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오픈 충격 탈락 지운 천위페이, 16강 가볍게…야마구치는 완승 행진

배드민턴 여자단식은 매주가 ‘빅매치’입니다. 올해 판을 흔든 주인공은 단연 안세영이고, 그 앞을 가로막는 라이벌이 두 명 있죠. 야마구치 아카네와 천위페이. 둘은 스타일도, 흐름도, 올 시즌 스토리도 꽤 다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게 보면 늘 엮입니다. 같은 동선에서 부딪히고, 같은 무대에서 올라가고, 같은 상대에게 웃고 우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이번 프랑스오픈도 결국 두 사람에게 쏠립니다. 덴마크오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프랑스 세숑세비녜에서 다시 엔진을 켜고 달리는 중이니까요.

먼저 야마구치. 한마디로 “작정하고 돌아온” 시즌입니다. 2025년 초반 잔부상과 컨디션 이슈가 있었지만, 여름을 기점으로 페이스를 끌어올렸습니다. 가장 굵직한 대목은 세계개인선수권 우승. 결승에서 천위페이를 2-0으로 눌렀고, 내용도 압도적이었습니다. 라리를 길게 끌고 가는 특유의 볼 배급, 네트 앞에서 한 번 더 버티는 근성, 그리고 백코트에서 직선과 대각을 교차시키는 속임이 제대로 먹혔죠. 핀란드오픈(슈퍼500) 우승까지 보태면서 시즌 3관을 채웠고, 국내 팬들에겐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안세영을 잡아낸 그림으로 각인됐습니다. 다만 덴마크오픈 4강에서 안세영의 ‘집요한 수비→역습’에 막히며 1-2로 아쉽게 주저앉았죠. 반등의 모양새는 충분하고, 경기 감각도 살아 있습니다. 프랑스오픈 32강에선 한첸시를 상대로 31분 만에 2-0, 특히 1세트 5-5에서 7연속 포인트로 주도권을 틀어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세트에서는 잠깐 5-8로 끌려갔지만 15-17에서 다시 6연속 포인트로 마무리. 흔들려도 길게 흔들리지 않는, 야마구치다운 운영이었습니다.

천위페이는 올 시즌 초·중반에 ‘폭주’에 가까웠습니다. 스위스오픈(슈퍼300)으로 몸을 데우더니 아시아선수권(슈퍼1000)에서 빅 트로피를 품고, 태국오픈(슈퍼500), 싱가포르오픈(슈퍼750), 마카오오픈까지 5회 우승을 찍었습니다. 톤이 좋아졌던 이유는 명확합니다. 발이 가벼워졌고(체중 관리 효과가 보였다는 평), 수비-공격 전환 속도가 한 박자 빨라졌습니다. 수비에서 ‘한 번 더’ 버텨내고, 역으로 백코트 하이클리어로 상대를 당기며 찬스를 여는 패턴이 매끄러웠죠. 그런데 덴마크오픈에서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16강에서 미아 블릭펠트에게 0-2로 덜미를 잡혔고, 현지 매체들 평도 싸늘했습니다. 시즌 내내 8강을 내려가 본 적이 거의 없던 흐름에서 나온 이례적 조기 탈락. 그래서 프랑스오픈은 결과보다 내용, 그러니까 ‘감각 회복전’에 가깝습니다. 일단 첫 고비는 무난히 넘었습니다. 부사난 옹밤룽판을 상대로 1세트를 21-9로 끝내고, 2세트 초반 10-0까지 달아난 뒤 11-2 인터벌에서 상대 기권. 몸을 아끼며 16강행, 다음 상대는 튀르키예의 네슬리한 아린. 여기서 페이스를 다시 끌어올릴 여지가 충분합니다.

두 선수의 시즌 스토리를 늘어놓고 보면, 공통점과 차이가 뚜렷합니다. 공통점은 ‘큰 경기에 강하다’는 것. 둘 다 결승 무대 경험이 넘치고, 경기 플랜 B·C를 준비해 두는 타입입니다. 반면 차이는 경기를 푸는 톤에 있습니다. 야마구치는 라리를 길게 묶으면서 네트 앞 교란→하이클리어 견제→백라인 각도 바꾸기의 3단 변주를 즐깁니다. 코너를 찌르되, 무리한 마무리는 자제하고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죠. 그래서 점수판이 엎치락뒤치락할수록 강합니다. 천위페이는 초반 압박이 더 셉니다. 리턴 타점이 앞으로 나오면 바로 속공 템포로 바꾸고, 포핸드 드라이브-백핸드 커트로 리듬을 흔듭니다. 역습의 속도가 붙으면 5~6포인트 연속 득점이 나옵니다. 올 초중반 우승이 많았던 것도 이 ‘초반 질주→중반 관리’ 시나리오가 깔끔했기 때문입니다.

맞대결을 놓고 보면 지금은 야마구치가 흐름을 조금 더 쥔 쪽입니다. 통산 전적도 야마구치가 넉넉히 앞서 있고(22승 13패), 올해 세계선수권 결승도 야마구치가 해냈죠. 그럼에도 천위페이가 가진 ‘폭발 구간’은 언제든 경기를 뒤집을 변수가 됩니다. 4~5포인트가 순식간에 넘어가는 구간, 여기서 야마구치가 라리 길이를 얼마나 조절하느냐가 늘 관건입니다. 덴마크오픈에서의 조기 탈락은 어디까지나 ‘하루가 꼬인’ 케이스였고, 프랑스오픈 32강에서 보여준 스타트(10-0)는 여전히 엔진 자체는 멀쩡하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팬들의 시선은 같은 자리로 모입니다. 프랑스오픈 대진상 두 사람이 순항하면 8강에서 만날 공산이 큽니다. 여기서 이긴 쪽이 4강에서 안세영을 만날 가능성이 높고요. 안세영의 올 시즌 페이스(12개 대회 8승)는 말 그대로 넘사벽인데, 바로 그 넘사벽에 계단을 놓을 수 있는 두 명이 이들입니다. 야마구치는 안세영과 최근 4강에서 한 번씩 주고받으며 15승 15패의 균형을 맞췄고, 천위페이는 초반 압박으로 안세영의 길게 끄는 라리를 ‘짧게 자르는’ 몇 안 되는 선수입니다. 즉, ‘누가 더 안세영에게 가까운가’의 시험대가 8강에서 열리는 셈이죠.

숫자로 시즌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야마구치는 2025년에 최소 3개의 트로피(세계선수권, 핀란드오픈, 그리고 코리아오픈 우승 포함)를 들어 올렸고, 토너먼트 상위 라운드 도달률이 안정적입니다. 중요한 승부에서 끈질김이 살아 있고, 컨디션이 덜 좋아도 ‘경기 운영’으로 비빌 힘이 충분합니다. 반면 천위페이는 초중반에만 5회 우승(스위스·태국·싱가포르·마카오, 그리고 아시아선수권)으로 총량 자체가 무겁습니다. 랭킹 포인트도 시원하게 벌어 놨죠. 최근 덴마크오픈 16강 탈락은 분명 아픈 기록이지만,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휴식 구간처럼 보일 만큼 이전 누적 기록이 좋습니다. 프랑스오픈에서 상위 라운드만 밟아도 다시 랭킹과 컨디션은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큽니다.

세부 기술로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야마구치는 포핸드 스트레이트의 ‘속임’이 일품입니다. 몸은 대각으로 열어두고 손목 스냅으로 직선을 찌르는 패턴. 상대 수비가 쏠리는 순간 네트 플레이로 바로 붙습니다. 그리고 수비에서 발끝이 빠릅니다. 뒤로 빠지면서도 라켓 헤드가 떨어지지 않아 ‘한 번 더’를 만들어냅니다. 천위페이는 백코트에서의 하이클리어 길이가 정말 좋습니다. 살짝 길게 밀어 넣고, 상대를 뒷발로 물러나게 한 다음 드롭으로 앞을 비웁니다. 여기에 스트레이트 스매시 각도도 점점 날카로워졌습니다. 초기엔 대각 비중이 컸다면, 올해는 직선이 살아나며 선택지가 넓어졌죠.

프랑스오픈 초반 내용만 놓고 말하자면, 야마구치는 ‘한 박자 더 여유’, 천위페이는 ‘하나 더 빨리’입니다. 야마구치는 16강까지 가는 길에서 템포 조절과 체력 비축을 병행하는 모양새고, 천위페이는 32강에서 체력을 거의 쓰지 않고 올라왔습니다(상대 기권). 즉, 8강에서 만나면 두 사람 모두 연료는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승부는 ‘초반 10점까지의 톤’에서 갈릴 가능성이 큽니다. 천위페이가 스타트를 세게 밟고 점수 차를 벌려 놓으면 야마구치도 라리를 늘려 따라가야 하고, 반대로 야마구치가 초반부터 코스를 흔들며 긴 랠리를 만들면 천위페이의 속공 타이밍이 끊길 수 있습니다. 경험상, 이 둘의 승부는 1세트 막판 16~18점 구간에서 방향이 거의 정해집니다.

결론적으로 2025 시즌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야마구치는 ‘큰 무대에서의 복귀 선언’을 확실히 했고, 천위페이는 ‘총량으로 증명’한 시즌입니다. 한쪽은 우승의 질, 다른 한쪽은 우승의 양. 덴마크오픈에서의 엇갈림은 단기 뉴스였고, 프랑스오픈에서 진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누가 안세영에게 더 위협적인 화살이 될지, 그 답은 아마도 8강 코트에서 나올 겁니다. 팬 입장에서는 그저 즐길 준비만 하면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컨디션과 서사가 이미 충분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버티기’가 중요합니다. 야마구치는 체력 세이브를 위한 포인트 운영, 천위페이는 초반 질주 이후 관리 구간의 리듬 만들기가 숙제입니다. 만약 여기서 완성도가 올라가면, 파리 이후의 내년 캘린더에서도 두 사람 이름은 변함없이 맨 위줄에 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옆엔 또다시 같은 이름이 서 있겠죠. “안세영.” 그 이름을 사이에 두고, 야마구치와 천위페이가 또 몇 번이나 얽힐지, 그 자체로 2025 시즌 후반부의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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