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화려했다" 메인보드 컬러 이야기
난 뭐든지 예쁜 게 좋다. 아직 새 천년이 오기 전, 신문선 아저씨가 “천 원 더!”를 외치며 광고하던 옥션을 통해 전자상거래로 구입했던 메인보드도 마찬가지였다. 내 기준에 메인보드는 PC를 열었을 때 가장 면적이 넓은 부품이어서 색깔이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성능이든지 제조사의 신뢰도라든지 가격을 보고 사는 게 정상이라 하지만, 난 뭐든지 예쁜 게 좋은 사람이라 메인보드도 색깔을 보고 골랐었다. 그래서 항상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메인보드를 색깔 보고 사니?"
지금에야 검정과 흰색, 딱 두 가지로 통일되어 약간의 미니멀리즘이 대유행이라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 당시 메인보드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형형색색 총천연색 컬러로 출시되어 눈으로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지금은 흔해진 LED 쿨링팬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PC 내부의 컬러를 연출하려면 각 부품의 PCB 기판 색깔이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더불어 현재는 인텔과 AMD로 양분되는 메인보드 칩셋이 그 당시엔 VIA, 엔비디아(nForce), SiS 등 거의 춘추전국시대 수준이었기 때문에 다채로운 PCB 기판의 컬러와 함께 무궁무진한 조합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성비, 성능, 제조사의 신뢰도를 넘는 PCB 컬러만 줄 수 있는 무언가 'F'만의 감성이 존재한 것이다. 하여,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더 진행되기 전에 찬란하고 화려했던 메인보드의 컬러를 회상해보려한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구닥다리 메인보드도 많지만, 딱히 화려한 제품이 없어 색깔별로 생각나는 제조사와 몇몇 에피소드들을 적어보겠다. 참고로 개인적인 기억에 의한 서술이니 반박시 당신 말이 100% 맞다.
(1) 압구정동에만 오렌지족이 있나? 메인보드도 오렌지!
ABIT라는 대만의 메인보드 제조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ABIT는 한 때 ASUS와 AOpen과 더불어 메인보드계의 3A라 불리던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빅빔과 MSD가 수입, 유통을 담당했었다. 수많은 ABIT 메인보드 중 단연 돋보이는 메인보드는 2005년 정도에 유통되던, PCB 기판이 무려 오렌지색, 혹은 주황색이었던 소켓 939 메인보드들이었다.
소켓 939 메인보드는 AMD Athlon64(FX/X2) 계열 CPU를 탑재할 수 있었고 DDR400/333/266 메모리를 장착했다. 위 사진은 엔비디아가 제조한 nForce4 칩셋을 탑재한 KN8 ULTRA 제품이다. DDR5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DDR1의 숫자가 참 적어 보이기도 하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메인보드 칩셋에 작은 쿨링팬을, 그것도 PCB 기판과 컬러를 맞춰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다.
몇 년전 회사 창고를 정리하면서 ABIT 오렌지색 메인보드를 몇 개 발견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워낙에 독특한 PCB 컬러라 찾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데, 당근을 잘 뒤져봐야겠다. 같이 발견한 SUMA. REXTECH 그래픽카드도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일까? 아니면 거지 근성?
(2) 나에게 녹색 기판은 신뢰 그 자체였다. Tyan과 Supermicro
필자는 대학시절 영상 제작이 전공이었다. 당시만 해도 영상 제작은 공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이 만나는 융합 기술처럼 대우받았으며, 그만큼 정부 지원도 엄청난 규모였다. 하여 담당 교수님께 미션을 받았으니, 바로 어도비 프리미어 5.0을 구동시킬 수 있는 영상 편집용 PC를 맞추라는 것! 문과 출신이 99%인 학과에서 PC를 조립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아직 군대에 묶여있는 2학년 후배를 제외하면 예비역 복학생 필자밖에 없었다.
당시 영상 편집 PC는 Winodws 2000 server를 깔고 소켓 370 규격 Tyan Thunder S2518 정도로 주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CPU처럼 코어가 나뉘어 멀티 쓰레딩이 되지만, 펜티엄 3는 아예 CPU를 2개 달아 영상 처리를 분담했었다. Tyan은 이런 멀티 CPU 전용 보드를 여러 시리즈로 내놔 서버, 워크스테이션 구성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는데, 가격도 무척 비싸 구입할 때 수많은 해외 사이트와 매뉴얼 등을 참고했던게 기억난다. 대항마로 Supermicro 보드도 있었는데, 역시 PCB 기판이 녹색이었다.
매트록스 그래픽카드로 뚱뚱한 CRT 모니터 2개를 연결해 모니터도 듀얼, CPU도 듀얼인 당대 최고 사양의 영상 편집 워크스테이션이 탄생했으니, 녹색 기판이 주는 신뢰성은 젊은 필자에겐 정말 큰 정신적 자산이자 뿌듯한 대학시절 업적으로 남은 것이다. 같이 작업했던 모든 학우들은 역시... 학부형들이 되어서 연락도 잘 안된다. 다들 잘 지내지?
(3) 가장 없어 보이지만(?) 가장 많이 보였던 갈색 메인보드
시간이 좀 흐르면 전 세계적으로 PC 인프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양산형 메인보드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시기가 도래한다. 당시 가장 많이 찍혀 나왔던 메인보드, 특히 저가형이나 보급형 브랜드는 갈색 PCB 기판을 많이 사용했다. 덕분에 약간 없어 보이는 불쌍한 이미지로 전락했지만, 한 푼 두 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최신형 펜티엄 4 PC를 맞추는데 갈색 메인보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기억나는 모델은 인텔 865PE 칩셋을 탑재한 소켓 478 보드 ASUS P4P800이다. 노스 브리지와 사우스 브리지가 분리되었던 시기라 칩셋이 두 개 배치된 게 눈에 띈다. 노스 브리지는 82865PE, 사우스 브리지는 ICH5R로 기억된다. 또한, 지금이야 그래픽 카드는 당연히 PCIe 슬롯에 연결하지만, 무려 AGP 슬롯이 어두운 포스를 풍기며 메인보드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ASUS P4P800이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필자가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고 처음으로 맞춘 PC의 메인보드라는 것. 특히 주말 자취방에서 좌식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OO사 파워가 터지는 바람에 같이 사망한 메인보드라는 것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보상은 못 받았다.
(4) 강렬합니다, 강렬하고요~ 강렬하겠습니다!
한때 탤런트 최불암 선생이 홍삼 관련 제품을 광고하면서 빨간색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PC 판에도 본격적인 제조사, 유통사간 경쟁이 펼쳐지며 제품 본연의 성능 외에 컬러로 승부를 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그리운 이름 유니텍이다. 레전드라는 시리즈로 상당한 인기를 얻은 유니텍의 메인보드는 일단 기본이 강렬한 빨간색이 많았다. 거기에 램 접속부, PCIe 슬롯 등 플라스틱으로 부착되는 파츠의 컬러까지 더 강렬한 노란색, 주황색으로 마감해 휘황찬란한 컬러풀 메인보드의 전성기를 열었다 해도 무방하다.
물론 빨간색 PCB 기반 메인보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안정적인(?) 블루 계열 PCB에 플라스틱 파츠만 화려하게 부착해 밸런스를 맞춘 제품도 많았다. 또한, 유니텍은 최근의 유행을 미리 알아차렸는지(?) 블랙 계열 PCB에 빨간색 파츠로, 이른바 '검빨' 조합을 이룬 제품도 선보여 메인보드 컬러 매칭에 미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평판을 받았었다. 아쉽게도 유니텍은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시작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돌입하며 결국 2011년 완전히 사업을 접고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5) 대놓고 컬러질은 관뒀고요, 이제 콘셉질입니다.
화려한 컬러 메인보드의 유행이 점차 사그러든 후 메이저 제조사들은 자신들만의 고유 컬러를 정해 PCB 기반 전체를 물들이기보다는 LED나 심플한 장식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기가바이트 G1 시리즈는 검은색 기반을 기본으로 빨간색이나 오렌지색 파츠에 알루미늄 쉴딩 처리로 약간 차가우면서 사이버틱한 분위기를 냈다.
ASUS는 라인업마다 다르지만, 최상위 제품의 경우 역시나 검은색 PCB 기판으로 중후한 분위기를 내며 간혹 포인트를 빨간색 파츠로 주는 방향을 선택했다. 프라임 계열은 그냥 방열판 정도만 흰색으로 마감한 정도? 이제는 ASUS AURA SYNC 같은 LED로 분위기를 내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선 느낌이 강하다.
메인보드 연구소, ASRock은 M.2 SSD 방열판이나 다른 부분을 보라색 같은 독특한 컬러로 주는 모험을 아직도 하고는 있다. 크리에이티브 작업에 특화되거나 제품 콘셉트 자체를 특이하게 잡은 경우 메인보드 컬러나 도안을 그림 그리듯이 내곤 하는데, 역시 예전만큼의 화려하고 강렬한 이미지엔 미치지 못한다.
(6) 그립지만, 어찌보면 쓸데없는 메인보드의 컬러
지금도 사무실 한구석, 몰래 숨겨둔 종이 박스에 알록달록한 옛날 메인보드 몇몇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에야 고철 수준이라 늘 짐이 되긴 하지만, 화려했던 그 시절의 영광을 도저히 잊지 못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메인보드는 성능만 좋았으면 됐지 무슨 컬러가 중요하겠는가? 요즘은 메인보드 고유의 색깔보다 이제 추가로 구매해 차원이 다른 화려함으로 이끄는 LED가 더 절정기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고철 메인보드들을 버리진 않겠다. 소중한 기억세포들의 증거이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가장 예쁜 메인보드의 색깔은 무엇이었나?
기획, 글, 편집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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