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구째가 157㎞
7회 초다. 투 아웃까지 잡았다. 스코어는 이미 넉넉하다. 5-0으로 꽤 벌어졌다. 홈 팀의 승리가 유력하다. (20일 대전, 한화 이글스 – NC 다이노스)
투 아웃에 주자도 없다. 카운트는 꽉 찼다. 3-2에서 100번째 투구다. 여전히 직구에 힘이 넘친다. 157㎞짜리가 존을 파고든다. 타자(김형준)의 배트가 간신히 커트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생명 연장의 꿈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 공이 끝이다. 좌익수 플라이로 이닝이 종료됐다. 승패의 확률은 조금 더 올라간다.
의기양양한 투수가 덕아웃을 향한다. 나인들이 나와 도열한다. 1루 쪽 관중들도 모두 일어서서 영접한다. 커다란 함성이 한화생명 볼파크를 뒤덮는다. “폰세, 폰세, 폰세….” 감격이 담긴 연호가 울려 퍼진다.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졌다. 무려 7연승이다. 모두 알차게 선발승으로만 채웠다. 문동주-폰세-와이스-류현진-엄상백. 그리고 다시 문동주-폰세의 로테이션으로 이어진 승리 공식이다.
종전 기록은 24년 전이다. 조규수-한용덕-이상목-조규수-송진우-한용덕-박정진이 만들어냈다(2001년).
올해도 “영 아니다” 싶었다. 개막 초반의 비틀거림 때문이다. 맥없이 무너질 때가 잦았다. 순위는 아래서부터 세는 게 빨랐다. 3주 차에는 최하위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다 보니 코칭스태프 인책론까지 돌았다. 그런데 그게 바닥이었다. 강력한 반발력으로 치고 올라온다. 최근 11경기에서 10승 1패의 성적이다.
어느 틈에 2위까지 올라갔다. 이제 남은 팀은 하나다. 막강한 선두 트윈스를 정조준한다.
14이닝 25K에도 겸손함
상승세는 투수력 덕분이다. 선발진이 팀의 안정감을 찾아줬다. 특히 인상적인 1인이 있다. 바로 이날의 승리 투수 코디 폰세(30)다.
지난주에만 2차례 등판했다. 15일(화) SSG 랜더스, 20일(일) 다이노스 전에 나왔다. 여기서 엄청난 위력을 과시했다. 두 번 모두 7이닝 1안타 무실점이다.
최고 150㎞ 후반대의 파워가 압도적이다. 웬만한 스윙으로는 건드리지도 못한다. 여기에 현란한 변화구가 조합을 이룬다. 체인지업, 커브가 춤을 춘다. 각각 12K, 13K를 뽑아냈다. 일주일간 돌려세운 타자(탈삼진)가 25명이나 된다.
팬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겸손함도 갖췄다.
“(선발 7연승 기록에 대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기록이 걸려 있다고 해서 더 의식하지는 않았다. 내가 맡은 모든 게임에서 경쟁력 있는 투구를 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팀이 이기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폰세, 경기 후 인터뷰)
파트너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최근 잘 되고 있는 것은 포수들의 도움이 크다. 오늘도 최재훈과, 중간에 바뀐 이재원까지 좋은 리드로 이끌어줬다. 좋은 게임 플랜을 짜서,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볼배합에 대해 100%의 신뢰를 갖고 던진다.” (폰세, 경기 후 인터뷰)
피가 나는데도 “1이닝 더…”
또 있다. 보살 팬을 매료시키는 지점이다. 팀에 대한 ‘헌신’이다. 이른바 ‘워크 에식’이다.
이날도 초반부터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2회 무렵이다. 온라인 댓글창 이곳저곳서 걱정이 시작된다.
‘폰세 손가락에 얼핏 피가 비친다.’
‘손톱이 깨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수상쩍다. 유니폼 바지 앞섶에 심상치 않은 점들이 하나 둘 찍힌다. 핏자국이 의심된다. 이닝 중간의 덕아웃 광경도 단서가 된다. 의료 스태프가 폰세의 손을 살피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힌다.
‘공은 좋아 보이던데, 오래 버티기 힘들겠네.’ 그런 조마조마함이 가득하다.
피가 난다면 통증도 있을 것이다. 쓰리고, 아릴 것이다. 그런데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웃는다. 그리고 파이팅 넘친 투구를 계속한다.
5회를 넘겼다. 끝이 아니다. 6회, 7회까지도 버틴다. 투구수는 100개가 넘었다. 이젠 그만해도 된다. 일주일 치고는 근무량(14이닝)이 많다. 불펜으로 넘겨도 충분하다.
하지만 고집을 부린다. 김경문 감독과 양상문 코치를 향해 손가락 1개를 편다. ‘1이닝 더 던지겠다’는 의사 표시다. 통역을 통해 간신히 말렸다.
“힘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당연히 8회까지 가고 싶었다. 다음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 불펜을 조금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폰세, 경기 후 인터뷰)
“나는 후보 투수다”
SNS에 걸린 자기소개다. ‘프로 후보 선수, 한화 이글스의 투수 알바생, 스타워즈의 풀타임 러버(Professional bench sitter, part time pitcher for @hanwhaeagles_soori and full time Star Wars lover)’.
스스로를 ‘후보’로 분류한다. 심지어 ‘파트타임 투수’라고 칭한다. 높은 수준의 겸허함이다. 대단한 소박함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의는 다를 것이다. 이면에는 열정과 헌신이 느껴진다. 팀을 위해서는 후보도 마다하지 않고, 파트타임도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다. 뭐라도 되겠다, 뭐든지 하겠다는 적극성이기도 하다.
에피소드가 있다. 2023년 NPB 시절이다. 니폰햄 파이터즈에서 선발로 뛸 때다. 부상 복귀전인데, 홈구장(에스콘 필드)의 마운드가 불만스러웠다. 내딛는 부분이 불편했던 것이다.
심판에게 수정을 요구했다. 그라운드 관리인들이 출동한다. 그래도 작업이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자 고무래(땅 고르는 기구)를 뺏는다. 그러더니 자신이 직접 팔을 걷어붙인다.
덕아웃과 관중석이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선수가 직접, 그것도 외국인이 저러는 장면은 처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지하게 자기 일을 한다.
‘팀을 위해서,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서.’ 이미 낯선 일이 아니다. 이글스에 와서도 보여준 캐릭터다.
지난달 28일 타이거즈와 경기 때였다. 새 홈구장의 개막전 때다.
5회가 끝난 뒤에, 덕아웃 앞으로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벤치에서 쉬고 있던 류현진까지 동참해야 했다. “난 (타자) 너희들을 믿는다. 1점만 내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전부 막겠다.”
신입이, 그것도 남의 나라 출신이 눈에 불을 켠다. 토종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시들하던 팀이 깨어난다. 이후 거짓말처럼 타선이 살아났다. 역사적인 경기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게 ‘행복 야구’의 시작이다. 환한 표정의 폰세에서 보살 팬들의 희망이 보인다.
에필로그
손가락 상처에 대해서는 이글스TV를 통해 경과를 밝혔다. “경기 시작 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덕아웃에서 막 뛰어나갈 때 난 상처다. (던지는 데) 전혀 문제없다”라며 팬들을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