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질병코드 등재를 둘러싼 찬반 의견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 등재는 근거 논문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실체적 적합성’이, 청소년 보호라는 주요 목적의 효과를 거두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합목적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나아가 국내에서는 보건복지부와 정신의학계, 그리고 기획재정부 산하 통계청이 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권고안에 불과한 WHO 질병분류를 강행한다는 측면에서 ‘절차적 정당성’의 흠결도 감지된다. 게임 질병코드가 근거와 목적부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공격을 받는 것이다.
WHO 질병코드, 가변성·임의성·보수성·상충성 특징
‘성전환’은 WHO가 입장을 번복한 대표 사례다. WHO는 2019년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1)에서 성전환을 ‘성정체성 장애’ 분류에서 제외했다. 1974년 미국 정신과협회에서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은 지 45년, 1990년 WHO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에서 제외한 지 29년, 2014년 WHO가 성전환을 장애 분류에서 배제하겠다고 공언한 지 5년 만이다.
WHO의 성전환 질병 분류 제외는 WHO의 결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가변성’과 ‘임의성’, 또 WHO가 질병에 대한 인식과 환경변화에 뒤처진다는 ‘보수성’을 나타낸다. 이 같은 결정이 동성애나 성전환을 죄악시하는 아랍권 국가들과 러시아의 반발을 샀다는 점에서 ‘상충성’도 내포한다.
WHO는 보건의료 분야의 최고 전문기관이지만 모든 활동에서 권위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WHO의 국제질병분류코드도 권고 사안일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WHO도 권고 사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만약 WHO의 규정이 강제성을 갖는다면 국제질병코드의 특징이 가진 리스크를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가운데 WHO의 글로벌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WHO가 의약 카르텔이나 특정 재단에 종속된 이권단체의 이익을 옹호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코로나19 당시 유효성과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백신을 권장했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패 의혹을 제기하며 WHO를 탈퇴한 것도 이 때문이다.
WHO는 '권고안' vs 국내법은 '강행 법규'
WHO 질병코드는 권고안이므로 국내 도입이 필수는 아니다. 하지만 국내법은 WHO를 따르도록 강제한다. 질병표준분류를 규정한 통계법 제22조에는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중략) 표준 분류를 작성·고시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임의 규정은 ‘할 수 있다’고 적시한다. 국내법이 WHO 질병코드의 임의성과 가변성, 보수성, 상충성의 리스크를 그대로 떠안도록 설계된 것이다.
통계법은 국제질병코드를 국내 경제 외 사회구조 변화 반영 등 특별한 경우에 예외 적용할 수 있다고 길을 열어뒀지만, 국회에 따르면 통계청은 ‘묻지마 준수’를 고수하는 상황이다. 관례상 WHO의 개정안에 따라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예외없이 고쳐왔다는 이유에서다.
게임 질병코드에 대한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최근 통계청이 ‘ICD-11 사용 조건 및 라이선스 계약’을 근거로 게임 질병코드 등재를 강행하며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관협의체’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기존 입장과 상반된 모습이라는 지적이다.
강 의원은 올해 2월 “통계청이 그동안 국내 여건을 반영하겠다며 협의를 진행해놓고 결정적 시점에서 국제 라이선스를 근거로 한국형 분류체계 마련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거대한 국민 사기극”이라며 “통계청이 먼저 나서 WHO와 문제를 협의해도 모자랄 판에 복지부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게임 산업과 콘텐츠 강국인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 날림 처리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국회, WHO 질병코드 '임의성' 명문화 추진
국회가 WHO 질병코드의 임의성을 명문화하면서 구속력이 완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강 의원은 지난해 7월 한국형 표준분류를 작성할 때 국제질병코드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참고하도록 하는 내용의 통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지난해 11월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회부돼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개정안에서는 또 전문가와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국제질병코드 반영 여부 등을 결정하도록 했다. 표준분류는 통계 작성뿐 아니라 정책 입안과 집행에도 반영돼 민간 부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개정안은 의견수렴의 구속력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강 의원은 게임 질병코드 민관협의체의 협의안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려면 통계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행대로라면 WHO 게임 질병코드가 국내에서 강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 때문이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KCD가 WHO 질병코드에 과도하게 기속되지 않을 근거가 생긴다.
통계청 관계자는 <블로터>와의 통화에서 “통계청은 그동안 WHO 질병코드를 KCD에 계속 반영해왔다“며 “WHO 규정의 임의성과 국내법의 강제성은 법률 해석의 문제로 별도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통계청은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 여부를 결정한 바 없으며, 민관협의체를 통해 질병코드 등재 입장을 주장한 바도 없다”며 “국내 여건과 상황을 감안한다는 분류체계 운영 방향을 유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아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