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할아버지가 열어준 생일잔치 / 이길보라

한겨레 2022. 7. 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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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수박 할아버지가 직접 꾸민 장식품. 목이 부러져 테이프를 감고 있는 백조가 수박을 들고 사과하는 자신의 모습이며 우측 백조가 불 같이 화를 내는 보라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야수유키 후지노 제공

[숨&결]
이길보라 영화감독·작가

여름이 올 때마다 생각해. 엄마는 엄청나게 더운 날 나를 낳았구나. 매년 수영복을 입고 생일을 보내. 어렸을 때는 엄마가 직접 잔치를 열어주었어. 밀가루 반죽으로 도를 구워서 만든 피자, 정육점에서 사다 튀긴 고기에 소스를 올린 탕수육, 손이 많이 가는 잡채, 동네 빵집에서 푸짐하게 사온 빵까지. 엄마는 다른 집 못지않게 잔칫상을 푸짐하게 차려주었어. 나는 친구들을 불러 신나게 놀았지.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 생일잔치를 직접 준비해. 올해도 바닷가에서 수영하며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서 바다 앞에 사는 수박 할아버지에게 마당을 빌려도 되겠냐고 물었어. 작년에 쓰레기를 줍다가 대판 싸워서 수박을 주고받으며 화해한 할아버지 말이야. 그 집 마당이 바로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이자 싸운 장소야. 한치의 고민도 없이 선뜻 내어준다기에 청소부터 시작했어. 쓰레기를 줍고 듬성듬성 난 풀을 정리했지. 테이블과 의자의 개수도 세고 필요한 물품도 점검했어. 수박 할아버지는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래. 최대한 폐를 덜 끼치고 싶었어. 친구들에게 선물은 정중히 거절하며 각자 먹을 음식과 음료를 가져와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어. 쓰레기를 줄이고 싶으니 개인 컵과 접시를 지참해달라고도 했지.

대망의 잔칫날, 준비를 위해 서둘러 갔는데 입구에 등불이 걸려 있는 거야. 무슨 동네 축제라도 벌어진 줄 알았어. 일본 규슈 특산품이라는 백조 모양 유리공예품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어. 수박 할아버지는 친구에게 받았는데 장식하면 딱 맞을 것 같아 들고 왔다며 웃었지. 물이 담긴 그릇은 무엇이냐 묻자 밭에서 꺾어온 빨갛고 하얀 꽃을 내밀었어. 보라의 나이만큼 꽃송이를 띄우자고 말이야. 파트너는 32개 꽃송이를 하나하나 올렸어. 아래 칸에는 수박이 놓여 있었지. ‘수박 할아버지가 여는 보라의 생일잔치’를 상징하는 멋진 장식물이었어.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다며 둘러보라고 했어. 테이블과 의자가 마당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1톤 트럭 뒷부분이 각종 음식을 올려두는 용도로 배치되어 있었어. 축제에서나 쓸 것 같은 등불이 마당 전체를 비추고 있었지. 수영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오갈 수 있도록 마당과 바다 사이의 가림막도 열어두었어. 쓰레기를 버리는 곳도 마련되어 있었어. 종이상자를 재활용해 이름표도 달아두었지. 보라와 쓰레기를 줍다 만났기에 분리수거 코너는 특별히 신경 썼다지 뭐야.

약속한 시각이 되자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씩 등장했어. 애정하는 이웃이면서 동시에 수박 할아버지를 궁금해했던 친구들이야. 포르투갈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가 일본에 돌아온 커플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음악을 만드는 미국인과 일본인 커플, 취재차 만났다가 친구가 된 신문기자, 동네에 있는 공유사무실을 관리하는 매니저, 후쿠오카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사 부부, 동네 빵집 언니, 후쿠오카시 종합도서관의 영화사업 담당자, 파트너의 가족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와봤다는 옆집 사람들까지. 모두가 수박 할아버지가 손수 준비한 잔치에 감탄했어.

대망의 장식은 수박 깨기였지. 일본의 여름 바다에서는 빠지지 않는 놀이라며 눈을 가리는 수건과 막대기, 수박이 마련되어 있었어. 눈을 감고 자리에서 다섯번을 돌았어. 들려오는 신호에 따라 앞으로 걸어가 막대기를 휘둘렀어. 나는 귀퉁이를 깼고 할아버지는 실패했고 미국인 친구는 막대기를 박살 냈고 기자가 성공했지.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가 뒤섞인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웃다가 음식을 나눠 먹고 잔치를 파했어.

모두들 이제야 수박 할아버지를 알게 됐다며 기쁘다고 했어. 동네의 이상한 할아버지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이웃이 됐다고 말이야. 동네에서 산다는 것, 70살 일본 할아버지가 32살 한국 청년에게 가르쳐주는 감각이야. 정말이지 한여름의 영화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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