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주역, 보한재 신숙주

‘숙주나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전기의 정치가였고 언어학자였으며 외교관이었다.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숙주가 태어난 곳은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이다.


신숙주는 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에 올라온다. 어린 시절 그는 비범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려서부터 기상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1439년(세종 21) 문과에 급제했는데,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 평균 연령이 30대 후반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신숙주의 과거 급제는 매우 빨랐다.
- 훈민정음 창제의 1등공신
집현전 시절 신숙주는 책을 읽으려고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책벌레였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세종이 이를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덮어줬다는 일화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이 편찬한 수필집 ‘필원잡기’에 전한다.
실제로 세종은 독서광이었던 신숙주를 훈민정음 창제에 투입한다.


그가 어느 정도 한글 창제에 관여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실록 등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다.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현로·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다”는 실록 기록도 그중 하나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세종 27)에는 세종의 명을 받은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산과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기 위해 요동에 유배와 있던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명나라 황찬(黃瓚)을 13번이나 만났다는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이나 ‘신도비문’ 등에 나온다.
세종실록은 신숙주와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간 사건을 간단하게만 기록해 놓았는데 성종실록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
성종 때인 1487년 이창신이 “세종조에 신숙주·성삼문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묻게 하여 ‘홍무정운’과 ‘사성통고’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자 훈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황찬을 만났지만, 특히 신숙주의 언어에 대한 해득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황찬은 신숙주의 현명한 지혜에 감탄해 세상에 보기 드문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희현당(希賢堂)이란 호까지 지어준다.
1446년(세종 28)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그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이 간행된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세종의 서문과 예의(例義), 신숙주·최항·성삼문·박팽년·이개·이현로·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과 강희안이 쓴 해례(解例), 정인지의 해례 서(解例序)로 돼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해례를 쓴 인물들이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인물들인데, 여기에 신숙주의 이름이 최항·성삼문 등과 함께 올라 있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해례본을 비롯, ‘운회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은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책들 모두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분은 신숙주가 유일하다.
이는 신숙주가 한글 창제와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신숙주가 한글 창제의 1등 공신임은 1971년 한글학회에서 신숙주의 묘 앞에 ‘한글 창제 사적비’를 세웠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숙주는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고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 등도 두루 구사할 줄 아는 언어의 천재였다.
-계해약조를 성사시키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에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면서, 신숙주는 조선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된다.
신숙주가 일본에 도착하자 신숙주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가 감탄했다.
일본에 간 신숙주, 일본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는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을 남기는데, 견문록은 일본 이해의 필독서가 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완성된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대마도에 들러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의 규모를 정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다.
성종실록에 보이는 신숙주의 졸기에 계해약조 체결에 관한 내용이 다음처럼 실려 있다. “돌아올 때 대마도에 이르러서, 우리나라가 도주(島主, 대마도의 영주)와 더불어 세견선의 수를 약정하려고 하는데, 도주가 아랫사람들에게 오도(誤導)되어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이를 듣고 신숙주가 도주에게 말하기를,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갈 것이요, 아랫사람에게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며, 수를 정하지 아니하면 아랫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도주에게 의뢰하겠는가?’라고 하니, 도주가 드디어 약속을 정하였다.”
그는 문장으로 명나라 사신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했다.
1450년(세종 32) 명나라 사신인 예겸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여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에 짧다고 무시한다. 이에 신숙주와 성삼문이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예겸은 신숙주의 뛰어난 시 솜씨에 반해 의형제를 맺는다. 예겸은 1451년(문종 1) 다시 조선을 찾았고,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 수양대군의 서장관이 되다
세종의 대를 이은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사망한다. 이어 왕위를 이은 분이 13세의 어린 왕 단종이다. 단종이 왕위를 잇자,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린 분이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었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고명(誥命)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다. 그리고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삼는다. 귀국 후 신숙주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곧이어 우승지가 된다. 이듬해인 1453년(단종 1) 4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되기도 했다.
계유정난 이후 신숙주의 출세는 날개를 단다. 계유정난 이듬해인 1454년(단종 2)에는 승정원 도승지가 되고, 세조가 즉위하면서는 좌익공신(佐翼功臣) 및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진 뒤 정2품 관직인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다.
세조의 책봉 고명을 성사시킨 공으로 황금과 토지, 노비, 안마(鞍馬) 등을 하사받았으며, 병조판서에 오른다. 그리고 연이어 종1품직인 의정부 우찬성, 정1품직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이때가 1462년(세조 8)으로, 그의 나이 45세였다.
신숙주의 영예는 세조 이후에도 계속된다. 예종 대에 남이의 옥사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됐고,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을 추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된다. 그리고 또 영의정에 임명된다.
신숙주가 사망하자 조정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는 세조의 남자였지만, 그의 위패는 성종의 묘정(廟庭, 사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
- ‘숙주나물’의 설화가 만들어지다
신숙주가 변절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단종의 복권과 관련이 있다.
단종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했다가, 성삼문 등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신숙주 등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된 후 사사된다. 폐위된 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 중종 때 사림들에 의해 복권을 위한 상소가 올려지지만 거절된 후, 250여 년 만인 1698년(숙종 24)에야 복권된다.
복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지, 세조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명분이 이러하니, 단종의 폐위와 죽음에 대한 책임을 세조 대신 누군가는 져야 했다. 그 대타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음에도 세조 편에 서서 단종 폐위를 주창한 신숙주였다. 그래서 신숙주의 변절을 비난하는 글과 소설들이 씌여졌고, ‘숙주나물’ 등 민간에서도 변절과 관련된 설화들이 만들어진다.
신숙주를 변절의 상징으로 만든 글이 생육신 남효온이 쓴 ‘육신전’과 이광수가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역사소설 ‘단종애사’다. 그리고 민간에서 만들어진 설화 중 압권은 ‘숙주나물’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다.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집현전 선배 최항·정창손 등은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더 가혹하다.

신숙주가 유능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군주를 배신한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평가는 신숙주가 짊어지고 역사에서 살아가야 하는 짐일 수밖에 없다. 신숙주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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