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765회 줄다리기 끝 정전협정… 올해로 71주년[역사 속의 This week]

김지은 기자 2024. 7. 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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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This week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군 중장이고 오른쪽에 앉은 이가 공산군 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 긴장감이 흘렀다. 오전 10시 유엔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군 중장과 공산군 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이 입장해 서로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국어·영어·중국어로 쓰인 6·25 전쟁 정전협정 문서에 각각 서명한 뒤 악수도 하지 않고 12분 만에 곧바로 퇴장했다. 이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 협정문에 서명했다. 그날 밤 10시 한반도에 3년 넘게 울렸던 포성이 멈췄다.

정전 협상이 시작된 것은 1950년 전쟁 발발 이듬해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였다. 1951년 6월 야콥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 대사가 유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교전국 사이에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자 미국은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휴전협상을 제의하도록 했다.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화답하면서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이후 군사분계선(MDL) 설정과 포로교환 문제 등으로 지지부진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1953년 1월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고, 두 달 뒤에는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하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아무런 안전보장조치 없이 휴전협정만 체결하고 떠난다면 국가안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휴전을 반대하며 미국에 방위조약 협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망은 불투명했다. 정전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벼랑 끝 전술로 6월 18일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전격 석방했다.

결국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고, 10여 일 후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1951년 협상을 시작해 159회의 본회담을 비롯해 총 765회의 회담 끝에 2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 협정서에 유엔군과 북한, 중국이 서명했으나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국이 유엔군에 포함되어 있어 따로 서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전문 5조 63항으로 구성된 정전협정의 핵심 사항은 상호 적대행위와 일체의 무장행동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 접경지역에서의 남북 간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됐고,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오르내림을 거듭했다. 전쟁을 멈췄을 뿐 완전한 종결의 의미가 아닌 정전협정의 62항에는 ‘쌍방이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해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올해는 정전협정 71주년이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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