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규제에서 시작된 반도체 독립의 길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한국 산업계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종 —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 를 전략물자로 지정해 수출 허가를 제한했다. 수입 비중이 80%를 넘던 한국 기업들에게 이는 사실상 기술적 ‘목줄’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전환의 계기가 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솔브레인, SK머티리얼즈, 한솔케미칼 등 주요 기업과 정부 연구기관이 즉각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 긴급 로드맵’을 수립했고, R&D 투자와 품질 검증체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가동됐다. “3년 내 공급망 자립”을 목표로 한 이 프로젝트는 2025년 현재, 일본 의존도를 10% 이하로 줄이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 3년 만에 자립
가장 먼저 변화한 것은 반도체 세정·식각 공정의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HF)였다. 일본산 고순도 제품만 사용하던 한국 메모리업계는 2022년까지 국산 99.999999999% 고순도 (일명 ‘11 Nine’ 등급)의 액체형 HF를 양산하는 데 성공했고, 2023년부터 기체형 HF까지 라인 적용이 검증됐다. 솔브레인 및 이엔에프테크놀로지는 원료 생산부터 정제 · 운송 공정까지 국내 공장을 완비해 ‘불화수소 완전 국산화’ 선언을 이끌었다. 포토레지스트 분야에서도 대체선 확보가 빨랐다. 삼성전자는 ASML의 EUV 장비와 호환되는 EUV용 PR소재를 벨기에 JSR·독일 BASF 등과 공동개발했고, 2024년에는 국산 EUV용 PR 시제품을 국내 라인에 적용하며 “일본 독점 공정 탈피”를 공식화했다.

‘소부장 2.0’ — 국산화가 산업 체질로 확장되다
단기 대응이 성공하자 정부는 2022년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전략”을 통해 2030년까지 소재 자립률 50%를 달성하고, 340조 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은 단순한 ‘소재 국산화’가 아니라 공급망 관리 체계의 자립이었다. 각 소재 기업이 품질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는 공용 DB, 국제 계측 표준 공인 랩을 구축했고, 반도체 클러스터(용인 트리니티팹·기흥 반도체벨트) 내에 국산 소재 인증·테스트베드 시설이 연계되었다. 덕분에 국산 소재의 칩 라인 적용 리드타임이 기존 18개월 에서 6개월로 단축됐다. 기술뿐 아니라 품질 검증·납기 관리 까지 한국형 표준 프로세스로 구축된 셈이다.

장비와 시스템으로 확대…‘Made in Korea Line’ 탄생
2025년 현재 국산 반도체 소재 자립률은 40% 를 넘겼으며, 공정 장비 국산화율은 20% 수준까지 올랐다. 특히 식각 · 세정 · 증착 장비에서 램리서치 · 도쿄일렉트론 대체형 국산 라인이 구현됐다. 한화시스템과 원익IPS가 참여한 ‘K-ALD 공정장비 프로젝트’는 EUV 공정용 플라즈마 제어 기술을 독자개발하며 ‘국산 EUV 공정 패키지’의 청사진을 완성했다. 웨이퍼 세정의 심장인 고순도 초순수(UPW) 시스템도 LG사이언스파크 설비에 국산 센서와 밸브 시스템이 적용되며 ‘100% 내재화’ 판정을 받았다. 삼성전자 평택 P3라인, SK하이닉스 용인 신공장에는 이제 “Made in Korea Line” 스티커가 붙은 소재·장비가 병용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재편 – 일본이 ‘고립’되다
흥미로운 변화는 수출시장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소재 수출은 2024년부터 2연속 감소했으며, 반대로 한국산 소재 기업들은 대만 · 미국 · 유럽 공급망에 진입했다. 불화수소를 국내에서 공급받던 TSMC와 마이크론 일부 라인이 한국 공급망으로 전환하면서 ‘포스트 일본’ 의 기류가 가속화되었다. 반도체 무역 의존도 역전은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한국 소재기업들의 품질 스펙은 이제 “국제 레퍼런스 레벨” 로 인정받아, 한솔케미칼은 과산화수소 국제 납품 1위, ENF테크놀로지는 반도체 용제 점유율 세계 2위로 올랐다. PwC 리포트는 이 변화를 “일본 규제가 한국 기술 독립을 가속화시킨 아이러니”라 분석했다.

기술 독립에서 산업 주도의 시대로
2019년 위기 때 일본은 “한국은 수년간 우리 기술 없이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3년 만에 한국은 자립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새로운 표준 제정국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국산 EUV급 감광액, 고순도 불화수소, 웨이퍼 세정 시스템, AI 반도체 패키징 기술은 ‘K-소부장 연합’ 을 통해 세트로 수출되고 있다. 소재·장비·공정 엔지니어가 한 팀처럼 움직이며, 데이터 플랫폼으로 공급망을 관리하는 시스템 혁신이 그 핵심이다. 한국의 소재 기업들은 이제 “국산 대체재”가 아니라 “글로벌 표준 생산자”로 불린다.
2019년의 수출 규제는 분명한 도발이었지만, 2025년의 결과는 분명하다. 일본이 닫은 문 안에서 한국은 길을 새로 냈다. 이제 ‘의존의 시대’는 끝났고, 한국은 3년 만에 “배우는 나라”에서 “가르치는 나라”로 변했다 — 세계가 공급망을 재편할 때, 한국은 첫 페이지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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