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탑니다”…日 바둑계 ‘오타니’ 이치리키 료 9단의 반상(盤上) 갈증
日 명문 와세다대에 특기생 아닌 성적 입학
‘학업과 승부’ 병행 어렵단 바둑계 불문율 깨
전무한 자국 내 세계 기전에 대한 아쉬움 토로
“폐쇄적인 자국 내 바둑 연구 방식 수정” 일침
“日 바둑계 새 역사 써 내려갈 것” 다짐

“목이 타네요. 목이…”
흐려진 말끝에선 갈증의 기미가 농후했다. 자신의 반상(盤上) 인생이 최전성기임에도 이면에 자리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진 못했다. 일본 바둑계 간판스타인 이치리키 료(28) 9단에게 자국 내 반상 동향을 묻자, 내비쳐친 뜻밖의 속내였다. “바둑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많이 올라온 것도 같은데, 아직은 모자란 모양입니다. 당장 저를 포함해서 다른 일본 프로 기사들의 분발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바둑계 안팎으로부터 제기된 일본 내 세계 메이저 기전 신설 여부 움직임과 관련된 자국 내 분위기를 설명하면서다.
지난달 21일 경기 광주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렸던 ‘제3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우승상금 3억 원) 출전차 방한한 그가 엿보인 자국 내 바둑계 기류였다. 한때 세계 반상의 중심에 섰지만 최근 20년 가까이 변방으로 내몰렸던 일본 사무라이 바둑의 화려한 귀환을 견인 중인 그의 형세판단이어서 이목은 더 쏠렸다. 지난 2011년 ‘제24회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이후 사라진 일본 주최의 세계 기전 창설에 대한 아쉬움으로 풀이됐다. 바둑계 내부에선 본선 16강 이상의 대진 구성과 우승상금이 약 2억 원대 대회부터 세계 메이저 기전으로 통용되고 있다. 현재 세계 바둑계에서 진행 중인 9개의 국제 기전 중에선 중국에서 6개를, 한국에서 3개를 주최하고 있다.
19년 만 일본에 ‘응씨배’ 우승 선물…와세다대 고교 성적으로 입학

올해 프로 입단 15년을 맞이한 이치리키 9단은 요즘 일본 바둑계의 아이콘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해 9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10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우승상금 40만 달러, 약 5억5,000만 원) 깜짝 우승으로 단숨에 일본 바둑을 세계 정상권으로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선 중국 바둑계 거물인 커제(28) 9단을 비롯해 초일류 프로 기사인 쉬자양(26) 9단과 셰커(28) 9단 등이 이치리키 9단 우승의 제물로 희생됐다. 이치리키 9단의 응씨배 타이틀 획득은 19년 만에 나온 일본 바둑의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 기록이다. 세계 대회 가운데선 최대 규모인 응씨배는 4년마다 개최, ‘바둑 올림픽’으로도 각인된 기전이다. 이치리키 9단은 현재 ‘응씨배’를 포함해 일본 내에선 기성과 명인, 천원, 본인방, 아함동산배 타이틀까지 보유한 자국 프로 바둑 랭킹 1위 기사다. 일본 내에서 10년 동안 바둑 황제로 군림해왔던 이야마 유타(36) 9단을 밀어내고 세대교체를 이뤄낸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일본 내 명문인 와세다대 사회학과를 특기자(바둑) 전형이 아닌 고교 성적 추천제로 입학, 졸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학업과 승부를 동시에 이어갈 순 없다’는 반상의 불문율도 깼다는 측면에서 그가 ‘바둑계 오타니’로 비유된 이유다.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서 투수와 타자를 겸업, 투타 모두 탁월한 성적을 내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이도류’ 오타니 쇼헤이(31)에 비견되면서다. 이 와중에도 이치리키 9단은 자국 내 지역 언론사 가문의 출신으로, 틈틈이 후계자 경영 수업까지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그의 우선순위는 바둑이라고 단언했다. “집안을 생각하면 가업도 중요하죠. 그래도 저는 베팅을 한다면 바둑에 먼저 하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바둑에 비중을 더 가져갔으니까요. 가업 문제는 훗날에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런 배경과 더불어 일본 바둑계에선 상징적인 인물로 올라섰지만 요즘 그의 심기는 편치 않은 듯했다. “현재 일본엔 세계 기전이 없어요. (제가 응씨배) 우승하고 나서 일본 사회에 나름대로 어필도 했는데, 그게 잘 안됐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쉽고 또 책임감도 느낍니다. 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예전과 달리, 업그레이드된 일본 바둑의 경쟁력을 안방에서 입증시킬 기회조차 없다는 데 따른 답답함으로 감지됐다.
폐쇄적인 일본 바둑계, 개인보단 공동 연구 형태로 전환 강조

그는 최근까지 나타났던 일본 바둑계 부진의 원인과 해법도 제시했다. “과거에 잘나갔던 일본 바둑이 한동안 침체됐던 가장 큰 원인은 연구 방식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선 여러 명이 함께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아왔는데 일본에선 공동 연구보단 각자 개인 위주로 연구가 이뤄지다 보니 중요한 효율성이 떨어졌어요. 지금은 나아졌지만 이 부분은 반드시 더 개선돼야 합니다.” 결국 폐쇄적인 반상 연구 형태가 일본 바둑계엔 치명적인 자충수로 돌아왔단 얘기였다. 이치리키 9단이 평소 한일 양국 간 바둑 친선 교류전 개최에 적극적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바둑 후학을 양성 중인 홍맑은샘(44) 4단의 애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선 아마 최강자로 활약했던 홍 4단은 2005년부터 도쿄에 바둑 도장을 개설하고 현재 일본 바둑계 최정상급 기사인 시바노 도라마루(28) 9단과 후지사와 리나(27) 7단 등도 배출했다.
그는 이어 일본 바둑계에 자신감 회복을 주문했다. “세계 바둑계가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지만 인공지능(AI) 덕분에 일본 남녀 바둑의 국제 무대 경쟁력도 상당히 올라갔다고 봅니다.” 세계 무대에서 일본도 여유를 가지고 나설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진검 승부의 세계인 반상에서도 심리적인 요인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엔 대국 직전부터 한국이나 중국의 초일류 기사들의 기세에 눌리면서 일본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단 판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매 기사로 잘 알려진 일본의 우에노 아사미(24) 6단과 우에노 리사(19) 3단이 현재 세계 양대 여자 기전 우승컵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언니는 지난해 12월 ‘제7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오픈전’(우승상금 50만 위안, 약 9,500만 원)을, 동생은 올해 3월 ‘센코컵 월드바둑여자최강전 2025’(우승상금 1,000만 엔, 약 9,100만 원) 타이틀을 잇따라 차지하면서 한중 양강 체제로 고착화됐던 세계 여자 바둑계 판도까지 순식간에 바꿔놨다.
그는 일본 바둑의 부활 선봉에 앞장설 것이란 각오도 다졌다. “제 인생에서도 ‘응씨배’ 우승은 첫 세계 기전 타이틀 획득이어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국제 무대에서 상승세를 탄 만큼, 다른 세계 기전에서도 우승을 해야죠. 이젠 일본의 반상 역사에 새로운 기록이 나올 시점도 됐으니까요.”
허재경 선임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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