들이 많은 것이지요. 이와 관련 연구는 각 구단들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마케팅 방법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상대팀의 공식 팀명보다는 별명으로 지칭하는 등 여타 경기와 다르다는 점을 적극 어필하는 것이지요.

“불씨를 키워라” 과몰입 부르는 ‘증오의 경제학’
K리그의 대표 라이벌 구도인 수원삼성과 FC서울의 ‘슈퍼매치’
모든 일이 그렇듯 장점 투성이인 라이벌 구도는 가끔 독이 돼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축구리그의 셀틱과 레인저스 구도가 대표적입니다. 레인저스 구단주는 2000년 셀틱에 앞서기 위해 “셀틱이 5파운드를 쓸때마다 우리는 10파운드를 쓰겠다”고 선언하며, 뒤없는 투자에 나섭니다. 이런 투자는 실제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경쟁심의 결과는 빚잔치로 이어졌고, 결국 구단은 매각돼 청산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한국 프로스포츠에서도 가능성이 보이는 라이벌전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K리그의 수원삼성-FC서울의 ‘슈퍼 매치’를 제외하면 ‘혈투’라 부를 수 있는 경기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이번 한국시리즈는 리그의 자양분이 될만한 강력한 라이벌 구도의 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000만 관객이란 이정표를 세운 KBO가 각 구단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해야할 일은 라이벌에서 비롯된 ‘증오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Enemies with Benefits: The Dual Role of Rivalry in Shaping Sports Fans‘ Identity.2016. Johannes Berendt. ◎Rivalries.2008. Evan Osborne ◎https://www.newsobserver.com/sports/college/acc/article289045219.html ◎https://www.technicianonline.com/news/rivalry-economic-development-drive-unc-intrastate-athletic-competition-bill/article_751d4004-2c43-11ef-b360-c70cad213646.html ◎https://slate.com/business/2013/08/sports-rivalries-the-economics-of-crosstown-hatre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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