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과학자들의 이상향일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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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학자가 앞으로 자신이 관리할 84개 연구소를 9개월간 매주 방문하여 약 2만4000명의 직원이 어떤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견문록을 '미래의 세계'(독일어판 원제)라는 책으로 낸다.
막스플랑크협회는 과학진흥을 목적으로 1911년 설립된 카이저빌헬름협회가 2차대전 후 개칭한 것으로, 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수십개 연구소를 관리하는 비영리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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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학자가 앞으로 자신이 관리할 84개 연구소를 9개월간 매주 방문하여 약 2만4000명의 직원이 어떤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견문록을 ‘미래의 세계’(독일어판 원제)라는 책으로 낸다. 자신들이 하는 기초과학 연구가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결정한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담긴 제목이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 저자가 어디의 누구인지 맞힐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연구 조직은 세계에 두셋뿐이기 때문이다. 그 조직은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저자는 현 협회장 패트릭 크래머다. 우리말 번역서가 최근 ‘과학의 최전선’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막스플랑크협회는 과학진흥을 목적으로 1911년 설립된 카이저빌헬름협회가 2차대전 후 개칭한 것으로, 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수십개 연구소를 관리하는 비영리 기관이다. 공공자금에 의존하지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철칙으로 따르는데, 이 유명한 원칙 자체가 초대 카이저빌헬름협회장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나크가 내세웠던 것이라 하르나크 원칙이라 불린다. 협회의 모토는 “아는 것이 적용보다 먼저”. 당장의 쓸모를 논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기초과학 연구에 전념하겠다는 뜻이다.(산업기술을 맡는 프라운호퍼협회가 따로 있다.)

취지에 걸맞게, 크래머의 여행은 막스플랑크 천문학연구소에서 시작하여 천체물리학연구소, 외계물리학연구소, 중력물리학연구소로 이어진다. 우리 은하 중심에서 블랙홀을 발견한 공으로 2020년 노벨상을 받은 라인하르트 겐첼에게서 직접 설명을 들으면서 이 연구소들의 블랙홀과 중력파 연구를 일별하는 식이다.
진화인류학연구소로 가면, 네안데르탈인 디엔에이(DNA) 분석으로 유명하며 역시 2022년 노벨상을 받은 스반테 페보가 고인류학을 이끌고 있다. 기후학, 단백질체학, 노화학, 양자컴퓨터, 로봇공학, 핵융합까지 주제별로 이어지는 여행에서 크래머는 문외한의 시점으로 과학자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연구하나요?”를 묻고, 그 답을 우리에게도 들려준다. 수백개 연구 주제를 한권에 담았으니 개략적 소개이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놀라운 광범위함과 최신성은 과연 막스플랑크협회가 과학의 최전선이라는 선언에 값한다.
기초 연구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발전하여 세상에 기여하는지 그 양태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박테리아의 면역계에 대한 호기심은 유전자가위 기술과 유전질환 치료법으로 이어졌고, 천문학연구소는 지능형시스템연구소와 협업하여 머신러닝을 통해 외계행성을 찾아낸다. 협회에 예술사연구소, 국제법연구소, 공유재연구소 등 이른바 ‘인문사회과학’ 분야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게 과학자들의 이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모습이지만, 당연히 이 책에서 보는 것이 막스플랑크협회의 전부는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일단 자율성과 도전을 가능케 하는 정성적 연구 평가와 조직 관리 등 행정 측면의 이야기는 없다. 협회가 작년에 레바논-호주 출신 인류학자가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전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방문연구원 자격을 취소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일도 떠오른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학자/과학조직 또한 정치적 주체이며 행위자임을 인정하고 논의하지 않는 한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모든 이상적인 말은 현실에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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