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서 다시 맞붙은 한화와 현대... '팀 코리아' 갈 길 먼 K방산[문지방]
KDDX 경쟁 중인 HD현중·한화오션 재격돌
수출 능력 입증하려 국내 사업 경쟁 과열
참가 30개국 중 한국 기업만 무기체계 겹쳐
"단합된 '팀 코리아' 미래 위해 머리 맞댈 때"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
올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파리 올림픽에서 우리 대표팀은 예상 외로 선전했습니다. 32개의 메달을 따내며 메달 개수로 1988년 서울 올림픽(33개) 이후 역대 2위 기록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동률을 이뤘죠. 특히 양궁에서 우리 선수들은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늘 우리 선수들끼리 맞대결을 펼치는 경기를 마주하면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25~2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안방산안보전시회(ADAS) 2024'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국내 대표 방산기업들이 외국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무기 전시회에서 서로 겹치는 아이템으로 세일즈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입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이스라엘 체코 튀르키예 인도 등 전 세계 30개국 200여 개 기업이 참여했는데, 한 국가에서 두 개 이상의 기업이 같은 무기체계를 들고 나온 곳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스포츠계에 양궁이 있다면, 방산업계에는 조선이 있습니다. K조선의 양대 산맥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각자의 수상함과 잠수함 모형을 전시하며 필리핀 해군력 증강 사업의 최대 경쟁자로 맞서고 있습니다.
물론 서로 힘을 준 부분은 달랐습니다. HD현중은 수상함에, 한화오션은 잠수함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미 필리핀과 2016년 2,600톤급 호위함 2척(3,700억 원), 2021년 3,200톤급 초계함 2척(5,830억 원), 이듬해 2,400톤급 원해경비함(OPV) 6척(7,449억 원) 등 10척의 수상함 건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조기 인도된 첫 호위함 '호세리잘함'이 2020년 하와이에서 열린 림팩(RIMPAC) 훈련에 참여해 성능을 인정받으면서 후속 계약을 이뤄낸 것입니다. 여기에 HD현중에서 처음으로 필리핀과 수출한 함정에 대한 수명주기지원(MRO) 사업을 계약했고, 함정 수출에서는 최초로 현재 진행 중인 필리핀 함정 건조에 자국 근로자를 참여시키면서 상호 신뢰를 두텁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초계함 후속 사업 수주 및 잠수함 사업까지도 따내겠다는 계획입니다.
한편 필리핀에 수출 실적이 없는 한화오션은 자신들의 주특기인 잠수함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필리핀은 중국과 남중국해를 두고 해양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는데, 잠수함은 양국의 대표적인 비대칭 전력입니다. 필리핀은 아직 잠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해군 고위 관계자들은 한화오션의 잠수함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화오션은 한국 해군 최신 잠수함인 장보고-III 배치-II를 필리핀 작전 운용에 맞게 개량한 2,800톤급과 1,400톤급 잠수함을 주력으로 홍보했습니다. 많은 섬과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필리핀 근해에서 잠수함을 운용하려면 강력한 잠항 능력에 더해 기동성과 높은 성능을 요구합니다. 한화오션은 국산화율 80% 이상인 자체 설계역량과 함께 승조원 교육, 핵심 기지 설비, 종합군수지원까지 부대 창설과 유지 운용을 위한 패키지를 제공하는 유일한 업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4,300톤급 호위함을 함께 전시해 수상함 시장 진출을 위한 포석도 깔아놓았죠.
어찌 보면 서로 선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정해진 분야에만 만족하긴 힘든 노릇입니다. 국내에서 불거진 한국형 차기 구축함 KDDX 사업을 두고 두 회사가 으르렁대는 것도, 향후 수출 시장에서 '설계 역량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산업계에서의 경쟁은, 올림픽과 달리 2등을 하더라도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없습니다. 국내 사업을 수주하지 못하면 해외 시장에 경쟁력을 증명하기 힘들고, 이는 곧 해당 사업의 급격한 위축으로 이어집니다. 최악의 경우 애써 투자해 만든 조직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라는 고민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정부도 똑같은 처지죠. 군함과 잠수함은 일반적인 컨테이너선 등 상선과 달리 국가 대 국가의 계약 성격이 짙습니다. 대통령실, 국방부, 외교부, 방위사업청은 물론 수입국의 자금 융통을 위해 금융당국까지 관련 조직들이 힘을 모아 결실을 이뤄냅니다. 최근 몇 년간 폴란드와 중동에서 방산 수출 잭팟을 터뜨렸을 때, 특정 기업의 '대박'이 아닌 'K방산의 쾌거'로 기록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두 회사가 동시에 수출 경쟁을 벌인다면, 정부로선 어느 한쪽을 밀어주기 난감할 테죠.
따라서 방산 전문가들 사이에선 현재의 국내 기업 간 경쟁 체제가 시장 논리에는 부합하지만, 단합된 '팀 코리아'를 구성하기엔 부적절하다는 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옛날처럼 국가가 특정 기업에 특정 사업을 할당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2008년 방산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방위산업의 전문화 및 계열화' 법 규정을 없앤 지 16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부작용의 신호는 명백합니다. 이제는 다시 머리를 맞댈 때입니다. 언제까지 패하면 망하는, 그래서 부득부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겨야만 하는 'K방산의 민낯'을 가릴 수만은 없을 테니까요.
국방부 공동취재단
마닐라=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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