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 특집 도봉산장] 50년간 도봉산장 지켜온 할머니 "커피 한잔도 못 팔게 하는 공단 너무 서운"

서현우 2022. 10. 7. 09:3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82세 조순옥씨, 1973년부터 거주하며 산장 관리.. 공단이 숙박 영업, 상행위 금지 공문  
도봉산장 앞에서 만난 조순옥 할머니.

사진첩을 넘긴다. 1990년대, 1980년대를 지나 197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1973년 도봉산에 들어오기 전의 할머니를 만난다. 형용할 말을 찾기 게을러 그 시대의 표현을 잠깐 빌려오자면 너무나 참한 처녀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할머니를 본다. 하얗게 빛나던 손에는 깊게 주름이 패고 검푸른 혈관이 툭툭 튀어나와 있다. 얇고 창백한 두 팔은 마치 자작나무 가지를 떠오르게 했다.

조순옥 할머니가 옛 사진을 돌아보고 있다.
신혼여행을 가는 조순옥 할머니와 남편 故 유용서씨.
수도의과대학 재학 시절 조순옥 할머니. 할머니는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친 세월의 풍파에도 굴하지 않은 기백이 보였다. 동정할 것도 측은해 할 것도 없었다. 세월에 등은 살짝 굽었지만 기골마저 굽히진 않았다. 그럴 만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커먼 산중에서 50년을 버텼다. 산짐승들과 또 짐승 같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생명을 건져냈다. 그 시절 도봉은 성폭행, 자살, 패싸움, 강도가 만연했다.

그러나 이젠 좀처럼 귀기울여 주지 않는 이야기다. 마치 더 이상 불길이 일지 않는 산장 한가운데 벽난로처럼.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는 분위기다. 도봉산장지기, 조순옥 할머니의 이야기다.

1985년 독일에서 들여온 그라인더. 

산장, 대피소, 그리고 등산학교

도봉산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호선 도봉산역에서 하차해 도봉계곡으로 진입한 후 첫 갈림길에서 도봉대피소 및 자운봉, 천축사 방면으로 오르면 된다. 도봉매표소 기점을 기준으로 1.8km. 쉬엄쉬엄 걸을 만하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도봉산대피소' 혹은 '마당바위화장실'이라고 검색하면 정확한 위치가 나온다.

살짝 숨이 가빠질 때쯤 커다란 바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도봉산장의 회색빛 지붕이 보인다. 단단한 나무 계단을 걸어 오르자 '도봉대피소'라고 적힌 현판이 맞이해 준다. 그 위로는 한국등산학교, 서울특별시산악연맹 현판이 겹겹이 늘어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또 도봉대피소 현판 뒤에는 '도봉산장'이라고 적혀 있다.

이 복잡한 광경은 도봉산장의 52년 부침의 역사를 살펴봐야 이해할 수 있다. 도봉산장은 1970년에 태어났다. 민주공화당 공화산악회의 김영도 원로산악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 전국에 만든 35개 산장 중 하나다.

유용서씨는 도봉산 물맛과 가장 잘 맞는 원두라며 로즈버드 원두를 썼다.

일단 지어놨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폐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조순옥 할머니의 부군 고故유용서씨는 1972년에 아예 산장에 들어와 살기로 결심한다. 처음엔 유씨 혼자 살았지만 이듬해 아내와 어린 아들도 산장으로 올라와 세 식구가 산장에 머물며 건물도 관리하고 등산객들도 살폈다.

1974년에는 서울시산악연맹이 이곳에 한국등산학교를 설립한다. 설립이라곤 하지만 따로 건물을 추가해 지은 건 아니다. 산장을 등산학교 교육장으로 활용한 정도다. 한국등산학교와 도봉산장 현판이 공존하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9년이 흐른 1983년. 도봉산 일원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 국립공원공단은 공원 내 산장 시설들을 '대피소'라고 부른다. 그래서 도봉산장은 도봉대피소란 이름을 동시에 떠안게 됐다.

수락산장이 문을 닫은 지금, 도봉산장은 수도권에서 1970년대 지은 산장 중 공단 직원이 아닌 민간인이 거주하며 등산객을 맞이하는 유일한 산장이다. 이 기사에선 처음 안고 태어난 이름, 도봉산장으로 통칭한다.

커피를 내리자 그윽한 커피향이 산장 안을 가득 채운다.

시동생이 '권금성 털보'

"계세요?"

창문을 넘어온 도봉계곡의 물소리만 먹먹하게 감도는 산장 안으로 들어선다.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들이 정겹다. 옛날 천축사에서 고사목을 벌목할 때 벤 것들을 유용서씨가 직접 다듬어 놓은 것들이라고 한다.

인기척을 내자 겨울 도봉산처럼 하얗게 물든 노인과 풍채가 단단한 중년 남성이 어디선가 나와 웃으며 맞이해 준다. 도봉산장지기 유용서씨의 아내 조순옥 할머니와 아들 유근호씨다.

조순옥 할머니는 1939년 9월 10일 개성 인근 장단군 대강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넘어왔다. 수도의과대학을 졸업한 할머니는 의대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수도의과대학이 경성여자의학강습소 후신이에요. 그리고 1971년에 고려대학교에 합병됐죠. 그 덕에 나도 학적이 고려대 간호학과가 됐어요. 출세했죠."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난 유용서씨는 당시 대한선탁공사에 기술연구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산업화 물결이 휘몰아치던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위세가 등등할 수밖에 없다.

"1963년 12월 12일에 결혼하고 1965년에 아들을 얻었어요. 나름 안정적으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산에 간다던 이 양반이 도통 내려오질 않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시동생하고 얘기하던 중 정부가 전국 곳곳에 산장을 지어놨는데 관리가 안 되고 있단 걸 안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각각 산장 하나씩 맡아 산장지기를 하자고 결심한 거죠. 시동생이 바로 그 '권금성 털보' 권금성산장지기 유창서씨예요."

도봉산장 한 가운데엔 벽난로가 있다. 화목난로를 들이기 전까지 유일한 난방수단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산으로 들어가자 황망했다. 당시 도봉산은 우범지역이었다. 2년간 방치돼 있던 도봉산장 또한 처참했다. 유용서씨가 처음 산장에 도착했을 땐 유리창은 전부 깨져 있었고 침상이나 주변에 오물과 변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 곳으로 갑자기 살림을 옮겨야 될 처지가 됐으니 할머니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가기 싫어서 기싸움을 했죠. 그리고 이참에 아예 한국을 뜰까도 생각했어요. 많은 대학 동기들이 미국으로 가서 간호사 생활을 했거든요. 유학 갈 생각에 편지로 친구에게 미국 생활을 물었는데 '식구가 전부 온다면 찬성이지만 혼자선 오지 마라. 미국은 혼자 살 곳이 아니다'라고 답장이 왔어요. 또 아들이랑 둘이서 방을 얻어 살던 셋집 안주인도 '애기 엄마. 아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떨어져서 살면 뭐해요'하고 설득했죠. 결국 마음을 접었어요."

기싸움이 이어지던 어느 날 밤, 잠결에 아버지를 찾는 아들을 재우고 잠이 들려던 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산에서 내려온 유용서씨였다. 커피를 끓이다가 뜨거운 물을 쏟아 데여서 상처가 났다. 유씨는 "다치니깐 당신하고 아들 생각밖에 안 나더라"라고 말했다. 결국 할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짐을 싸서 도봉산장으로 올라갔다. 유씨는 아무 연락 없이 올라온 두 모자를 꽉 끌어안아줬다.

한가로운 산장에서 부부는 클래식을 듣는 것이 주된 취미였다고 한다. 

1970년대 도봉산은 우범지대

산장 생활은 어떨까. 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아침이면 지저귀는 새 소리에 눈을 뜨는 낭만적인 삶일까.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괴리돼 있다.

"밤중에 자고 있는데 전과범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곤 했어요. 우리 식구가 올라오기 전에 이 건물이 비어 있으니까 아지트로 삼았었던 거죠. 그러니까 이 전과범들이 와선 자기네 집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바깥양반이 체격도 크고 파출소에서 핸드마이크도 큰 거 빌려놨기에 이런 불량배들을 매번 쫓아낼 수 있었죠."

우여곡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산장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도 일어났다. 정부가 현 부지가 천축사 땅인 줄 알고 산장을 지어놓고 서울시에 소유권을 넘겨놨는데 알고 봤더니 땅주인이 따로 있었다. 이 주인과도 한동안 분쟁을 겪은 끝에 간신히 토지포기각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현재 도봉산장은 국립공원공단 소유. 지난 2019년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서울시연맹이 공단에 일정액의 임대료를 내고 한국등산학교로 임차해 사용하고 있는 상태다.

"처음에는 좋은 직장 다 내팽개치고 산 구석에서 사니깐 원망도 많이 했어요. 그나마 제가 병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 험하고 흉한 일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산악 사고도 많이 일어나고, 성폭행, 자살, 패싸움 그런 것도 많았어요. 그래도 바깥양반이 산장지기로 그런 일들을 다 해결했죠."

한번 시작된 푸념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길은 산장 밖으로 향했다가 벽으로, 다시 땅으로 갔다. 분명 같은 공간을 보고 있지만, 시간이 달랐다. 할머니의 시간 축은 쌓인 50여 년을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도끼 들고 성폭행하려던 범인의 무기를 빼앗고 여성을 구출한 뒤 진술서를 받았던 이야기, 양말 속에 칼을 숨긴 채 강도짓 하려던 학생 이야기, 행패 부리던 불량배에게 공짜로 커피를 끓여 주곤 다음에도 잘 때 없으면 조용히 와서 자고 가라고 해 감화시킨 이야기, '임신해도 3개월 전에만 낙태하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거칠게 살던 가출 여학생을 산장에서 정성껏 돌보고 타일러 다시 학교로 돌려보낸 이야기, 자살한 시신들을 수습했던 이야기들이 산장 곳곳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산장山莊지기가 산의 장將으로 일했다.

도봉산장 2층에는 한국등산학교 수강생들을 위한 침상이 구비돼 있다. 

50년 동안 단 한 번도 비워진 적 없던 산장

"커피는 언제부터 파신 거예요?"

잠깐 생긴 푸념과 푸념 사이를 파고들어 화제를 바꿔봤다. 도봉산장에서는 음료를 판다. 원두커피와 코코아, 살구주스, 그리고 냉커피다.

"어쨌든 산장에서 먹고 살려면 뭔가를 했어야 됐어요. 수입이라곤 서울시에서 겨울에 동계 연탄 값으로 2만 원 줬던 게 전부였거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커피를 좋아하던 바깥양반이 아무 생각 없이 산에서 커피 마시다가 '어? 이거 기분 정말 좋네. 이 기분 공유하면 좋겠다' 해서 커피를 팔게 됐어요. 그래서 조선호텔에서 쓰던 커피 잔도 가져오고, 또 아이들은 커피 마시면 안 되니까 코코아랑 주스도 팔게 됐죠. 나름 커피 공부도 많이 했어요. 지금 쓰는 로즈버드 원두도 도봉산 물맛에 맞아서 쓰는 겁니다. 한 번 드셔 볼래요?"

할머니가 손수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내린다. 1985년 독일에서 들여온 그라인더다. 37년 동안 쉬지 않고 돌아가며 수많은 등산객들의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느덧 그윽한 커피 향이 산장 안을 가득 채운다. 생각해 보면 커피 말고 술을 팔았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것 같다. 슬쩍 떠보자 유근호씨는 "아버지 자신은 술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술을 팔면 사고 난다'고 절대, 한 번도 안 파셨다. 그래서 도봉산장 50년 역사상 술은 한 번도 판 적이 없다"고 답했다.

커피 향으로 환기된 분위기에 "산장에 살면서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죠?"라고 한마디 얹어 보았다.

"물론이죠. 산장에서 수많은 등산객을 두 손으로 구해 내면서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데요. 한 번은 석굴암에서 고꾸라져 다친 여성분을 구한 적이 있었어요. 이 분이 수술을 여러 번 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치셨는데, 수술할 때마다 '내 다리로 직접 걸어서 산장으로 와 보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요. 그 뒤 무려 10년 동안 재활하시곤 산장에 돈이랑 응급의료용품을 잔뜩 가져오셨어요. 남편은 '이런 걸 바라고 사람을 구한 건 아니다'면서 한사코 거절했는데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하면서 주고 가셨죠."

1, 2  1970년대 유용서씨가 직접 작성한 구조일지. 수많은 등산객을 두 손으로 구해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장은 50여 년 동안 딱 한 번을 제외하곤 비운 적이 없었다. 유근호씨는 "아버지가 3년간 암투병 끝에 1993년 돌아가실 때도 누군가는 산장을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이처럼 유용서씨가 전적으로 홀로 산장을 지켰던 것은 아니다. 도봉이 좋아, 산장이 좋아 머물던 사람들이 있었다. 월간산 전 편집장 출신인 안중국 전 국립등산학교장도 이 중 한 명이다. 할머니는 안중국 전 교장을 "산장에서 졸업논문을 썼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산장이 딱 한 번 비었던 때는 지난 2020년. 국립공원공단이 실시한 안전진단 결과 산장 건물이 C등급으로 판정돼 보수공사를 해야 했다. 이 덕에 낡았던 시설 상당수가 새것으로 교체됐다.

도봉산장 옛 현판은 산장 안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도봉산장 옛 현판은 산장 안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옛날엔 산장이 북적북적했어요. 심지어 여기서 결혼한 커플도 많아요. 등산하던 커플 넷, 또 등산과는 거리가 있지만 사정이 마땅치 않았던 커플 하나죠. 바깥양반이 주례를 섰고, 카세트 라디오로 결혼행진곡을 녹음해서 틀었어요. 물론 산장에 전기가 없을 때라 건전지를 사용하는 라디오를 썼죠.

우스운 일도 많았어요. 한 번은 청년 한 명이 벌거벗은 채로 산장에 찾아온 적이 있어요.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싶어 경계했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인근 대학교 통계학과 3학년 학생이었는데 여름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더워서 못 참고 도봉 계곡으로 피서를 왔대요. 주변에 보는 눈도 없으니까 옷을 다 벗고 한창 자맥질을 했는데 잠깐 사이에 벗어둔 옷이며 지갑이며 누가 다 훔쳐 도망간 거죠. 저희가 사비로 버스비도 주고 여분의 옷도 입혀 집에 보내줬어요."

수많은 사람을 살렸던 유용서씨는 1993년 숨을 거둔다. 마지막까지 사회에 봉사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대학교 해부학교실에 시신을 기증했다. 조순옥 할머니도 부군의 뜻을 좇아 2020년 모교인 고려대학교안암병원에 시신기증 서약을 했다.

든든했던 가장이 사라지면서 도봉산장도 조금씩 찾는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또 1987년 국립공원공단이 발족돼 유씨가 생전에 했던 일들을 대체하기 시작하며 이 현상이 더 가속화된다.

도봉산장 전경. 
산장 2층에 계곡 물을 끌어와 간단히 씻을 수 있도록 만든 시설에 할머니의 손글씨가 정겹다. 

"아버지는 악덕 산장지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두 모자에게는 더 이상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산장 생활을 지속할 근거가 없어진 상황. 하지만 이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근호씨의 언성이 높아진다.

"1993년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고작 3개월이 채 안 지났을 때, 저희 가족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 발생했어요. 국립공원공단에서 산장을 비우고 나가라고 통보해 온 거죠. 심지어는 저희 포함 우이, 인수, 북한, 보문 산장지기들을 불러 용역회사를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겁박할 정도였어요.

국립공원공단에서 취재 후 상행위와 숙박 영업을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 가족을 가장 화나게 했던 건 나가라는 이유가 '불법 영업 및 폭리, 자연환경 훼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선친에 대한 모욕이었어요. 살아 계실 땐 서울시장한테 많은 등산객을 구했다고 표창장, 감사장도 받았던 분인데 갑자기 폭리를 취하고 불법 영업을 한 악덕 산장지기 취급을 하다니요. 심지어 지금 논리로 생각해 보면 산장지기 일은 돈을 받고 했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요? 그저 산이 좋아서 무급으로 봉사하는 삶을 사신 분인데, 생계를 위해 커피를 판 것이 폭리라뇨. 그래서 저희는 강하게 저항해서 도봉산장을 지킬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산장지기 분들은 종국엔 산장을 뺏기고 쫓겨나셨죠."

긴 시간 인터뷰가 이어졌고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진다. 그동안 도봉산장에는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았다. 석조건물이 괜스레 쓸쓸해 보인다. 조순옥 할머니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청하자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아서 그저 부처님께 '오래 아프지 않고 곱게 가게 도와달라'고 빌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순옥 할머니와 아들 유근호씨가 인터뷰 중 환하게 웃고 있다. 

취재 후 뒷이야기

짐을 정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궁금증에 질문 하나를 보탰다. "여기 산장인데 자러 와도 돼요?"라고. 도봉산장은 국립공원이 숙박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곳으로, 봄과 가을에 운영되는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수강생만 교육 프로그램에 의거해 숙박할 수 있다. 알고 있지만 혹시 몰라 던진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지금은 자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등산학교 교육할 때만 아니면 자리가 없어서 못 자거나 그런 일은 없으니까 사전에 전화로 자리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냥 와서 자면 돼요"라고 답했다.

정말 괜찮은지 궁금했다. 국립공원공단에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공단은 "서울시산악연맹과 임차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숙박은 한국등산학교 활동으로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즉각 서울시산악연맹에 임대차계약 내용 준수 요청 공문을 보냈다. 계약상 한국등산학교 운영으로만 사용하고 허가되지 않은 상행위, 즉 50년간 이어 내려온 커피 판매를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시산악연맹이 중간에 끼어 당혹스러워졌다. 서울시산악연맹은 1987년 국립공원공단이 생기자 북한산국립공원 내 5개 산장 우이, 인수, 북한, 보문, 도봉의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임대 계약을 대리해 왔었다. 유근호씨에 따르면 연맹은 도봉을 제외한 나머지 4개 산장으로부턴 돈을 받아 임대료를 지불했고, 도봉산장은 연맹 자체 예산으로 임대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도봉산장에서 1년에 등산학교를 두 번 여니까 수강생 숙박비 내는 셈 치고 대신 부담한 것이었다. 임대료는 1990년대 후반 기준 1년에 80만 원, 현재는 300만 원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연유로 임대차계약에 할머니의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국립공원공단의 조치는 법에 의거해 타당한 것이다. 또 환경보호가 미덕인 지구온난화 시대란 점을 고려하면 산장의 기능을 최소화하려는 공단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또한 조순옥 할머니와 아들 유근호씨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보장돼 있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와 산장을 지키며 수많은 생명을 살렸는데, 국가권력이 갑자기 주변을 국립공원으로 획정하고선 산장에서 몇 번이나 쫓아내려 했다. 할머니로선 삶 자체를 부정당한 셈이다. 그리고 이번엔 삶을 묵인할 것을 종용받고 있다.

공문을 건네받은 조순옥, 유근호씨 모자는 크게 분개하고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아직 이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원로 산꾼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할 도봉산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했는데 엉뚱하게 불똥이 튀게 만들어 죄스러운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이참에 도봉산장의 법적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길 기원하는 마음도 가져본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