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에 딴따라가 웬말이니.." 대대손손 의사 집안 시집가서 강제은퇴 당한 톱가수

‘슬픈 연가’의 주인공, 삶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방주연. 1970년대 ‘슬픈 연가’, ‘자주색 가방’, ‘당신의 마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름이다.

당시에는 ‘여자 나훈아’, ‘여자 남진’이라 불릴 만큼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무대 밖 인생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는 명성을 가진 시댁에 시집을 갔다. 외적으로는 부유하고 안정된 삶 같았지만, 실제는 달랐다.

시댁에서는 며느리의 ‘소변 색’까지 체크했을 만큼 사생활에 깊게 개입했고, 쇼핑 중독자였던 시어머니는 명품과 골동품 쇼핑에 집착하며 가정의 갈등을 키웠다.

방주연은 “며느리 인권은 없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시어머니의 외상 쇼핑으로 생긴 채무까지 떠안게 되면서, 결국 본인 명의로 1억 원을 대출받아 갚아야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딴따라는 안된다.."는 구박을 수시로 받았기에 가수 활동을 중단했고, 시댁 의사들을 위한 삼시세끼를 챙기는 역할을 떠맡았다.

사실상 강제 은퇴나 다름 없었다.

현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살던 시댁의 집안 연못엔 비단잉어가 헤엄쳐 다니고 비싼 소나무가 있었다. 심지어 원숭이, 오리 등이 뛰노는 동물원도 있었다.

오죽하면 주변 유치원생들이 방주연의 시댁으로 소풍을 왔는데 이때 방주연이 유치원생의 간식을 챙겨야했다.

임신 중 암 판정, 그리고 두 번째 병마와의 싸움

삶이 고단했던 건 시집살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신 중 임파선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의사는 유산을 권했지만 방주연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치료를 거부했다.

프랑스에 가서 단식 요법까지 시도했고, 기적처럼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그 선택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지만, 방주연은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그 후 또 한 번, 위암 판정을 받게 된다.

남편과 사별한 직후였고, 남편의 외도와 혼외 자녀 존재까지 알게 된 상태였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독하게 치료에 전념했고, 건강을 되찾았다.

지금도 방주연은 꾸준히 건강을 관리하며 방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기를 거의 끊고 사찰음식을 즐기며, 맨발로 등산하고, 부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그림을 그리며 회복과 치유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남편의 무덤을 조용히 찾아가 꽃다발만 두고 돌아왔다는 고백에는, 복잡했던 감정의 결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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