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작업복 세탁소를 허하라 [전국 프리즘]


김영동 | 영남데스크
지름 2~3㎝ 정도의 원 모양으로 잘라낸 얇은 철판 2개 사이에 강성 높은 철사를 용접해 만든, 이른바 ‘게링’이라는 부품이 있다. 물건의 형틀에 쇳물을 부어 주조할 때 그 물건이 쇳물의 압력 등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고정하는 구실을 하는 게링을 만들어 우리 집은 살림을 꾸렸다. 부끄럽게도, 아직 정체와 근원을 모르는 단어다. 그저 부산 사상공단의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삼촌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게링을 만들 때 가끔 특별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른바 ‘멕끼’ 작업이다. 멕끼는 일본어로 ‘도금’이라는 뜻이다. 부모님이 바쁘실 땐 이 작업은 내 몫이었다. 작업 공정은 간단하다. 종아리까지 잠길 정도 크기의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부어 묽게 만든 염산에, 게링이 담긴 그물망을 넣는다. 게링에 붙은 먼지나 용접 티끌 등 남은 부스러기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그물망을 꺼내어 물로 헹구고, 다시 통돌이에 넣어 살짝 끈적한 묽은 유산(황산)이 담긴 또 다른 빨간 고무 대야에 담근다. 유산에 플러스·마이너스 전극을 넣고 통돌이 손잡이를 한 시간 정도 살살 돌려주면 된다. 이후 다시 물로 헹구고 탈수하면 작업이 끝난다.
하지만 아무리 묽은 염산이라고 해도, 아무리 환기를 잘해도, 그 냄새는 정말 지독하다. 그리고 게링을 담그고 꺼내는 과정에서 강한 산성의 염산과 유산은 여러 곳으로 튈 수밖에 없다. 작업복은 염산·유산이 튄 탓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구멍들로 엉망이 된다. 그래서 작업복은 다음 ‘멕끼’ 작업을 위해 물을 부은 세숫대야에 담가 두었다 빨아야 했다. 가끔 빨래가 귀찮고 피곤해 바로 세탁기에 넣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 크게 혼이 났다. 피부병 등을 앓을 수 있어 작업복은 꼭 따로 세탁해야 했기 때문이다.
30년 넘은 중학교 때 묵은 기억이 떠오른 건 동부산권 작업복 세탁소를 취재하면서다. 부산 기장군 정관농공단지의 작은 금속가공업체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는 “매일 작업복 세탁이 고민이자 걱정이다. 오염된 작업복을 가족들 옷과 함께 세탁기에 넣을 수 없지 않은가. 퇴근 후에도 이런 걸 신경 써야 하니 하루하루 피곤이 가중된다”고 전했다. 자체적으로 작업복 세탁소를 운영하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업체들은 작업복 세탁소를 운영할 형편이 안 되고, 세탁소에 오염된 작업복을 맡기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가 동부산권에 1만5천명을 넘는다. 지난해 부산노동권익센터가 동부산권 노동자 5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 작업복 세탁소의 노동자 수요조사’ 결과를 보면, 72%가 세탁소가 필요하다고 했고 80.9%가 집에서 작업복을 세탁한다고 답했다. 노동자들은 ‘위생과 건강에 대한 걱정’ ‘깨끗한 세탁의 어려움’ ‘잔존 유해물질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한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동부산지회는 2022년부터 부산시 등에 동부산권 작업복 세탁소 설치를 요구했고, 부산시와 기장군은 지난해 7월부터 작업복 세탁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세탁소가 들어설 터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시, 기장군, 노동자 등의 협의만 계속될 뿐 세탁소 건립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황인 것이다. 박병호 동부산지회장은 “부산시가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면 금방이라도 현실화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적극 행정을 부탁한다”고 요구했다.
반선호 부산시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7월 제330회 임시회 5분 발언에서 “작업복 세탁소는 노동자와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공공서비스인 만큼, 제도적 근거 마련과 단계적 확대가 필요하다. 노동의 가치는 말이 아닌 제도와 사회의 책임에서 비롯된다. 부산이 노동이 존중받는 도시로 나아가려면 이제는 구호가 아닌 실천, 선택이 아닌 책무로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권 보호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다. 올해엔 꼭, 동부산권에 작업복 세탁소가 세워지길 기대한다.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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