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인데 원본 영화가 사라져 본사람이 거의 없다는 전설의 한국영화

2011년, 미국 시애틀의 스산한 안개 속에서 펼쳐진 배우 현빈과 탕웨이의 쓸쓸하고 애틋한 로맨스 '만추'(김태용 감독)는 수많은 관객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수형 생활 중 단 72시간의 특별 휴가를 나온 여자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남자의 시한부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사실 1966년 한국 영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만희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만추'는 리메이크작들뿐이다.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원작 '만추'는 필름 실물이 단 한 프레임도 남아있지 않은 '전설 속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숱한 리메이크를 낳으며 한국 멜로 영화의 금탑으로 평가받지만, 현재 시청 가능한 것은 빛바랜 스틸 사진과 시나리오집뿐이다. 한국 영화 계보를 바꾼 명작의 탄생부터 안타까운 유실 경위, 그리고 북한 소장설에 이르는 비화를 다각도로 정리했다.

'만추'의 출발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의 옥살이가 있었다. 1965년 이만희 감독은 영화 '칠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에 휘말려 구치소 수감 생활을 겪었다.

출소 후 차기작 '시장'(1965)을 촬영하던 이 감독은 현장에서 뜻밖에 구치소 동기를 만났다. 탈옥인 줄 알고 놀란 그에게 동기는 모범수에게 주어지는 '특별 휴가(귀휴)'로 잠시 나온 것이라 설명했다. 며칠 뒤면 다시 창살 안으로 돌아가야 하는 죄수의 애틋한 처지에서 영감을 얻은 이 감독은 곧바로 '휴가 나온 여죄수와 쫓기는 남자의 3일간의 사랑'을 다룬 '만추'를 기획했다.

1966년 12월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만추'는 당대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신성일과 문정숙이 주연을 맡아 열연한 이 작품은 60년대 한국 영화의 고질적 특성이던 과도한 대사와 신파조 서사에서 벗어나, 안개와 황량한 풍경, 인물의 표정과 음영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독보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다.

'만추'는 1967년 제3회 백상예술대상 대상·시나리오상·기술상, 제10회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 제5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등을 싹쓸이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았다.

이처럼 찬사를 받은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만추'의 필름은 국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는 필름 보존 및 아카이빙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영화관 상영이 끝난 필름 프린트는 방치되거나 재활용 타이어 공장 등으로 넘어가 은을 추출하는 용도로 폐기되기 일쑤였다.

'만추'의 원본(네거티브) 필름 유실 과정에는 여러 증언이 존재한다. 배우 신성일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영화를 해외에 수출할 때 현상소 기술 부족 등의 이유로 홍콩 등 해외로 네거티브 필름 자체를 보내 현지에서 프린트를 뽑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 과정에서 원본 필름이 유실됐음을 밝힌 바 있다.

해외 영화제 출품용 프린트 역시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스페인 등 해외 영화제에 보내졌던 상영용 프린트가 현지 세관 통관 수수료 및 보관료 미납 등의 문제로 끝내 찾아오지 못하고 폐기 소각되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뒤따랐다. 결국 국내 상영본과 해외 출품본 모두가 소실되면서 '만추'는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 영화가 되었다.

유실된 '만추'를 되찾을 수 있다는 유일한 단서는 뜻밖에도 북한에서 나왔다.

1978년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 부부는 생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필름 수장고(평양 시네마테크)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지독한 영화 마니아였던 김정일은 전 세계 수십만 편의 영화 필름을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 영화 '만추'의 프린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를 직접 관람했다는 내용이었다.

'만추'의 기획자인 호현찬 전 영상자료원장과 주연 배우 신성일 역시 생전 여러 인터뷰를 통해 "신상옥·최은희 부부에게 김정일의 '만추' 소장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남북 문화 교류가 활성화될 때마다 영화계에서는 "평양 아카이브를 수색해 '만추' 필름을 복사·디지털화해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원작 필름은 사라졌지만, '만추'가 남긴 유산은 수많은 리메이크 작품을 통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재탄생했다.

1972년 일본 영화 '약속' (사이토 코이치 감독): 일본에서 정식 리메이크되어 유랑 극단원과 죄수의 사랑 이야기로 재해석되었다.

1975년 영화 '육체의 약속' (김기영 감독): 이정길, 김지 주연으로, 김기영 감독 특유의 기묘하고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이 가미되었다.

1981년 영화 '만추' (김수용 감독): 김혜자, 정동환 주연의 작품으로, 김혜자는 이 작품을 통해 마닐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1년 영화 '만추' (김태용 감독):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을 맡아 국경을 넘어선 감성 멜로로 재탄생하며 세대를 넘어 큰 사랑을 받았다.

스틸 사진 200여 장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복원 사진집 '사라진 영화, 만추'가 출간되는 등, 1966년 원작을 스크린으로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영화계와 팬들의 열망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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