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무료진료만 1만 5000명"

영등포역 6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골목 안에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는 '요셉의원'이 있습니다. 요셉의원의 고영초 원장은 대학시절부터 봉사를 시작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요. 신경외과 전문의에서 대학 병원 교수를 거처 '요셉의원'의 원장이 된 고영초 원장의 이야기를 '정책주간지 K-공감'에서 만나보세요!


“50년간 무료진료만 1만 5000명
가난한 환자는 내게 찾아온 선물”
‘쪽방촌 의료봉사’ 요셉의원 고영초 원장
50년간 의료봉사를 해온 요셉의원 고영초 원장은 “80세에도 90세에도 의료현장에 있고 싶다”고 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6번 출구는 쪽방촌과 이어집니다. 한 평 남짓의 쪽방은 하루 1만 원 미만으로 머물 수 있는 빈곤층 최후의 거처입니다. 밥을 짓거나 몸을 씻고 용변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없습니다. 보건복지부 추산 2021년 기준 쪽방촌 거주자는 최소 5448명. 쪽방 주민의 평균연령은 66.2세(2019년 기준)입니다. 일세나 달세를 내지 못하면 이들은 얇은 벽 너머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등포역 6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으면 노숙인과 무의탁 독거노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토마스의 집’이 보입니다. 배식을 받으려 길게 선 줄이 이어진 골목 안에는 누구나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는 ‘요셉의원’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 돈이 없어도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아프면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원 고영초 원장이 왕진 가방을 들고 쪽방에 누운 환자를 찾아나선 건 1973년부터입니다. 정말 아픈 사람은 병원에 찾아올 수도 없으니 의사가 찾아가야 한다는 믿음에서입니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봉사는 50년이 지난 2023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학생은 신경외과 전문의가 됐고 대학병원 교수를 거쳐 올해 요셉의원 원장이 됐습니다. 머리카락은 희어지고 눈가의 주름은 깊어졌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내게 온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선물로 대하는 마음’입니다.

9월 둘째 주 화요일, 정오의 햇살이 따가웠지만 요셉의원 안은 쾌적했습니다. 12시 기도를 마치고 먼저 밥부터 먹자고 권하는 고 원장을 따라 식당에 들어가니 각종 고기와 채소를 잘게 잘라 볶아낸 볼로네이즈 파스타가 한 상 가득이었습니다. 의료진과 봉사자, 취재진까지 둘러앉아 배불리 먹었습니다. 요셉의원은 다른 지원 없이 오직 후원자와 봉사자 두 축으로 운영됩니다. 좀체 잔반이 나오지 않는 점심은 ‘봉사자들이 밥이 맛있어서라도 다시 오고 싶게 만드는’ 요셉의원의 정성입니다.


요셉의원
Q. 봉사로 시작한 요셉의원과의 인연이 원장으로까지 이어졌네요.
A. 2018년에 정년을 하고 또 5년을 건국대학교병원에서 근무했습니다. 지난해 9월에 요셉의원 원장 제안을 받았고 올해 2월부터 매일 출근하고 있어요. 1987년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위해 이곳에 요셉의원을 세운 고 선우경식 원장님의 뜻이자 설립 이념을 잘 이어가자고 매일 다짐합니다.
Q. ‘영등포의 슈바이처’라 불리던 선우경식 원장의 주치의도 맡았었다고요.
A. 2006년 5월 첫째 주 월요일이었습니다. 요셉의원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어요. 선우 원장님이 쓰러지셨다고요. 당시 아들과 테니스 대회에 나갔다가 예선에서 떨어져서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증상을 들어보니 왼쪽 중대뇌 경맥이 막힌 것 같더라고요. 제가 근무하던 건국대병원으로 바로 옮겨서 혈관 수술팀을 소집해 막힌 혈관을 뚫었습니다. 덕분에 후유증 없이 회복하실 수 있었고요. 만약 예선을 통과했다면 전화를 못받았을 텐데 떨어져서 참 다행이었죠(웃음). 2008년 선우 원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렸습니다.
Q. 선우경식 원장의 기념관을 진료실로 사용하네요.
A. 진료공간이 부족해서 환자들을 여기서도 보고 있습니다. 저렇게 한쪽에 선대 원장이 계시니 늘 지켜보신다는 생각도 들고요. 오전 8시 반부터 진료를 시작해서 밤 9시에 퇴근합니다.
Q. 매일 진료를 하나요?
A. 의료 봉사진은 아무래도 퇴근 후에 오시거나 정해진 날짜에 오시니 상주하는 의사는 저뿐이라서 매일 나옵니다.
Q. 무료봉사의 첫 시작은 1973년 가톨릭봉사회였습니다.
A. 원래 저는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제를 기르는 서울 혜화동 성신중고등학교를 나왔고요. 예비고사를 보기 위해 일반 고등학교로 편입했는데 의대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며 배워둔 라틴어가 의학을 공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어요. 서울대 의대 예과를 지나 본과 시절부터 가톨릭봉사회 활동을 했는데 주말마다 진료를 하고 여름과 겨울 매해 두 번씩 장기 진료를 갔습니다. 약병을 모두 챙겨 가방에 넣으니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가방이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의료보험이 없어 시골에 봉사를 가면 하루 6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찾아왔어요. 당시 교수님을 따라 봉사하던 기억이 행복해 제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을 때 교육과정에 의료봉사를 넣었고, 가장 인기있는 강의가 됐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봉사단을 만들기도 했고요.
Q. 졸업 후에도 전진상의원, 라파엘클리닉, 요셉의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했고요.
A. 전진상의원은 1975년 아주 작은 집에서 시작됐어요. 무의촌이던 서울 금천구 시흥동 산동네에 만든 자선병원인데 지금은 호스피스 병동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술 마치고 시흥동까지 가려면 피곤하기도 했는데 도착해서 봉사자분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으면 다시 힘이 났어요. 오히려 피로와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밥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때 알았죠(웃음).
Q. 위급한 환자도 많이 만났겠습니다.
A. 전진상의원에서 진료하던 분 중 수두증을 앓던 환자분이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는 겁니다. 수두증이 치매랑 증상이 비슷하거든요. 약도 떨어졌을 것 같아서 환자 집을 찾아갔습니다. 가보니 거의 반혼수상태로 응급상황이었어요. 바로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고요.
Q. 수술비가 없는 환자는 어떻게 합니까?
A. 병원에 근무할 때는 사회사업팀과 연결해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원무과에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과거에는 막무가내로 떼를 쓸 때도 있었습니다. 돈 없는 환자도 살려야 하니까요.
Q. 라파엘클리닉에서는 방글라데시 청년들을 살렸다고 들었습니다.
A. 라파엘클리닉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국내 이주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병원이에요. 당시 한 친구는 뇌하수체종양을 앓았고 다른 친구는 척추종양을 앓았습니다. 건국대병원 사회사업팀의 협조로 무료로 수술을 해줄 수 있었죠. 다행히 완치돼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저는 6·25전쟁 이후 태어난 세대예요. 당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의 지원과 도움으로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원이 10년 전에 필리핀에 분원을 낸 것도 같은 이유예요. 우리가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주는 게 당연하죠.
Q. 신경외과를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A. 제가 본과생이던 1973년 3월에 아버지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셨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 오시질 않아서 근처 병원 응급실을 돌아다녔는데 아버지를 찾고 나니 눈동자가 열렸더라고요. 동공반사가 없다는 건 출혈로 뇌압이 올라갔다는 거거든요. 다행히 제가 당시 신경외과 실습을 했기에 선배에게 전화를 했고 바로 수술을 받으셨어요. 3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의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신경외과를 전공하게 된 건 아버지의 유언 같기도 해요.
Q.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후로 뇌수술만 3000번 넘게 하셨다고요.
A. 감사하게도 38년 동안 수술을 집도하면서 분쟁에 휘말린 적은 없습니다. 환자가 저를 믿듯 저도 환자를 믿습니다. 전적인 신뢰가 바탕이 돼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어요. 뇌수술이 난이도가 높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뇌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수술을 하다보면 시력을 회복하거나 걷지 못하던 사람이 회복되기도 해요. 기적 같은 순간을 목도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죠.
Q. 요셉의원에서 만난 환자도, 대학병원에서 만난 환자도 선생께는 같아 보입니다.
A. 다르지 않습니다. 진짜 환자는 아마 이 계단을 걸어 오르지도 못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등불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는 진료를 하고 싶어요. 실제로 우리 병원에 여든이 넘은 수녀님이 계신데 그분은 쪽방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세요. 젊은 간호사들도 꺼리는데 수녀님은 용감하시죠.
진짜 환자는 아마 이 계단을 걸어 오르지도 못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등불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는 진료를 하고 싶어요.
Q.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A.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 중에는 소변이나 대변 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분도 계세요. 무좀이 깊어 두꺼워진 발톱을 의료용 가위로 잘라드려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처음엔 당황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Q. 요셉의원 원장직은 임기가 있나요?
A. 초대 원장님이 21년을 하셨고 2대 신완식 원장님은 15년을 하셨죠. 저는 일단 임기를 5년으로 정했는데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 70세인데 지금 생각으론 80세에도 90세에도 진료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수 시절 노인질환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삶의 기쁨을 느끼면 우울을 느끼는 호르몬이 줄어들고 치매증상도 지연됩니다. ‘우아한 노년’을 맞을 수 있죠. 제게는 봉사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쁘게 살다가 환자들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병동’을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고영초 원장이 지난 50년 동안 무료로 진료한 환자는 1만 5000명이 넘습니다. 환자였던 노숙인이 후원자가 돼 의원을 다시 찾은 적도 있습니다. 고 원장의 천주교 세례명은 가시미로(Casimirus). 가시미로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권좌에 앉지 않고 일생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본 폴란드 성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