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잉글랜드 최북단 도시에 있는 바버 공장 | 130년 전 어부 작업복에서 팝스타도 입는 바버 ‘왁스 재킷’까지
9월 11일(현지시각) 찾은 잉글랜드 최북단 산업 도시 뉴캐슬어폰타인 인근 작은 바닷가 마을 사우스실즈. 영국 프리미엄 브랜드 바버(Barbour)는 지난 130년 동안 이곳에서 ‘왁스 재킷’을 만들어 왔다. 왁스 바른 천으로 만든 왁스 재킷은 방수(防水) 기능이 뛰어나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곤 연중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에서 가장 실용적인 옷으로 꼽힌다.
그런데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건조한 우리나라에서도 이 왁스 재킷의 판매가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왁스 재킷의 대표 브랜드 바버는 국내 패션 업체 LF가 지난 2021년 하반기부터 공식 유통을 맡은 이후, 매년 매출이 50%씩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바버 상위 매출 5위 국가다. 많은 소비자가 바버의 왁스 재킷을 찾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공장을 찾았다.
영국 왕실이 주는 품질 보증서 ‘로열 워런트’가 붙은 공장 내부로 들어가 보니 30여 명의 직원이 원단을 자르고 재봉틀로 원단을 이어 붙여 재킷을 완성하고 있었다. 기계와 로봇이 설치돼 인력이라곤 관리자 몇 명뿐인 현대적인 공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왁스 원단이 한 벌의 재킷으로 완성되기까지는 20개가 넘는 공정을 거친다.
“왁스 천은 기계 작업 어려워… 전부 수작업”
먼저 두꺼운 왁스 원단을 스케치 선에 맞춰 자르는 것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바버는 스코틀랜드 핼리 스티븐슨(Halley Ste-vensons)과 잉글랜드 맨체스터 인근 브리티시 밀러레인(British Millerain)에서 왁스 원단을 공급받는다. 두 회사 모두 1800년대 부터 품질 좋은 왁스 면을 생산하는 곳이다. 레인코트처럼 표면이 매끈한 인공 직물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천에 물이 스미는 것을 막지만, 왁스 원단은 천연 방식으로 옷에 방수 기능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장 매니저는 “왁스가 칠해진 원단은 일반 원단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기 때문에 기계에 넣으면 기계가 금방 망가진다”며 “왁스 재킷은 작업자가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는 옷”이라고 말했다.
숙련도 높은 작업자는 겉감과 안감을 연결하고 소매, 지퍼, 깃, 주머니를 완성해 나갔다. 재킷 한 벌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이 공장에서는 하루 약 650벌의 왁스 재킷이 생산된다. 연간 생산량은 11만5000벌 규모다.
왁스 재킷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30년 전이다. 바버 창업자 존 바버가 면에 기름 막을 입히면 물이 스미는 것을 방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사우스실즈에 왁스 칠한 옷을 판매하는 회사 ‘제이 바버 앤 선스(J.Barbour&sons)’를 설립했다. 바버가 만든 옷은 곧바로 입소문이 났다. 종일 배 위에서 일해도 젖지 않고,거친 바닷바람도 막아주는 왁스 재킷은 어부에게 가장 실용적인 작업복이었다. 하지만 바버는 ‘노동자의 실용적인 옷’이라는 명성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늘날 바버는 도시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즐겨 입는 옷인 동시에 팝스타나 할리우드 영화배우가 선택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영국 왕실도 바버의 단골 소비자다. 바버는 영국 왕실에 5년 이상 물건을 납품한 업체에 주는 로열 워런트도 받았다. 바버는 찰스 3세 국왕(1987년)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82년), 에든버러공(1974년)에게 각각 로열 워런트를 받았다. 130년 전 잉글랜드 바닷가 노동자가 입던 옷으로 시작한 바버의 소비층이 중산층을 넘어 왕실과 유명 배우, 가수로 크게 넓어진 셈이다.
보통의 프리미엄 브랜드는 고소득층을 타깃 소비자로 삼아, 기능성보다 고급스러운 원단과 디자인을 강조한 고급 제품을 내놓는다. 이런 제품이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변하게 되면 대중이 기꺼이 큰돈을 지불하면서 해당 브랜드는 대중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노동자를 위해 고안된 기능성 재킷을 만들던 바버는 프리미엄 브랜드가 채택하는 일반적인 ‘톱다운’이 아닌 ‘보텀업’ 방식으로 성장한 이례적인 역사를 보여줬다.
바버는 가장 큰 무기인 실용성을 유지하면서 디자인에 작은 변화를 주는 식으로 시장을 확대했다. 충성도 높은 노동자를 주요 소비층으로 잡아두는 동시에 고급스러운 패션을 추구하는 중산층과 고소득층도 새로운 소비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진화의 단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스코틀랜드 민속품인 타탄을 재킷 안감으로 사용해 재킷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한 것이다. 게리 제인스(Gary Janes) 수석 디자인·개발 매니저는 “노동자의 간식이나 장갑, 작업 도구를 넣는 바버 재킷의 커다란 주머니는 팝스타의 스마트폰이나 왕실 가족의 사냥용 총알도 넉넉히 수납한다”라며 “바버 재킷의 디자인은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진화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뤄졌다. 많은 의류 브랜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소비자 입맛에 맞추기 위해 디자인에 급진적인 변화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버는 오랫동안 브랜드가 유지한 고유한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는 방식을 채택했다.
“리왁싱하고 수선해 평생 입는 옷”
바버 남성복 분야를 총괄하는 이언 버긴(Ian Bergin) 이사는 “바버의 상징성을 유지하면서 디자인의 진보를 이루는 방법은 진정성을 갖고 부드럽게(gently) 발전시키는 것” 이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놀라지 않게 변화를 ‘부드럽게’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00년 전 판매된 왁스 재킷은 지금 매장에 진열된 재킷과 차이가 크지 않다. 덕분에 로고가 진하게 표시되지 않아도 누가 바버 제품을 입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도로를 달리는 랜드로버 ‘디펜더’는 차 뒷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버긴 이사는 “점진적이고 완만한 변화를 주면서도 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은 좁은 기반에서도 제품을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가문이 사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버는 5대째 이어지고 있는 가족 기업으로, 댐 마거릿 바버 회장과 그의 딸 헬렌 바버 부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소비자가 바버의 왁스 재킷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성비 때문이다. 바버 제품은 디자인이 크게 바뀌지 않는 데다, 내구성이 좋아 소비자는 왁스 재킷 구매를 일종의 투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왁스 재킷은 정기적으로 왁스 칠(리왁싱)을 해 관리하면 평생 입을 수 있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옷으로도 유명하다. 바버 공장에서 중요한 공간 중 하나가 소비자가 보내온 재킷을 수선하는 곳이다.
사우스실즈 공장에는 매년 2만8000여 벌의 낡은 재킷을 손질하는 수선실이 있다. 10여 명의 작업자가 일하고 있는 수선실에는 방수 기능을 높이기 위해 왁스 칠을 요구하거나 해진 소매를 수선해 달라는 요구가 담긴 주문서가 부착된 낡은 재킷이 수백 벌 걸려 있었다. 새 재킷을 만드는 공정 한 곳의 평균 작업 시간이 3분이라면, 수선실 공정은 15분 정도다.
새로 판매할 재킷을 만드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기존 고객이 구매한 제품을 수선해 준다는 의미다. 바버 측은 수선 프로그램이 오히려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고 판단하고 있다. 버긴 이사는 “덜 자주 구매하되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왁스 재킷을 두 벌 사는 대신 재킷과 함께 입을 수 있는 니트나 부츠를 구매한다”며 “오래 사랑받는 브랜드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룬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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