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의 언어를 버리고 ''한글을 국가의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는 '이 나라'

몽골 의회에 상정된 ‘한글 국가문자’ 법안

1990년대 초 몽골 의회에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법안 하나가 상정됐다. 80년 가까이 키릴 문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해 온 몽골이, 자국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한글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외국어 교육 강화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 공문서, 교육에서 사용하는 국가 문자 체계를 통째로 바꾸자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의회 내부에서도 긴장감이 컸다.

법안이 논의 단계에 올라오자마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쪽은 보수파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몽골이 외국 문자를 쓰게 된 것도 이미 굴욕인데, 또 다른 나라 문자를 들여오는 것은 민족적 배신”이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회의장에서 책상을 내리치고, “왜 우리가 한국 문자를 써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그들에게 한글은 언어학적 도구가 아니라, 감정과 자존심이 걸린 상징이었다.

학계가 내놓은 숫자, “한글 87% vs 키릴 61%”

논쟁이 감정적으로 흐르자, 몽골 학계와 연구진은 냉정한 데이터를 들고 나왔다. 몽골어 발음을 기존 키릴 문자 체계로 옮겼을 때와, 한글로 옮겼을 때의 표기 정확도를 비교한 연구 결과였다. 분석 결과, 한글은 몽골어 음소를 약 87% 수준으로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반면, 키릴 문자로는 61% 안팎에 그친다는 수치가 제시됐다. 복잡한 모음·자음 조합과 길이, 억양 차이를 반영하는 데서 한글이 훨씬 유리하다는 의미였다.

이 수치는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지던 불편함을 숫자로 정리해 준 지표였다. 몽골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키릴로는 발음이 제대로 안 살아난다”는 체감이 있었고, 같은 단어를 사람마다 다르게 적거나, 발음과 표기가 어긋나는 경우도 흔했다. 한글을 전면 도입하자는 주장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민족 감정은 이해하지만, 우리 언어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무엇인지부터 보자”는 논리였다.

한국 드라마 자막으로 한글을 배운 몽골 청소년들

흥미로운 건 이미 현장에서 ‘자발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법안 논의 당시 조사에 따르면, 몽골 청소년들 상당수가 한국 드라마와 K-팝 자막을 통해 한글을 독학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친 적도, 국가 차원의 교육 정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영상 콘텐츠를 즐기던 세대가 자연스럽게 자막을 따라 읽고 쓰며 한글을 익힌 것이다.

이런 현실은 “한글은 낯선 외국 문자”라는 보수파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10대·20대 청년층에게 한글은 이미 친숙한 표기 체계였고, 키릴보다 오히려 배우기 쉽다는 인식도 퍼지고 있었다. 의회 논의 과정에서 “젊은 세대는 이미 한글로 몽골어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일부 의원들은 “언젠가는 문자 개혁을 해야 한다면, 지금 세대가 준비돼 있을 때 하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독립을 이끈 원로 의원의 한 마디

격론이 이어지던 와중에, 1990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주도했던 고령의 원로 의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몽골 역사와 한글을 동시에 꺼내들며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연설의 첫머리에서 그는 “쿠빌라이 칸은 700년 전부터 ‘우리만의 완벽한 문자’를 꿈꿨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거대한 제국을 세운 몽골조차, 자국 언어를 정확히 담아낼 고유 문자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씁쓸한 역사였다.

이어 그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과정을 언급하며,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문자는 이미 이웃 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글은 한 번도 몽골을 정복한 적이 없는 나라가 만든 문자”라며, 과거 제국의 후손이 피정복국의 문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랜 꿈에 가장 가까운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에 한글이 몽골에 다시 문을 두드렸는데, 또 거부한다면 우리가 700년 동안 반복해 온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로 의원들을 향해 결정을 촉구했다.

찬성 52, 반대 22… 한글을 택한 몽골의 선택

토론과 설득 끝에 진행된 최종 표결에서, 한글을 몽골의 공식 문자로 채택하는 법안은 찬성 52표, 반대 22표로 통과됐다.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 다수는 결국 “우리 언어에 가장 잘 맞는 문자”와 “미래 세대가 이미 익숙해진 문자”를 선택하는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키릴 문자 도입 이후 80여 년 만에, 몽골은 다시 한 번 문자 체계를 바꾸는 대전환을 선택했다.

이 결정은 상징성 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과거 세계 최강의 기마 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역사적으로 피정복국이었던 조선에서 만들어진 문자를 스스로 국가의 공식 문자로 채택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제국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 언어를 가장 잘 담는 문자”를 택한 실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결단이었다.

문자를 넘어, 언어와 문화의 다리를 더 넓혀 가자

몽골이 키릴 문자를 넘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과정은, 문자 선택이 단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실용성, 세대 인식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정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글은 몽골어를 더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도구로 인정받았고, 동시에 한국 드라마와 문화를 즐기던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친숙한 문자였다. 여기에 쿠빌라이 칸의 미완의 꿈과 세종대왕의 완성된 문자라는 역사 서사가 더해지면서, 몽골 의회는 “우리 언어에 가장 잘 맞는 외국 문자를 택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제 한글을 매개로 연결된 두 나라가 언어·교육·문화 협력을 더 깊게 이어 가며, 문자 하나가 만들어낸 인연을 미래 세대의 공동 자산으로 키워 가자는 목표를 분명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