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8. 이상한 사실, 기괴한 소식

김진형 2024. 8. 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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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조롱·비판 서슴지 않아… 역사기록의 펜 번뜩
경성부, 보통학교 증설 계획… 재산등급 나눠 과세
이완용 학교비 거부, ‘5→10등급’ 하향 부과 분노
경성제국대 조선문과 특설 ‘문화 교화’ 우려하기도
불리한 기사 게재 이유로 언론 모욕 세태 탄식
동양척식회사 상여 언급, 움집 거주민 빈곤 비교
일제사회 부조리 비판 ‘민족주의자’ 이면 돋보여
1925년 8월 개벽 62호에 실린 차상찬(필명 첨구생)의 글

■한일병탄 공로금과 학교비

이완용의 학교비 거부 문제는 지금 경성에서는 경술 날인사건 이상으로 주목받았다. 처음 경성부에서 이완용의 재산등급을 5등급으로 매긴 것은 그의 자산이 적어도 300만원 이상이 된다는 조사와 심사를 통한 결정이었다. 이는 예전 1910년 한일병탄 당시에 모처로부터 300만 원의 수입이 있었던 것을 근거로 한 결정이었다.

이번 경성부의 요청에 따라 고다마 백작이 답하길 ‘데라우치 총독으로 부터 15만 원을 받은 것은 자기도 아는 바이다’라고 했다. 고다마 백작이 아는 것만 15만 원이라 하면 모르는 것까지 치면 300만원이라는 것도 그럴듯한 말이다. 300만원-300만원-300만원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데 말이다. 이완용은 그렇게도 무서운 사람일까? 30만 경성부 주민 가운데 오직 무서운 사람은 이완용 개인 한 사람뿐일까? 경성부 당국자에게 한번 물어보자. 이완용이가 그렇게도 무섭더냐? 근 1년간이나 두고 싸워오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더란 말이냐? 5등급이었던 자를 10등급으로 만들어 주고 끝냈단 말이냐? 3800여 원을 받아야 하는데, 겨우 1604원을 받고 말더란 말이냐? 경성부의 위신은 말라 죽은 것이냐? 재산압류란 어떤 놈에게만 하는 것이냐? 이완용처럼 영악하다든지 성질이 더러우면 말도 안 하는구나.

지금 이후로는 경성부 당국자 너희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30만 부민은 믿지 않을 터이다. 학교비 문제를 가지고 강제 징수니 재산 압류니 그따위 수작을 하다가는 뺨 얻어맞을 것이다. 또 학교 평의원 총사직은 어떻게 처결하려느냐? 알고 싶지도 않다만, 혹시 웃음거리나 또 하나 줄 것인가? 아가(阿哥)! 하긴 그렇겠구나. 한때 몇십만, 몇백만을 주고, 이제 아무리 때가 늦었다고 한들 다시 빼앗을 것은 없겠지? 과거 공로를 생각하여 학교비 영구 면제 또한 일본 위정자로서는 할 만도 하겠지?

1925년 8월 개벽 62호에 실린 차상찬(필명 첨구생)의 글

■제3차는 문화인가?

내년 5월부터 개교하는 경성제국대학은 의학부와 법문학부, 2개 부를 둔다. 그리고 법문학부에는 특히 조선문과도 두기로 하고, 그 안에는 조선사와 조선어, 조선문학 세 강좌를 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에 조선문과 특설! 이 얼마나 번쩍이는 간판이냐!(빛 좋은 개살구보다 더 번쩍인다) 그러나 매년 입학생 모집에 3분의 2를 일본인으로 하고, 겨우 3분의 1을 조선인으로 하는 경성제국대학!

다시 말하면 이 조선이라는 식민지에 사는 일본인에게 조선의 고등지식을 주기 위한 대학. 또 말하면 조선 고유의 문화에 관한 일체를 한일병탄과 같은 방식으로 교화하려는 대학인 것이다. 이 대학에서 조선문과를 특설한다는 것은 대학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 처음 계획을 고칠 필요가 있는 일이지만, (일부 삭제) 과연 기뻐하고 날뛰며 좋아할 일일까(어떤 잡지에서는 말하길 ‘조선문학의 신기원’이라고까지도 하였지만). 많은 말을 하지 않겠지만, 조선은 제1차로 정치, 제2차로 경제에 대한 불행을 당하더니, 이번은 제3차로 문화인가?

1925년 8월 개벽 62호에 실린 차상찬(필명 첨구생)의 글

■배부른 놈의 불평하는 꼴

조선사철회사의 전무 이토 군은 일전에 어떤 일본인 기자에게 말하길 “사설철도의 지금 영업선은 380여 리이며, 그 이익은 1년에 300만 원이다. 중역 20인의 1년 상여금은 단 2만 원(1인당 1000원)에 불과한데, 반면 동양 척식 주식회사 중역의 상여금은 연 15만 원이다. 또 조선은행은 연 10만 원이니, 우리는 무슨 원인과 결과로, 이와 같은 가난한 회사를 다녀서 고생살이하게 되었는가!” 하며 불평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최근 경성부의 조사에 의하면, 경성 안에서 ‘움집’ 생활을 하는 사람이 630호에 2600여 명이며, 그들의 생활비는 하루 5전이라고 한다. 1년분을 총합해도 18원 25전에 불과한데, 그들은 오히려 찍소리 한마디를 못 하고 지낸다는 모양이지. 불평은 배부른 놈이 부르짖고, 굴종은 빼앗기는 놈이 더 잘하고… 과연 부정도 한세상.

노년 시절의 이완용

■어지러운 사람과 썩은 물건이 어찌 그리 많은가?

전북 이리에서는 매춘업을 하는 자가 자기에게 불리한 기사를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동아일보 기자를 모욕하였고, 전주에서는 경찰서 고등계주임 미사카라는 경찰관이 자기에 관한 기사를 내었다고 조선일보 지국 기자를 불러 유치장에 넣는다고 위협하였다고 한다. 평양에서는 기독교회 목사 몇 명이 예수를 사생자라 하는 ‘자유종’ 기사를 내었다 하여, 동아일보를 배척하자고 했다.

인신매매를 한 사람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도 ‘모욕’, 경찰관 한 사람이 관련되어도 ‘위협’, 자유종 기사 하나로도 ‘불매운동’. 그러면 언론기관은 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공자가 ‘춘추’를 짓자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이 두려워하였다는데, 조선에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언론기관이 생겼음에도,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무리가 오히려 함부로 날뛰는 모양이 아닌가. 탄식할 일이다.

이완용 장례식 기사(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나타난 이완용 가옥

■원앙새가 남북으로 따로 날다

북풍회의 신철 군과 고학생 상조회장 정종명 여사는 비록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같은 주의자요. 또 연애로 결혼한 까닭에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달에 평지풍파가 일어나서 원앙새가 아예 남북으로 나눠 날게 되었는데, 신철 군의 묵은 맹세가 아무리 철과 같이 굳은들 종명 씨가 화합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신철 군은 헤어진 후 무소식─.



■바람을 읊고 달을 보며 시를 짓는 무리

육당 최남선 군은 근래 소식이 없어서 무엇하나 하였더니, 알고 보니까 안종원, 이기 씨 등 10여 명의 시인 묵객과 매일 길동무하여 시 모임을 하며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그들을 별명 지어 말하자면 ‘하는 일 없이 바람을 읊고 달을 보며 시를 짓는 음풍농월당(吟風弄月黨)’이라고 할는지?

해설

차상찬은 종종 친일파 인사들의 근황을 전하며 그들에 대한 조롱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검열·삭제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굴하지 않았고, 특히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근황을 전하며 날카로운 펜의 날을 번뜩였다.

상황은 이렇다. 지금의 서울인 경성부는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었고, 보통학교 3곳을 증설할 계획을 세운다. 이에 거주민의 재산등급을 매겨 그에 비례한 세금을 걷던 상황이었다. 경성부는 이완용에게 5등급을 부여하고 3800여 원을 징수하려 했으나, 결국 1년여의 실랑이 끝에 등급을 10등급으로 낮추고 겨우 1604원을 걷는 데 그친 것이다.

1920년 3·1운동 진압에 기여한 공으로, 기존 백작에서 후작 칭호까지 받은 이완용의 위세에 무릎을 꿇은 꼴이었다. 이에 대해 차상찬은 이완용은 물론 당시 경성부 위정자들까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이완용의 재산 300만 원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1920년대 동아일보에 기록된 공사장 조선인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약 50전 내외였다. 이들이 한 달간 쉬지 않고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 고작 15원이었고, 백 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을 수 있는 돈은 18000원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의 재산이 300만 원이라니, 그가 나라를 팔아서 얻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차상찬은 이듬해 2월, 동일 필명으로 쓴 ‘경성잡화’에서 이완용이 이재명의 칼에 찔린 상처로 인한 폐렴으로 매년 겨울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후작’의 ‘후(侯)’ 대신에 원숭이 ‘후’자를 표기하는 등의 조롱을 가한다. 이어 3월호에서는 이완용의 죽음을 알리며, 고 이재명 의사의 영혼을 빌어 “아- 이놈이 인제야 죽었구나!”하고 비웃는다거나, 경성 청소부들이 “이완용을 욕하는 낙서가 없어져서 공동변소의 벽이 깨끗해져서 무엇보다도 좋다”고 반긴다는 말까지 담고 있다.

아무리 이 시기 총독부가 문화정책을 펴는 시기였다고는 하나, 일본 후작인 이완용의 죽음을 이리 강하게 조롱하는 차상찬의 모습은 지금의 시선에선 참이나 호기롭다.

이 글에서는 이외에도 일제 치하 조선 사회의 여러 부조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서서히 애매한 행보를 보이는 최남선에 대한 의문스러운 시선을 비유적으로 던지기도 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언론인으로서의 모습과, 민족주의자인 그의 이면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펜이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해 다시 감탄하게 된다.

△현대어 번역=강원문화교육연구소
△발췌문헌=1925년 8월 개벽 62호
△해설=이현준(한림대 강사, 강원문화교육연구소 차상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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