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선동열과 최동원’을 넘은 두산 외국인투수들의 성공기

조회수 2024. 4. 19. 22: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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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팬알백] ㊼3년 연속 외국인 다승왕 & ‘쿠바 특급’ 미란다 225K 신기록!

2021년 두산 외국인투수로 영입된 '쿠바 특급' 아리엘 미란다. 코로나19로 인해 2월에 경기도 이천의 두산베이스볼파크에서 열린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두산베어스
『미란다는 2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더블헤더 1차전에서 올 시즌 225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미란다는 1984년 전설 최동원의 한 시즌 최다 탈삼진(223개)을 넘어섰다.』 <스포츠서울 2021년 10월 24일자>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47번째 주제는 두산 왕조의 축이 된 외국인 투수들의 전성시대 이야기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연속 두산 외국인 투수가 다승왕에 오르더니, 2021년에는 쿠바 출신의 두산 외국인 투수가 KBO 레전드 최동원의 한 시즌 탈삼진 기록을 37년 만에 깨뜨려 외국인 성공 신화의 정점을 찍었다.

2019년 두산 외국인투수 조쉬 린드블럼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뒤 활짝 웃고 있다. 린드블럼은 그해 다승왕과 시즌 MVP에 올랐지만 미국으로 떠났다. ⓒ두산베어스

◆ 3년 연속 다승왕 독식 두산의 외국인 투수들

두산은 2015년부터 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대역사를 썼다. 종전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SK 와이번스(2017~2012년)와 삼성 라이온즈(2010~2015년)의 기록을 넘어서는 KBO 최초의 위업.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산 왕조’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베어스 역사상 가장 빛났던 황금기였다.

두산이 이 시기에 전성시대를 연 것은 막강한 타력과 물 샐 틈 없는 수비력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팀 마운드의 근간을 이루는 외국인 투수들의 압도적 퍼포먼스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2018년부터 2020년 3년 연속 외국인 투수들이 다승왕에 오른 것은 KBO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2018년에는 세스 후랭코프가 18승(3패)을 거두면서 다승 1위를 차지했고, 2019년에는 조쉬 린드블럼이 20승(3패) 고지에 오르며 최다승 투수가 됐다. 2020년에는 라울 알칸타라가 20승(2패) 관문을 통과하면서 또 다시 승리왕에 올랐다.

2018년 다승왕 세스 후랭코피와 가족들. 뒤로 김태형 감독이 보인다. ⓒ두산베어스

3년 연속 한 팀의 외국인 투수가 승리왕을 차지한 것은 베어스 역사뿐만 아니라 KBO 최초의 일이었다.

국내 선수를 포함해도 그동안 한 팀에서 3년 연속 최다승 투수를 배출한 것은 해태 타이거즈(1989~1991년)가 유일한 사례. 당시엔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 혼자 3년 연속 다승 1위 올랐다. 다시 말해 특정팀이 3년 연속 새 얼굴로 갈아타면서 승리왕을 배출한 것은 앞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KBO 역사에서 한 팀에서 3년 연속 다승왕을 배출한 것은 해태가 유일했다. 선동열 혼자 1989~1991년 다승왕에 올랐다. 그 이후 두산이 외국인 3명이 돌아가며 3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다. ⓒKBO

두산은 이로써 7명의 다승왕을 배출하게 됐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 박철순(24승)이 초대 다승왕에 올랐고, 두산 베어스 시대로 넘어가 2004년 게리 레스(17승), 2007년 다니엘 리오스(22승), 2016년 더스틴 니퍼트(22승)가 명맥을 이어갔다. 그리고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후랭코프~린드블럼~알칸타라가 차례로 승리왕을 차지했다.

여기에다 두산은 한 시즌 20승 투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단이 됐다. 1982년 박철순을 시작으로 2007년 리오스, 2016년 니퍼트, 2019년 린드블럼, 2020년 알칸타라까지 총 5명이 20승을 돌파했다.

KIA 타이거즈가(전신 해태 포함)가 6차례 20승 투수를 내놓았지만, 그 중 선동열이 3차례(1986년 24승, 1989년 21승, 1990년 22승) 달성한 바 있다. 타이거즈 역대 투수 중 20승을 올린 경험이 있는 투수는 선동열 외에 이상윤(1983년 20승), 양현종(2017년 20승), 헥터 노에시(2017년 20승) 등 3명. 다시 말해 타이거즈는 4명의 투수가 20승을 경험했다.

◆ 외국인 투수의 천국, 두산 베어스의 빛과 그림자

두산은 외국인 투수들의 천국으로 불렸다. 두산 유니폼만 입으면 초특급 투수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특히 린드블럼과 알칸타라는 전 소속팀인 롯데와 kt에서 던질 때보다 두산에서 더 빼어난 성적을 얻었다.

린드블럼은 2015년 롯데에 입단해 3년간 활약했는데 첫해 13승11패, 평균자책점 3.56을 기록한 것이 자신의 KBO리그 최고 성적이었다. 그러나 2018년 두산 유니폼을 입은 뒤 15승4패,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했고, 2019년 20승3패, 평균자책점 2.50으로 KBO리그 최고 투수로 우뚝 섰다.

알칸타라 역시 2019년 kt에 입단해 KBO리그에 데뷔했는데 그해 11승11패, 평균자책점 4.01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0년 두산에 둥지를 틀자마자 20승2패, 평균자책점 2.54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산은 외국인 투수들의 천국으로 주가가 치솟았다.

문제는 이러한 외국인 투수들의 초특급 활약 뒤엔 고충도 컸다는 점이다. 외국인 에이스 투수들이 몸값을 높여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 줄줄이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후랭코프는 최다승을 기록한 이듬해인 2019년 어깨 부상과 성적 부진으로 재계약에 실패한 사례지만, 린드블럼은 한국 무대를 평정한 뒤 2020년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와 3년 계약을 하면서 KBO리그를 떠났다.

그러자 두산은 kt에서 방출된 알칸타라와 계약했다. 그런데 2020년 두산에서 20승 투수로 도약한 알칸타라도 곧바로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와 계약하며 팀을 떠났다.

두산은 또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2020년 두산 투수들이 호주 스프링캠프 도중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라울 알칸타라, 유희관, 함덕주, 크리스 플렉센. 알칸타라와 플렉센은 2020시즌 후 각각 일본과 미국 무대로 떠났다. ⓒ두산베어스

◆ 알칸타라 떠난 뒤 코로나19까지…악재 속에 영입한 미란다

2020시즌 후에는 알칸타라 외에도 가을야구에서 에이스로 변신한 외국인 투수 크리스 플렉센이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로 떠났다.

두산은 외국인 투수 2명을 모두 교체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문제는 2020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외국으로 직접 건너가 선수를 살피고 계약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대만프로야구(CPBL) 중신 브라더스에서 활약하던 아리엘 미란다와 계약하게 됐다. 두산이 CPBL 출신 투수를 영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2021년 두산이 새롭게 영입한 쿠바 출신의 아리엘 미란다. ⓒ두산베어스

1989년생인 미란다는 키 188㎝, 몸무게 86㎏의 쿠바 출신 좌완 투수. 2016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빅리그 통산 44경기(선발 40경기) 13승9패, 평균자책점 4.72의 성적을 올렸다.

2018년 중반부터는 일본 프로야구(NPB)에서 뛰었다. 그해 7월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계약해 2019년까지 26경기 13승 6패, 3.3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런 다음 2020년 대만프로야구(CPBL)로 넘어가 25경기에서 10승8패, 평균자책점 3.80의 성적을 찍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 15만 달러, 연봉 55만 달러, 인센티브 10만 달러 등 총액 80만 달러였다.

하지만 미란다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았다. KBO리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CPBL에서도 압도적 성적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란다는 일본에서 뛰고 있을 때부터 관찰해 온 투수였어요. 일본 첫해에 괜찮은 투구를 해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제구가 안 되면서 대만으로 가더라고요. 대만에서 성적은 아주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저희 구단 분석팀에서는 괜찮다고 봤어요.”

당시 두산 외국인 스카우트 업무를 맡은 국제팀 남현 수석의 설명이다.

“저희는 탑(릴리스포인트)이 높은 왼손, 특히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라면 KBO리그에서 통한다고 판단했거든요.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에서 뛰었던 앤디 밴헤켄처럼 말이죠. 미란다는 제구가 관건이었지만 스트라이크존에 던질 수 있는 정도만 되면 된다고 봤어요.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우리가 출국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중에 지인이 대만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죠. 리포트를 받아 보니 KBO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계약을 하게 됐어요.”

두산은 현지로 직접 가서 새 외국인 선수를 살필 수 없는 상황이라 NPB 시절부터 관찰하고 추적해 온 미란다를 영입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선택이라 판단했다.

2021년 두산 새 외국인투수 아리엘 미란다가 3월 22일 시범경기 한화전에 등판한 뒤 고전하자 투수코치와 포수 박세혁이 마운드에 올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산베어스

◆ 퇴출 걱정하던 미란다, 최고 투수로 환골탈태

미란다는 코로나19 양성 반응을 보여 입국이 늦어졌다. 그러더니 시범경기부터 현장과 야구 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첫 등판인 3월 22일 시범경기 잠실 한화전에서 첫 등판을 했는데 0.2이닝 동안 3안타 5볼넷 7실점이라는 최악의 투구를 한 것. 아웃카운트 2개를 잡으면서 총 투구수가 59개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제구 난조를 보였다.

정규시즌 개막 이후 3선발로 시작한 미란다는 첫 등판인 4월 4일 KIA전에서 5이닝 2안타 3사사구 무실점을 승리투수가 됐다. 그러나 이후 ‘퐁당퐁당’. 호투와 부진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4월 한 달 동안 5차례 등판해 4승무패를 거두는 ‘승리요정’으로 행운을 불러오는 투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5월 시작과 함께 3연패에 빠졌다. 이때까지의 투구도 ‘퐁당퐁당’이었다. 5월 19일까지 8경기에 등판해 4승3패, 평균자책점 3.76의 그저 그런 성적표.

그런데 38.1이닝을 소화한 가운데 눈에 띄는 지표가 있었다. 그날까지 KBO리그 최다 볼넷(27개)을 내줬지만, 55탈삼진으로 리그 2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었다. 탈삼진 1위인 LG 앤드류 수아레즈가 48.1이닝을 던져 57개의 탈삼진을 기록 중이었다.

미란다는 9이닝당 볼넷이 6.34로 압도적 1위였지만, 9이닝당 탈삼진 부문에서도 12.9개로 1위였다.

미란다는 2021년 개막 이후 5월 중순까지 널뛰기 피칭을 했다. ⓒ두산베어스
“저희는 미란다가 9이닝당 볼넷이 3개 정도만 되면 훨씬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전력분석팀에서 ‘너처럼 각이 좋은 공을 던지는 좌투수는 없다’면서 자신감을 심어줬고, ‘이것저것 변화구 다 던지려고 볼 낭비할 필요가 없다’면서 직구와 포크볼 위주로 던지자고 조언을 했죠.”

남현 수석의 기억이다.

미란다는 포크볼이 좋았지만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잘 듣지 않는 변화구까지 다양하게 구사하다 볼넷을 남발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직구와 포크볼로 구종을 단순화하기로 했다. 미란다도 구단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슬라이더는 타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구종으로 활용하는 걸로 정리됐다.

그 이후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됐다. 볼넷이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10월 19일까지 19차례 추가 등판에서 10승2패, 평균자책점 1.85로 압도적 피칭을 했다.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19차례 모두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볼넷이 거의 없어졌다는 부분이 반가운 대목. 9월 25일 잠실 한화전에서 6이닝 4볼넷을 기록한 것이 최다였다. 나머지 18차례 등판에서는 모두 2볼넷 이하였다. 이 기간 9이닝당 볼넷이 1.99개로 KBO리그에서 가장 적은 투수로 환골탈태했다.

그러자 탈삼진 행진에 탄력이 붙었다. 10월 19일 대구 삼성전에서 7이닝 10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시즌 숫자를 221개로 늘렸다.

종전까지 KBO리그 역사상 한 시즌 220개 이상 탈삼진을 기록한 투수는 단 3명밖에 없었다. 1983년 장명부가 220개, 1996년 주형광이 221개, 1984년 최동원이 223개의 탈삼진을 기록한 것. 미란다는 37년 전 최동원이 작성한 뒤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역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 신화에 2개 차로 다가섰다.

2021년 10월 24일 두산 미란다가 불펜 문을 열고 마운드로 나가고 있다. 미란다는 이날 최동원이 37년 전 작성한 223탈삼진의 전설에 도전했다.

◆ 37년 전 최동원 탈삼진 신화를 넘어선 ‘쿠바 특급’

“빠른 공으로 변화구를 살리고 변화구로 빠른 공을 살리고 있다.”

KBO 역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세 자릿수 탈삼진’ 기록의 보유자인 kt 위즈 이강철 감독은 당시 미란다의 놀라운 탈삼진 퍼포먼스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10월 24일 일요일. 미란다는 잠실 라이벌 LG전에 선발등판할 예정이었다. 탈삼진 2개만 더하면 최동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3개를 추가하면 KBO 탈삼진의 새역사를 쓸 수 있는 상황.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이 미란다의 왼팔에 집중됐다.

불펜 문이 열리고, 미란다는 10월의 햇살이 내려앉은 잠실구장 마운드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더니 마운드에 주저앉아 평소처럼 땅에 승리를 부르는 글자를 새겼다. 그만의 루틴이었다.

1회초 2사 1루서 4번타자 채은성을 5구째 시속 150㎞ 빠른 공을 던져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222K!

미란다는 1996년 주형광(221탈삼진)을 3위로 밀어내고 한 시즌 탈삼진 단독 2위로 올라섰다.

2회말 1사 1루. LG 유망주 루키 이영빈을 상대로 4구째 바깥쪽 꽉 찬 직구(시속 149㎞)를 던져 루킹 삼진으로 잡아냈다.

223K!

최동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KBO 단일 시즌 탈삼진 공동 1위가 되는 순간이었다.

두산 미란다가 2021년 223탈삼진으로 1984년 최동원이 작성한 기록과 타이가 되자 잠실구장 전광판이 이를 알리고 있다. ⓒ두산베어스

두산이 2회말 2점을 선취한 가운데 미란다는 3회초 다시 마운드에 섰다. 선두타자 이성우를 2루수 땅볼로 처리하면서 1아웃.

타석에는 KBO리그에서 선구안이 좋기로 소문난 1번타자 홍창기. 1회 첫 타석에서는 중견수플라이로 잡아냈지만, 전날까지 미란다를 상대로 시즌 7타수 3안타로 4볼넷으로 강했던 까다로운 타자였다. 홍창기는 평소보다 배트를 짧게 잡고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 볼, 3구 파울. 볼카운트 1B-2S로 유리해진 상황. 미란다는 포수 박세혁의 사인에 맞춰 4구째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서 폭포수처럼 낮게 떨어지는 날카로운 포크볼을 던졌다. 홍창기의 방망이가 돌았지만 헛스윙.

미란다가 3회초 LG 홍창기를 상대로 삼진을 잡고 역사적인 시즌 224탈삼진 신기록을 작성하자 전광판에서 이를 알려주고 있다. 마침내 최동원의 전설이 37년 만에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두산베어스
“여기서 헛스윙 삼진! 224K째! 시즌 전 자신을 둘러싼 물음표 이제는 없습니다.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신기록! 224번째 탈삼진을 새기는 아리엘 미란다입니다.”

37년 전 세워진 최동원의 전설을 밀어내고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 순간, 이날 경기를 중계한 스포티비 이승현 캐스터는 역사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여 신기록 달성을 알렸다.

“삼진을 가장 잡기 어려운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거잖아요.”

옆에 있던 ‘캐넌히터’ 김재현 해설위원도 “정말 멋있는 선수”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고 최동원의 현역 선수 시절 모습. 2021년 미란다는 1984년 최동원이 작성한 223탈삼진의 전설을 넘어섰다. ⓒKBO

‘224K KBO 한 시즌 역대 최다 탈삼진’

잠실구장 전광판에 신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문구가 뜨자 역사의 현장을 찾은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두산 덕아웃의 동료들도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KBO리그 탈삼진 역사와 최동원의 전설을 전해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미란다는 1루 쪽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팬들에게 답례를 했다.

두산 김태형 감독이 미란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면서 KBO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축하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탈삼진 신기록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미란다는 신기록 작성 이후 갑자기 흔들렸다. 2번타자 정주현에게 2루타를 맞더니 김현수와 채은성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해 2사 만루로 몰렸다. 다행히 오지환을 2루수 땅볼로 유도해 위기를 벗어났다.

4회초 탈삼진 1개(이재원 상대)를 추가하면서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5회초 3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에 몰렸고, 결국 2실점으로 동점을 허용한 뒤 1사 1·3루 상황에서 이영하에게 마운드를 물려주고 강판했다.

4.1이닝 3안타 7볼넷 4탈삼진 2실점. 시즌 탈삼진 신기록 숫자는 225개에서 끝냈다.

볼넷 7개는 KBO리그 데뷔 후 미란다의 한 경기 최다 기록이었다. 시즌 초반 흔들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날 투구수 83개. 김태형 감독은 다음 경기와 포스트시즌 준비를 위해 미란다를 여기서 교체했다.

하지만 신기록 욕심 때문에 무리했던 것일까. 미란다는 그날부터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경기가 없는 이튿날 월요일 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피로누적’이라는 소견이 나왔지만 통증 부위가 어깨라 두산은 비상이 걸렸다. 결국 10월 26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했다.

당시 두산은 4위에 올라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치러야하는 상황. 더 큰 문제는 포스트시즌에 올라가서도 미란다의 어깨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두산은 그해 가을야구에서 다시 한번 ‘미러클 신화’를 쓰며 승승장구,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성공했다.

미란다는 한국시리즈에 가서야 겨우 엔트리에 포함됐다. 두산이 kt에 2연패를 당한 상황에서 3차전에 가을야구 첫 등판을 했다.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타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두산은 1-3으로 졌고, 미란다는 패전투수가 됐다.

두산의 기적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에이스 미란다를 1차전부터 활용하지 못하면서 한국시리즈 4연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두산 미란다는 2021년 시즌 MVP 기자단 투표에서 588점을 얻어 1위에 올랐다. 베어스 역사상 8번째 MVP 수상이었다. ⓒ두산베어스

◆ MVP, 최동원상, 골든글러브까지…두산 외국인투수 성공신화

미란다는 2021년 28경기에 등판해 14승5패, 평균자책점 2.33, 탈삼진 225개를 기록했다. 다승은 공동 4위였지만 KBO 역대 최다 탈삼진 신기록과 함께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이런 성적으로 그해 정규시즌 MVP의 영예를 안았다. 그전까지 역대 MVP를 차지한 투수 중 다승왕에 오르지 못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미란다가 그 공식을 최초로 깼다. 그만큼 그해 미란다의 퍼포먼스는 압도적이었다.

두산은 이로써 8번째 정규시즌 MVP를 배출했다.

1982년 박철순(투수), 1995년 김상호(외야수), 1998년 타이론 우즈(1루수), 2007년 다니엘 리오스(투수), 2016년 더스틴 니퍼트(투수), 2018년 김재환(외야수), 2019년 린드블럼(투수), 2021년 미란다(투수)까지 영광의 자리에 우뚝 섰다. 이들 중 왼손투수 MVP는 미란다가 최초였다.

미란다는 그해 최동원상에 이어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면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두산은 니퍼트 이후 외국인 에이스 성공 신화를 꾸준히 써왔다. 그러면서 2015년부터 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대역사를 썼다. 외국인 투수들의 지속적인 활약 없이는 불가능했을 신화였다.

이는 스카우트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미란다의 사례처럼 외국인 투수를 성공시킬 수 있는 두산만의 축적된 노하우와 환경 덕분이기도 하다.

미란다는 먼저 KBO리그에 데뷔한 같은 쿠바 출신의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를 통해 한국 무대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두산베어스

두산 국제팀 남현 수석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두산은 구장 규모가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이점이 있어요. 여기에 당대 최고의 공격력과 수비력을 갖춘 동료 야수들이 있으니까 두산 외국인 투수는 이닝만 어느 정도 끌어주면 수비와 타선의 뒷받침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어요. 미란다도 그랬지만 그 이전 린드블럼과 알칸타라도 마찬가지였어요.”

미란다가 두산에서 더 빨리 적응한 것은 같은 쿠바 출신의 외국인 타자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와 함께한 부분도 컸다.

두산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다승왕만 4차례 배출했고, 외국인 시즌 MVP도 3차례 내놓았다.

이 시기는 두산 구단의 황금기이기도 했지만, 베어스 역사에서 외국인 투수의 황금기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2021년 두산 아리엘 미란다는 최동원의 탈삼진 223개를 넘어 225개까지 기록을 연장했다. 이는 아직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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