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선 왜 한글을 안 알려줄까 [김유나의 풀어쓰는 교육 키워드]

김유나 2023. 3. 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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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3∼5세 교육기반 ‘누리과정’
유아·놀이중심 따라 직접적 교육 금지
부모들 “취학 직전엔 가르쳐야” 입장
누리과정, 교육격차 야기 수단 우려도

“오늘 뭐 했어?” 올해 한국 나이로 6살인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자녀를 유치원·어린이집에 보낸 부모는 아이가 종일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기관에서 보내 준 사진 속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하고,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큰 의미 없이 노는 것 같지만, 이런 활동도 모두 미리 짜인 커리큘럼 틀 안에서 계획된 것들입니다. 국가가 만든 5∼7세(만 3∼5세) 공통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입니다.

누리과정은 유치원·어린이집의 교육격차를 줄이려는 취지에서 2012년 도입됐습니다. ‘유보통합(유치원·어린이집 통합)’의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죠. 5개 영역(신체운동·건강,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경험, 자연탐구)으로 나뉘고, 영역별로 경험해야 할 세부내용도 59개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서울 한 어린이집으로 등원하고 있다. 뉴시스
큰 방향은 ‘유아·놀이중심’입니다. ‘놀면서 성장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누리과정은 직접적인 한글 교육도 금지됩니다. 누리과정 해설서는 “글자 모양 따라 쓰기, 자·모음 외우고 반복해 쓰기 등 글자수업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초등학교의 ‘한글책임교육’과도 연결됩니다. 교육부는 아이들이 한글을 모른 채 입학했다는 것을 전제로 ‘연필 잡는 것부터’ 가르친다는 입장입니다.

현장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실제 초등학교 교사에게 물어보면 입학생 중 글을 읽지 못하는 비율은 10∼20%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입학 전 한글을 어느 정도 익혀야 학교생활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한글 수업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학년 수학 교과서는 ‘수 세기’부터 시작하는데, 당장 숫자 ‘1’과 글자 ‘하나·일’을 연결하라고 요구합니다. “빨간 공책은 위에서 몇 번째일까?”란 문장형 문제도 있습니다. 문제를 읽는 아이와, 교사가 읽어주는 것을 귀로 듣기만 하는 아이의 학습 환경이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관에 따른 편차가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공립유치원은 누리과정을 충실히 따라 한글 교육을 하지 않는 반면 대부분의 사립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원장·교사 재량에 따라 한글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여력이 되는 아이들은 사실 어느 기관에 다니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집에서 알려주거나 사교육에 맡기면 되니까요. 하지만 따로 배울 형편이 안되는 아이들은 어떨까요. 

결국 취학 전 다닌 기관과 가정환경에 따라 한글 습득 수준에 차이가 나고, 이런 차이가 학교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한글을 모른 채 학교에 간 아이는 교과서를 보고 위축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공교육 진입과 동시에 교육격차가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지난 1월 30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룸에서 유보통합 추진 방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모들 사이에선 7세 후반기 몇달 만이라도 한글 교육이 가능하게 해 누리과정과 학교 교육을 매끄럽게 이어달라는 목소리가 큽니다. 다른 교과서 없이 온전히 한글 교육만 할 수 있는 ‘취학 직전’ 시기를 입학 준비 기간으로 활용해달라는 것입니다.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의견을 전달하자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그 시기 아이들은 학습보다 놀이중심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과학적 기반이 있다. 학부모 판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는 “학부모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한글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는 ‘전문가 의견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오히려 부모를 교육해야 한다는 얘기였죠. 하지만 저는 이 부총리야말로 현장 걱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 아이가 학교에 간 지인은 아이가 남들보다 뛰어나길 바라서가 아니라, 수업시간에 자신감을 잃고 뒤처질까 걱정돼 한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지인은 입학 전 교사로부터 ‘한글을 어느 정도 공부시키고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현재 초등학교 중 반 인원이 20명이 넘는 곳도 많아 ‘학교만 믿고 있다가는 큰일 난다’는 인식이 큽니다. 이런 조바심이 과연 부모의 욕심일까요? 정말 학교만 믿고 있어도 될까요? 정부는 지난해 취학연령을 1년 낮추는 ‘만 5세 입학’도 꺼낸 적 있습니다. 정부도 7살에게 현재 1학년에게 하는 교육, 즉 한글 교육을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일상회복 속에 '코로나 세대'의 학습결손 우려가 커지면서 지난 2022년 사교육비 총액이 역대 최고치인 26조원을 기록했다. 중·고등학생보다는 초등학생, 영어·수학보다는 국어과목의 사교육비 증가세가 가팔랐다. 사진은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연합뉴스
지난해 사교육비 지출이 역대 최대란 통계가 나왔습니다. 사교육은 ‘공교육만으로 안된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정부는 유보통합을 추진하며 내년까지 누리과정 개정안도 마련한다는 계획입니다. 이번 개정은 좀 더 현장 목소리가 반영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길 기대합니다. 교육격차를 줄이기 위해 도입된 누리과정이 교육격차를 야기하는 수단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이런 곳에서 자랍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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