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자주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한 'K9 자주포' 운용국들의 연례 모임인 'K9 유저클럽'이 지난 4월 8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행사는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됐지만, 주요 운용국인 튀르키예와 인도의 불참과 함께 미국과 스웨덴의 깜짝 참관이 화제를 모았는데요,
이 모임의 이면에는 어떤 지정학적 계산과 군사적 야심이 숨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주포 외교의 맹주로 부상한 한국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지난 4월 8일 폴란드에서 개최한 K9 유저클럽에는 폴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호주, 루마니아, 한국 등 운용국 7개국과 미국, 스웨덴 등 참관국 2개국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K9 자주포의 운용·정비 현황과 차세대 개발 계획을 논의하며 전략적 협력을 다졌죠.

참가국들은 K9 탄약의 호환성 확대 방안을 검토하고, 폴란드 국영 방산기업 HSW의 크라프 자주포 생산시설과 K9 운용 야전부대를 시찰했습니다.
특히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최근 4천억원 규모의 부품 공급 계약을 폴란드와 체결한 바 있어, 이번 행사는 양국 방산 협력의 상징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빈자리가 말해주는 지정학적 계산
눈에 띄는 것은 운용국인 튀르키예와 인도의 불참이었습니다.
이 두 국가의 빈자리는 단순한 일정 충돌이 아닌 복잡한 국제 정세와 각국의 전략적 계산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튀르키예는 K9 자주포를 '피르티나(Fırtına)'라는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복잡한 지정학적 계산 속에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힌트는 방위산업 전문 매체인 ArmyTechnology가 보도한 기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에르도안 정부는 나토(NATO)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이중적 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흑해 지역에서는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판단 아래,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전면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죠.
또한 튀르키예는 최근 수년간 나토 동맹국들과 미묘한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지연시키며 외교적 레버리지를 활용습니다.
튀르키예는 이들 국가가 쿠르드 분리주의 단체인 PKK를 지원한다고 비난하며, 가입 승인의 대가로 여러 양보를 얻어냈죠.
더불어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때문에 폴란드에서 열린 이번 행사 참석은 자칫 그들의 '중간자' 입장을 훼손할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튀르키예는 '터키화(Turkification)' 정책에 따라 K9 자주포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어, 한국과의 기술 협력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점도 불참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인도 역시 자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국가입니다.
'바즈라(Vajra)'라는 이름으로 현지 생산되는 K9 자주포를 운용 중이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냉전 시대부터 비동맹 외교 노선을 유지해왔으며, 어느 한 진영에 완전히 속하는 것을 경계해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인도는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며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 구매하며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폴란드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인도의 외교적 균형을 해칠 수 있는 위험 요소였을 것입니다.
결국 튀르키예와 인도의 불참은 단순한 불참이 아닌,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세심하게 계산된 외교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기 체계가 단순한 군사적 도구를 넘어 국제 관계의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왜 미국과 스웨덴은 참관했나?
반면 K9 자주포를 운용하지 않는 미국과 스웨덴이 참관국으로 참여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이 두 국가의 참관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치밀한 군사적·전략적 계산에 기반한 결정이었습니다.
방산 강국인 미국이 한국산 자주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중대한 변화의 신호탄입니다.
세계 최고의 군사 강국으로서 자국의 방산 기술과 장비에 자부심이 강한 미국이 다른 나라의 무기 체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오랫동안 M109 팔라딘 자주포 시스템을 운용해왔습니다.
현재 운용 중인 M109A7은 1960년대 초기 모델의 지속적인 개량형으로, 수십 년간 미 육군의 주력 화포로 활약해 왔죠.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방산 전략가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대전에서 자주포의 결정적 역할을 목격한 미국은 기존 시스템의 한계점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미국이 자주포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 육군은 Extended Range Cannon Artillery(ERCA) 프로그램을 통해 사거리를 70km 이상으로 늘린 차세대 자주포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K9의 개발 방향과 기술적 해결책은 미국의 방산 전략가들에게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은 NATO 동맹국들의 무기체계 표준화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폴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 여러 NATO 회원국이 K9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는 연합 작전 시 상호운용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동맹국들의 무기체계 선택 추세를 면밀히 관찰하고, 필요시 자국의 방산 정책을 조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스웨덴 역시 자국의 Archer 155mm 자주포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K9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Archer는 바퀴형 자주포로, 궤도형인 K9과는 운용 개념과 성능 특성이 다릅니다.
하지만 스웨덴은 최근 NATO에 가입하면서 동맹국들과의 무기체계 상호운용성 확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이웃 국가인 핀란드와 노르웨이 및 에스토니아가 K9을 운용하는 상황에서, 북유럽 방위 협력 차원에서 K9의 기술적 특성을 연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는 북유럽 안보 환경에서, 스웨덴은 다양한 화력 플랫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K9 유저클럽 참관을 통해 궤도형 자주포의 장점과 운용 경험을 파악하려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참관은 K9 자주포의 국제적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방산 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이 한국의 무기체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한국 방산의 글로벌 경쟁력이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단순한 무기 수출을 넘어 한국이 글로벌 방산 생태계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K9의 진화
이번 행사에서 한국 방위사업청은 향후 10년 동안의 차세대 K9A2 및 K9A3 개발 로드맵을 공개했습니다.
K9A2는 완전 자동화된 포탑을 통합해 승무원을 5명에서 3명으로 줄이고, 자동화와 생존성을 크게 향상시킬 예정입니다.

더 혁신적인 K9A3는 58구경 포신을 통합해 사거리를 대폭 늘리고,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자율 주행 및 사격 능력을 갖출 계획입니다.
이는 미래 전장에서 소수 인원으로 넓은 지역을 제압할 수 있는 게임체인저가 될 전망입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적극적인 고객 지원 전략도 눈길을 끕니다.
유럽에 K9 예비 부품 센터를 설립하는 계획과 함께, 사물인터넷 기반 유지보수 시스템 '톰스'(TOMMS)를 도입해 무기체계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예방 정비를 가능하게 할 계획입니다.
총포성 울리는 유럽, K9의 미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안보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냉전 이후 등한시되던 화포의 중요성이 재부각되면서, K9 자주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마이클 쿨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글로벌 방산 총괄 대표이사는 "K9 유저클럽의 폴란드 개최는 양국 간 전략적 파트너십과 안보 협력 강화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K9 유저클럽을 통해 K9 자주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추가 수출 기회를 식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K9은 이미 세계 자주포 시장 점유율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약 1,800대가 운용 중입니다.
튀르키예와 인도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K9 유저클럽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참관은 한국 방산이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방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유럽의 재무장 흐름 속에서, K9 자주포는 단순한 무기를 넘어 한국의 새로운 외교 수단이자 기술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