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뉴스타파] 5월의 빛과 어둠, 두 형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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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에게 '오월'은 상처와 아픔이다.
아흔 살 강해중 씨는 1980년 5월 23일 공수부대의 주남마을 총격 사건 때 두 눈을 잃었다.
1980년 5월 20일 밤, 정귀순 씨의 남편은 총소리가 나자 광주역으로 달려갔다 총에 맞아 숨졌다.
5월 20일 그날 밤, 광주역에 있던 한 공수부대원은 자신이 총을 쏴 상해를 입힌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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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에게 ‘오월’은 상처와 아픔이다.
아흔 살 강해중 씨는 1980년 5월 23일 공수부대의 주남마을 총격 사건 때 두 눈을 잃었다. 온 가족이 화순으로 피난 가던 중 계엄군이 쏜 총알에 눈을 다쳤고, 가족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1980년 5월 20일 밤, 정귀순 씨의 남편은 총소리가 나자 광주역으로 달려갔다 총에 맞아 숨졌다. 남편을 잃은 정 씨는 혼자 어린 자식을 키우면서 안 해 본 장사가 없다. 그는 남편 목숨을 앗아간 계엄군의 사과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죽은 남편이 살아올 리 없고, 신산했던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5월 20일 그날 밤, 광주역에 있던 한 공수부대원은 자신이 총을 쏴 상해를 입힌 사람을 찾고 있다. 당시 공수특전여단 중사 김귀삼 씨다. 그의 고향은 광주. 하지만 명령에 따라 출동했다. 동료 부대원에게 붙잡힌 교련복을 입은 앳된 고등학생을 몰래 풀어주기도 했다. 군 전역 후 김 씨는 고향 광주를 떠나야만 했다.
고향을 등진 지 43년 만에 김귀삼 씨는 그날 그 자리를 찾았다. 전남대학교와 옛 광주교도소, 그리고 광주역이다. 그날 거기에서 김 씨와 계엄군들은 시민들에게 총칼을 휘둘렀다. 김 씨는 상해를 가한 시민들을 만나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43년 전 군복과 총을 멘 김 씨와 달리, 그의 형들과 동생은 시민군이었다. 동생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했고,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갔다. 그때 후유증으로 동생은 머리, 코, 치아, 허리 등 성한 곳이 없다. 동생은 5·18 유공자가 되지 못했고, 지금은 노동일을 하며 살고 있다.
김귀삼 씨가 불편한 몸으로 순탄치 않은 살아야 했던 동생을 만나러 배를 타고 신의도를 찾았다.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계엄군과 시민군이었던 탓에 명절 때도 눈길을 피했던 사이였다.
43년간 서먹했던 두 형제는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서로의 응어리진 상처를 확인하고 보듬는다. 그리고 가족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격변의 역사의 무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아 온 두 형제의 화해는 어디서부터 비롯돼야 할까? 43년 만에 동생의 상흔을 본 형은 이제 동생의 5·18 유공자 등록을 위해 자료 수집에 나서기 시작했다. 광주 사람들에게 ‘오월’은 상처와 아픔이 아닌 화해와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뉴스타파 목격자들 witness@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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