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처음부터 국보1호? 일제땐 보물1호[김규회의 뒤집어보는 상식]

2025. 2. 10. 09:1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 1일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큰불이 발생해 3·4층이 모두 전소됐다.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 방화 사건의 악몽이 떠올랐다.

일제는 1934년 8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으로 숭례문(당시는 경성 남대문)에 보물 1호를, 동대문에 보물 2호를 부여했다.

정부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숭례문을 국보 1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흥인지문을 보물 1호로 각각 지정했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김규회의 뒤집어보는 상식

지난 1일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큰불이 발생해 3·4층이 모두 전소됐다.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 방화 사건의 악몽이 떠올랐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동쪽 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 문인 돈의문(敦義門), 남쪽 문인 숭례문(崇禮門), 북쪽 문인 숙정문(肅靖門) 등 4대문이 있었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 단연 최고다. 이 중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남대문, 동대문으로도 불렸다.

숭례문은 1395년(태조 4년) 때 착공해 1398년(태조 7년) 완공됐고,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크게 고쳐졌다. 일제는 1907년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가 방한하자 “대일본의 황태자가 약소국 조선의 정문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치욕”이라며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헐어냈다. 대신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찻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숭례문 파괴를 계속했다.

숭례문은 현존하는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고, 조선 건축의 전형적인 미학을 담고 있다. 숭례문은 처음부터 국보 1호였을까. 일제는 1933년 처음으로 국보 지정 제도를 도입했다. 국보 명칭은 일본 문화재에만 적용했다. 우리 문화재에는 국보 대신 보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주권을 잃은 식민지 조선이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보를 지정하지 않았다. 일제는 1934년 8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으로 숭례문(당시는 경성 남대문)에 보물 1호를, 동대문에 보물 2호를 부여했다. 보물 1호 숭례문은 당시 일제가 숭례문의 가치를 특별히 평가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편의상 붙인 번호였다.

정부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숭례문을 국보 1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흥인지문을 보물 1호로 각각 지정했다.

도서관닷컴 대표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