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4) 광복군과 전라도 출신들- 거센 황토 바람 맞으며 항일무장투쟁 총을 들다
중국 서쪽 고도 서안·연안 곳곳에 흔적
나주 7명, 무안·완도 5명 등 본적 분류
일본군 탈출 25명…학도병 출신도 7명
나월환 나동규 안봉순 등 전지공작대 출신
김승곤·김용재·송식 조선의용대 활동
박성화·임소녀는 ‘부부 광복군’ 헌신
학계 발굴 미서훈자 다수…"지속 노력해야"

중국 상해에서 최고 시속 350km의 고속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7시간여 달리면 서안에 도착한다. 서안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수도 중의 하나로 옛 이름은 장안.서안은 7세기 100만 인구의 대도시로 외국인이 5만 명이나 거주할 정도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우리에게는 한국광복군(광복군)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이 서안에서 탄생했고 광복군총사령부, 광복군 제2지대 본부, 광복군의 전신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 등이 위치해 있다. 광복군 제2지대의 훈련장도 찾아 볼 수 있다. 광복군이 국내 진입을 위해 광복군-미 전략사무국(OSS) 합동 독수리작전 훈련을 받았던 미타고사도 자리한다.

◇광복군 규모 500여명…실제 더 많을 듯
광주·전남출신 독립지사들의 활동은 상해 임시정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총칼을 들고 항일 무장 투쟁에 최일선에 나섰다. 한국광복군(광복군)이 대표적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5일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임시정부 산하에 군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은 1919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내에서의 노선갈등,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여기에 일본의 중국 점령 지역이 확대되면서 본거지를 여러 곳으로 옮기게 됐고, 광복군 창설도 어려워졌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서둘렀다. 창설 당시 광복군은 총사령부만 구성했다. 임정이 중경에 정착했을 때 그곳에는 한인들이 거의 없었기에 30여명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상층조직인 총사령부만을 구성했다. 총사령부 산하에는 1, 2, 3지대가 편성됐지만 3지대의 경우 문서상으로만 존재했다. 광복군이 1941년 1월 시안 을 중심으로 공작 활동을 펴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제 5지대로 편입되면서 실질적으로 광복군은 1, 2, 5지대로 편성된다.
광복군에 참여한 전체적인 인원 규모나 대원들의 명단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45년 4월 임정군무부장의 보고를 토대로 규모를 파악할 뿐이다. 국회도서관에 비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문서에는 당시 임정군무부장은 광복군 인원과 관련 '총사령부와 3개 지대의 장교·대원·사병 등 514명'이라고 보고한 게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광복군 숫자를 밝혀주는 유일한 공식적 자료다.
이 가운데 중국군 장교가 65명으로, 한국군 광복군은 449명이다. 하지만 1945년 4월 이후에도 광복군의 인적 충원이 계속된 점을 고려하면 광복군 활동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시준 전 독립기념관장은 해방 직전 광복군 숫자는 7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한국군 광복군은 2025년 8월 31일 기준 1945년 4월의 449명에 비해 130명 증가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광복군' 경력의 독립유공자는 모두 579명(2025년 9월 1일 기준)으로 나타나 있다. 보훈부와 지자체 등이 독립유공자 발굴작업을 지속하면서 광복군이 늘어난 것이다.

◇학도병·무장항일단체 등 경력 다양
조선의 청년들은 왜 머나먼 중국 서쪽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을까? 그리고 광주·전남의 청년들은 어떻게 그곳까지 갔을까.
광주·전남 41명의 광복군을 출신지별로 보면 나주가 7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무안·완도 각 5명, 광주·순천(승주 포함)·화순 각 3명, 담양·장흥·강진·해남·보성 각 2명, 구례·영암·고흥·곡성·영광 각 1명씩이다.
광복군 참여 동기는 일본군에 징집당한 뒤 탈출 사례가 25명으로 가장 많다. 김광수(무안), 김배길(무안), 김영남(완도), 김용관(장흥), 김은섭(강진), 김충홍(완도), 김화남(해남), 문채호(구례), 박남현(광주), 박병두(완도), 박재봉(영암), 박종선(완도), 서상렬(무안), 성동준(순천), 양회상(완도), 유한휘(고흥), 이사섭(광주), 이준수(나주), 임기열(해남), 장기문(곡성), 장희수(화순), 정건수(보성), 최용선(영광), 최종오(장흥), 황희선(무안) 등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이 됐으나 목숨을 걸고 탈출해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광복군을 찾아와 입대한 것이다.
김영남과 김화남, 박병두, 박종선, 서상렬, 성동준, 이준수 등 7명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문채호, 양회상, 유한휘, 장기문, 장희수, 정건수, 최용선은 1943년 10월 강제징집돼 중국 산서성 일본군 3541부대에 있다가 1944년 11월 탈출, 광복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모두 1924·1925년생으로 일본군에 끌려갈 당시 20세도 되지 않았다.
특히 박성화·임소녀는 부부가 광복군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주 출신으로 박성화는 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해 1945년 한·미 연합의 '독수리작전(Project Eagle)' 훈련에 참가하여 유격·폭파훈련과 암호통신 교육을 받기도 했다. 임소녀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했다.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 합류한 인사들도 다수다.

◇지역 학계 발굴 10여명 미서훈 상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결성된 중국내 최초의 한민족 항일 무장부대다. 전지공작대처럼 항일무장투쟁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1942년 4월 20일 광복군으로 편입된다. 김승곤과 김용재와 송식은 조선의용대 출신이다.
이같은 광주·전남출신 광복군은 보훈부 공훈록에 기록된 가장 최소한의 숫자다. 대다수가 일본군에 강제징집돼 탈출한 점을 보면 지역 출신 광복군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항복 직적인 1944-1945년 사이 동남아 식민지 등에서 물자조달이 어려워지자 대규모 한반도 인적, 물적 자원수탈을 극도로 자행했다. 대표적인 인적자원의 수탈은 위안부, 노동자, 학병 등이었다. 한인 학병의 경우 6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징용이 됐고, 2천명 이상이 중국에 배치됐다. 학병출신 광복군이 급증한 시기도 이때다.
지역 학자들도 보훈부 공훈록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출신 광복군들을 추가로 발굴·발표했다.
윤선자 교수(전남대)는 '광복군에 입대한 광주·전남인' 논문에서 지역출신 광복군을 42명으로 발표했으나 여기에 포함된 김운정, 김장균, 사중득은 보훈부 독립유공자에는 누락된 상태다. 김재기 교수(전남대)가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사 자료, 동아일보 1945년 12월 6일, 7일, 12일자 신문 등을 토대로 찾아낸 김영선, 손경생, 이상만, 오경호, 이장우, 신완식, 강석인, 신성태, 고태훈, 허시, 강재두(이상 11명) 등도 미서훈 상태다.
김재기 교수는 "지역출신 광복군 독립유공자들의 현황은 오늘이 가장 적은 숫자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무장항일투쟁을 한 독립지사들이 기록 부족이나 후손을 찾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부와 지자체 등이 기록이나 후손 찾기에 적극 나서 숭고한 뜻을 선양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김성빈 기자 ksb@namdonews.com 자문/김재기(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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