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아첨과 아부

국어사전은 '아첨(阿諂)'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것. '아부(阿附)'는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으로 각각 정의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남의 비위를 맞추는 행동을 뜻하는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단지 아부는 상대를 칭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계산한다.
아첨과 아부는 조직과 사회를 좀먹는 '독'(毒)의 대명사로 불린다. 아부에 능한 사람은 진심보다 처세가 앞서고, 소신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한다. 마치 인간관계의 처세술로도 보인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대체로 권력을 마비시키고, 체제를 타락시키는 장치로 등장했다.
아첨과 아부는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질병이다.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달콤한 말이 넘치는 곳에 진실은 자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듣기 불편해도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다.
정치판에서의 아첨과 아부는 더 노골적이다. 공천받으려면 충성도를 증명해야 한다. 공정한 평가 대신 줄을 서고, 실력 대신 눈치를 보며, 원칙 대신 기류를 읽는다. 권력자 주변에 올바른 비판이 사라지면 자만이 들어서고, 자만이 자리 잡으면 독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권력은 본래 위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달콤한 말에는 언제나 약하다. 그래서 나라를 망치는 것은 반대파가 아니라, 권력자 곁을 떠나지 않는 아부와 아첨꾼이다. 문제는 아첨과 아부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권력 시스템의 운영 방식이 되었을 때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만들지만, 아첨과 아부가 견제 장치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아첨에 중독된 정치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용기'다. 틀렸다고 말할 용기, 위험하다고 경고할 용기, 멈추자고 제안할 수 있는 용기다. 용기가 사라지면 권력은 현실에서 고립된다. 아부는 '충성'이란 포장으로 다가오고, 아첨은 '긍정'이란 가면을 쓴다. 아부와 아첨꾼으로 주변이 채워질 때 정치는 정책이 아닌 분위기로 흘러 간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서도 "임금의 눈과 귀를 막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며 시비를 흐리는 자"를 망국(亡國)의 신하로 규정했다. 조선 연산군 시대의 비극은 폭군 한 사람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첨과 아부에 익숙한 정치 구조, 올바른 비판을 죄로 만드는 문화가 핵심이었다. 아첨이 권력의 언어가 되는 순간, 충언(忠言)은 반역이 되고 결과는 피바람이었다.
결국 권력을 망치는 것은 올바른 비판이나 반대가 아닌, 아첨과 아부다. 권력의 귀를 막고, 공동체의 입을 다물게 하는 정치적 '마취제'다. 올바른 비판에 대한 불편함을 견디는 사회만이 내일을 바꿀 수 있다.
/김명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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