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존중에 기반한 경쟁’ 이븐하게 익었지만…보류합니다
넷플릭스 세계관에서 안전하게 ‘계급’ 구현하는 요리 서바이벌
“김치가 이븐하게 익었다는 걸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군요.” “저는 야채의 익힘 정도를 중요하게 보거든요. 적당합니다. 생존이에요.”
묵은지김치찜을 만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자 ‘페친’들이 보인 반응이다. 어떤 이는 요즘 반찬을 ‘파인다이닝’ 형식으로 덜어 먹는다는 사진을 SNS에 게시해 ‘큰 웃음’을 줬다. 평소에는 생각 없이 먹던 요리도 이제는 재료가 ‘이븐’(Even)하게 구워졌는지, 익힘 정도는 적당한지, 간은 타이트한지 따지게 되거나, 눈을 가리고 요리를 먹으면 어떤 맛일까 상상하게 된다는 사람이 늘었다. 유튜브에서는 “아임파인다이닝 ‘모수부호’ 안섬재 셰프”가 활약 중이고,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가 있는 식당을 ‘도장 깨기’ 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2024년 9월17일 1~4회가 공개된 뒤 순차적으로 공개되고 있는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을 향한 반응이 뜨겁다. ‘흑백요리사’는 “맛 하나는 최고라고 평가받는” 요리사 100명이 경쟁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명장’으로 인정되거나, 국내외 요리 경연 대회 수상 경력이 있거나, ‘미쉐린 가이드’에 선정되는 등의 경력을 가진 유명 요리사 20명이 ‘백수저’로, 다양한 방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진 요리사 80명이 ‘흑수저’로 참여했다. 이들의 ‘맛’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은 요리연구가이자 방송인 백종원과 국내 유일 ‘미쉐린 3스타’ 셰프로 유명한 안성재가 맡았다.
‘흑백요리사’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비판적인 생각이 앞섰다. “또 경쟁 프로그램이야? 이제는 요리 세계도 계급을 나눠?”라는 피로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피로감은 기우였을 뿐 넷플릭스 구독을 끊었다가 ‘흑백요리사’ 때문에 재구독을 (고민)한다는 이가 속출했고,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티브이(TV)쇼 비영어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요리 예능은 한동안 유행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진 장르인데 ‘흑백요리사’가 이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우선 ‘익숙함’ 때문이다. 우리는 서바이벌 예능 콘텐츠를 그간 많이 봐왔다. 음악에서부터 요리까지 분야는 다르지만 이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감동적이거나 흥미로운 스토리텔링과 ‘주인공캐’ ‘빌런캐’ 등 개성을 가진 캐릭터가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다양한 미션 수행과 경쟁을 통한 성장 서사가 있으며, 승리할 가능성이 적은 ‘언더독’의 선전 등 반전 드라마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서바이벌 예능은 사실상 이런 공식의 반복이다. ‘흑백요리사’도 마찬가지다. 80명의 ‘흑수저’ 요리사가 경쟁한 1라운드부터 대중의 관심을 모을 법한 출연자들을 전면 배치하고 심사위원들의 캐릭터를 비교적 빠르게 구축해 도전과 반전, 그리고 성장 서사를 쌓아간다.
의도·방법 짚어내는 섬세한 심사
물론 ‘흑백요리사’만이 가진 ‘특별함’도 있다. 결과물 못지않게 요리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요리사들이 얼마나 요리에 진심인지, ‘주방’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의 요리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이해하며 이입하게 된다.
출연자들은 경쟁자지만, 서로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1라운드에서 ‘흑수저’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장면을 위에서 지켜보는 ‘백수저’ 요리사들은 그들이 주방을 얼마나 깔끔하게 유지하며 요리하는지, 칼질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저렇게 균일하게 재료를 썰 수 있는지 등 시청자가 미처 보지 못한 면에 주목한다. 그리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적용된 요리에 순수하게 감탄한다.
‘흑수저’ 요리사들도 마찬가지다. ‘백수저’ 요리사를 이겨야 하는 입장이지만, 제자 혹은 팬으로서 그들을 존중한다. 심사를 맡은 백종원과 안성재도 비록 이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졌지만 참가자들이 요리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그들이 요리에 담은 의도와 그걸 구현하는 방법을 향해 섬세한 호기심을 보인다.
과거 서바이벌 예능에서는 심사위원과 평가를 받아야 하는 참가자 사이의 위계가 뚜렷하게 구분 지어졌다면, ‘흑백요리사’를 비롯한 최근 서바이벌 예능들은 그보다는 수평적 관계 안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멘토’ 역할을 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미션이 거듭될수록 재미가 반감되는 기존 서바이벌 예능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단지 ‘요리’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팀 대항전을 통한 팀워크 역량과 식당 운영 능력, ‘인생 요리’ 미션을 통한 스토리텔링 능력 등 요리사에 관한 종합적인 평가를 하게 한 면도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흑백요리사’만의 ‘킥’도 있다. 2라운드에서 심사위원들이 천으로 눈을 가리고 참가자들의 요리를 먹고 평가한 것. 어떤 참가자가 어떤 요리를 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오직 향과 맛, 식감으로만 평가한 이 설정은 보는 이에 따라 ‘선정적’으로 느낄 정도로 자극적 매력을 어필한다. 이 설정은 누군가는 반드시 낙오해야 하는 경쟁 프로그램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공정성’ 논란을 피하고자 한 슬기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안전하게 포착하는 계급·젠더 차별
‘흑백요리사’가 아무리 요리라는 화려한 비주얼과 동종업계 종사자를 향한 최선의 존중, 진화된 공정함이라는 외피를 써도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부제인 ‘요리 계급 전쟁’에 잘 드러난다. 요리, 계급, 전쟁이라는 세 키워드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자, 현재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우선 ‘흑백요리사’는 ‘계급’을 전면에 내세운다. 흑색과 백색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흑수저’는 ‘흙수저’와 발음이 같다. ‘흙수저’는 부잣집 출신을 뜻하는 영어 숙어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에서 착안된 단어로 계급화된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 단어가 됐다. ‘흑백요리사’에서도 ‘백수저’ 아래 계급의 의미로 ‘흑수저’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의미뿐 아니라 실제 배치도 그렇다. ‘백수저’ 요리사들이 상위층에서 ‘흑수저’ 요리사들의 대결을 관람하듯 지켜보는 초반의 구도는 ‘요리, 계급, 전쟁’이라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과 한국 사회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명칭과 구도가 수직적 계급을 상징한다면, 고급 레스토랑을 의미하는 ‘파인다이닝’의 세계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식당 세계가 구분된 면은 문화적 격차를 체감하는 요소가 된다. 대중의 입맛을 잘 아는 백종원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오너 셰프인 안성재를 심사위원으로 세운 것도, 그들의 의견이 자주 대립하는 것도 이 두 세계의 간극을 보여준다. 결국 진정한 흑백의 세계는 요리사들의 인지도로 갈리는 게 아니라 이 계급/문화 자본의 격차로 나뉘는 게 아닐까?
요식업계의 남성 중심 여성차별적 구조가 ‘흑백요리사’에서도 구현된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2020년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미쉐린 가이드’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여성 헤드셰프의 비율은 5%에서 많게는 10%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흑백요리사’는 어떨까? ‘백수저’ 요리사 중 여성은 20명 중 4명, 1라운드를 통과한 20명의 ‘흑수저’ 요리사 중 여성은 5명이었다. ‘미쉐린 가이드’에서 진단한 것보다는 높은(!) 비율이지만 여성 비율은 여전히 낮다. 일상에서 ‘주방’은 주로 여성의 공간으로 취급되지만, 요리사는 남성 중심 직종으로 분류되는 현실이 ‘흑백요리사’에도 구현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안에서의 존재감이다. ‘흑수저’ 요리사 ‘천만백반’처럼 여성 요리사들은 30년 동안 백반집을 운영한 전문가여도 “아줌마”로 불리거나 “어머니, 이 굴은 어디서 온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아무리 한식대첩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백수저’ 요리사여도 남성 요리사는 너무 익숙하게 그를 “어머님”으로 호명한다. ‘흑백요리사’는 이 대목을 놓치지 않고 전달함으로써 이런 차별적 구도를 보여준다. 단지 호칭뿐일까? 4라운드 ‘레스토랑’ 팀 대항전에서 팀원 중 한 사람을 방출해야 할 때 ‘요리하는 돌아이’는 ‘이모카세 1호’를 방출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며 그가 담당한 김은 자신이 구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여성 요리사의 고유한 기술을 얕잡아 본 것이다.(그러나 그 김은 매출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세미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한 유일한 중식 요리사인 정지선도 여성이라 소외되거나 무시당해온 현실을 토로한 바 있다. ‘흑백요리사’는 계급적으로도 젠더적으로도 불평등한 현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런 게 단지 ‘흑백요리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안대를 풀고 봐야 하는 세계
‘흑백요리사’는 서바이벌 예능의 공식에 충실하되 몇 가지 변주를 통해 인기를 모았지만, 결국 ‘넷플릭스’ 세계관 안에서 제작된 콘텐츠라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최근 방영된 서바이벌 예능 ‘인플루언서’에 이르기까지 넷플릭스가 보여준 한국 사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계급화되고 경쟁적이며, 불평등하고 불안정하다는 것. 넷플릭스는 이런 면을 자극적으로 구현한다. ‘흑백요리사’ 또한 그 특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요리로 치면 매우 자극적인 맛이지만 먹을 만하고, 시청자가 눈을 가리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그 요리를 친절하게 떠먹여주기까지 한다. 맛은 나쁘지 않으나 눈을 가린 우리는 그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구현하고자 했는지 제대로 보기 어렵다. 안대를 풀고 봐야 하는 그 세계를 말이다. 재료도 신선하고, 맛도 타이트하게 구현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너무 자극적이고 끝에 묘한 찜찜함이 남아 ‘흑백요리사’는 보류입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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