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의 무서운 질주…이제 미국·유럽에서도 잘 나간다[딥다이브]
유니클로 하면 어떤 이미지인가요. 가성비의 상징? 불매운동 대상? 아니면 히트텍 내복?
소비자에겐 친숙하다 못해 만만한 브랜드이지만, 기업으로 보면 그 규모가 엄청나죠. 유니클로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은 전 세계 의류 회사 중 매출 기준으론 3위, 시가총액으론 2위 기업입니다. 창업자인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은 일본 최고 부자이기도 하고요(2위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
올해 50% 가까이 오른 주가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의 성장세도 놀라운데요. 마침 10일 따끈따끈한 연간 실적 발표를 내놨습니다. 탄광마을 남성복 가게에서 탄생한 유니클로가 어떻게 세계적 의류기업으로 도약했는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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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매출 3분의 2가 해외
3조1038억엔(약 27조1500억원). 10일 패스트리테일링이 발표한 2024 회계연도(2023년 9월~2024년 8월)의 연간 매출액입니다. 전년보다 12% 증가하며 또 사상 최고 기록을 썼는데요. 창립 40년인 올해 처음 3조엔 선을 돌파한 거죠. 2013년 매출 1조엔을 기록한 뒤 11년 만에 3배로 불어났습니다.
세계 의류업계 1위인 스페인 인디텍스(자라) 매출액(359억 유로, 약 53조원)과 비교하면 아직 절반 수준이지만, 2위인 스웨덴 H&M(2360억 크로나, 약 30조6400억원)은 이제 상당히 따라잡았죠. 그래서일까요. 패스트리테일링 주가는 올해 49% 급등한 데 비해, H&M은 -3.4%의 저조한 성과를 보입니다. 인디텍스 주가 상승률은 +35%.
이제 유니클로는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의 2배 가까이 되는 진짜 글로벌 브랜드입니다. 물론 엔저 영향이 작용하긴 했는데요(같은 해외 매출도 엔화로 더 크게 잡힘). 20년 넘는 기간 동안 끈질기게 해외 시장을 공략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생각만큼 평탄하진 않았습니다.
가성비라는 무기의 탄생
유니클로의 경쟁력은 역시나 압도적인 가성비이죠. 1990년대 일본의 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꼭 필요한 것에만 지갑을 여는 최근의 ‘요노(YO-NO)’ 현상에도 오히려 성장을 가속화하는 이유인데요. 유니클로 제품은 중국·베트남·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협력공장이 위탁생산합니다. 대량 발주를 하고 이를 전량 매입하기 때문에 단가를 대폭 낮출 수 있죠. 신상품의 첫 주문 수량만 100만개 단위일 정도로 많다는데요.
품질 관리도 철저합니다. 예컨대 니트 제품의 경우 도쿄에 있는 ‘이노베이션 팩토리’에서 미리 테스트 생산을 하면서, 제조공정 관련 수백 가지 변수-뜨개질 후 세탁 시간, 온도까지-를 세세히 정해주죠. 협력업체는 똑같은 기계와 소재를 가지고 정해진 제조 공정대로 옷을 만들기 때문에 정확하게 제품을 복제해 냅니다. 아울러 일본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매주 현지 공장을 직접 찾아가 품질 관리를 하죠. 철저하고 깐깐한 공급망 관리. 그게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옷’의 배경입니다.
탄광마을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부친의 남성복 매장을 물려받았던 야나이 당시 사장이 젊은 도시 고객을 잡겠다며 던진 승부수였는데요. 직원이 고객을 일일이 응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옷을 고를 수 있게 두는 방식이 당시엔 신선해서 대박을 쳤죠. 오픈 당일부터 손님이 밀려들었고 그는 “금맥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성공적인 사업이었지만, 2년 뒤 홍콩에서 발견한 폴로셔츠 한 장이 모든 걸 바꿔놨습니다. 79홍콩달러(당시 약 1500엔)라는 저렴한 가격에 야나이는 충격을 받았죠. 그는 그 의류회사 경영자를 찾아갑니다. 바로 ‘지오다노’ 창업자 지미 라이였는데요.
지미 라이는 동남아시아 화교들이 운영하는 공장을 통해 옷을 저렴하게 생산한다고 알려줬죠. 1986년은 국제적 분업을 이용한 SPA, 즉 기획·생산·판매를 일괄로 하는 의류 소매업이란 개념을 미국 브랜드 갭(GAP)이 막 창시했던 시점인데요. ‘이 사람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야나이 사장은 기존 성공 모델을 2년 만에 완전히 버리고 아시아 공장을 돌며 섭외에 나섭니다. 진짜 유니클로의 시작이었습니다.
플리스로 만든 신화
1990년대 초 거품이 터지고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지자, 유니클로는 오히려 날개를 답니다. 1994년 7월 패스트리테일링이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자마자 주가는 공모가(7200엔)의 두배로 뛰었죠. 당시만 해도 유니클로가 전국적인 인지도는 없던 브랜드였는데도 말이죠. 참고로 지난 30년 동안의 주식 분할을 반영해 계산하면 당시 공모가는 현재의 주당 165엔 수준. 만약 공모주를 받았던 투자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가치는 311배로 불어났을 겁니다. 투자금액의 7배에 달하는 배당금까지 챙겼을 거고요.
1998년 11월, 마침내 유니클로가 도쿄에 입성합니다. 숙원사업이었던 도쿄 진출에 맞춰 야나이 사장은 야심작을 선보였죠. 바로 1900엔짜리 플리스재킷입니다. 하라주쿠점 1층이 알록달록한 플리스로 빼곡히 채워집니다. 당시 플리스 아우터는 백화점의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1만엔 넘게 팔리던 제품. 1900엔은 충격적인 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0년 전 고작 20여개 매장을 운영할 때 선언했던 ‘일본 제일’이라는 목표가 현실로 다가오던 2001년, 야나이는 다시 무모한 도전에 나섭니다. ‘다음은 세계 제일’이라며 영국에 진출하죠.
유럽과 미국에서의 도전과 시련
2001년 9월 유니클로는 영국 런던에 4개 점포를 동시 오픈합니다. 시작은 화려했죠. 개점 첫날 입장하려는 손님들이 줄을 늘어섰으니까요. 하지만 기세 좋게 21개 점포로 확장한 지 2년 만에 16곳을 문 닫았습니다. 유니클로 역사상 최악의 실패로 기록됐는데요.
실패 이유는 한마디로 유니클로가 더 이상 유니클로답지 않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나이 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분석했죠. “영국의 실패는 경영자 선택에 원인이 있었다. 현지 백화점 출신을 사장에 채용하자 보수적인 조직이 됐다. 벽을 만들지 않고 모두 함께 토론하고 실행하는 우리의 기업풍토와 거리가 멀었다. 가게는 더러웠고, 점포 사원 훈련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과한 현지화가 오히려 독이 됐던 셈입니다.
이후 미국 매장을 빠르게 확장해 갔지만, 실적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유명 디자이너와의 콜라보 제품이 패션에 민감한 뉴요커들에겐 제법 인기를 끌었지만, 일반 소비자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가격 할인을 남발하면서 적자 폭은 커져만 갑니다. ‘유니클로 옷은 서양인 체형과 피부색에 맞지 않는다, 브랜드 인지도가 너무 낮다, 미국 시장은 역시 경쟁이 치열하다, 소품종 대량생산 전략으론 승부가 어렵다….’ 유니클로가 미국에선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란 시장의 비관론이 커져만 갔죠.
코로나 팬데믹으로 뉴욕 거리에 인적마저 뜸했던 2020년 6월. 유니클로 북미 지역 책임자로 새로 부임한 츠카고시 다이스케는 미국 판매 재건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짭니다. 일단 남발하던 가격 할인은 중단합니다. 다시 고객이 정상가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기로 했죠. 점포마다 적정 재고 수준을 파악해 재고를 타이트하게 관리합니다. 미국 고객들이 유독 선호하는 크롭티셔츠와 데미지 청바지 같은 상품을 개발하고, 인기 끄는 상품은 항공편으로 긴급히 공수했죠. ‘라이프웨어(LifeWear)’, 즉 단순하지만 고품질의 일상복이라는 컨셉을 알리는 광고와 마케팅을 강화해 인지도를 끌어올립니다.
2022년 10월, 유니클로가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연간 흑자로 전환했다고 발표합니다. 미국은 진출 17년만, 유럽은 21년 만에 거둔 기록이었죠.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럽은 가장 높은 이익 성장률과 16% 안팎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효자 시장으로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야나이 회장은 “10년 뒤 매출 10조엔 돌파”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10년에 매출이 3배씩 불어난 그동안의 성장세를 이어가, 자라를 잡고 글로벌 1위 의류기업이 되겠다는 야망인데요. 그는 원래 남들이 깜짝 놀랄 만한 목표를 잡는 걸로 유명하죠. “어차피 갈 거면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입니다.
그래서 후계자는 누구?
야나이 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워커홀릭으로 유명합니다. 사실상 회사의 중장기 전략부터 매장 운영까지, 그가 다 주도하다시피 하는데요. 위험을 감수하고 1등을 향해 돌진하는 일본인답지 않은 그의 경영 스타일이 유니클로를 키운 비결로 평가받죠.
그리고 그는 좀처럼 운전대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스스로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을 3년 만에 해임하고 다시 그 자리에 앉은 사례가 있죠. 2002년 만 39세의 타마츠카 겐이치(현 일본 롯데홀딩스 CEO)를 사장으로 임명했지만, 2005년 그를 아웃시키고 본인이 다시 사장직을 맡는다고 발표해 업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가 밝힌 컴백 이유는 이거였습니다. “타마츠카는 꾸준한 성장을 원했지만, 저는 더 많은 변화와 성장을 원합니다.”
일단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겐 경영권을 넘기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10일 실적 발표회에서도 “아들에겐 경영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일반 사원이 사장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츠카고시 사장에 대해선 “당연히 유자격자”라면서도 후계자로 지목하진 않고 있습니다. 아직은 더 자신이 끌고 나갈 자신이 있단 뜻이겠죠. By.딥다이브
최근 한국 패션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유니클로 같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일본 패스트리테일링이 또다시 사상 최고의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한 해외 시장 매출과 이익이 급증하면서 매출액 3조엔 선을 넘어섰죠. 이제 다음 목표는 10년 뒤 10조엔입니다.
-탄광마을 남성복점에서 출발했던 유니클로가 국제 분업을 활용한 SPA로 거듭난 게 1986년. 1998년 도쿄 입성과 함께 출시한 플리스의 대박으로 일본 제일로 도약합니다.
-하지만 2001년 시작된 글로벌 진출에선 고전했습니다. 유럽과 북미 패션 격전지를 두드렸지만 문턱은 높았고 적자와 점포폐쇄의 늪이 이어졌죠. 하지만 과한 현지화 대신 ‘유니클로다움’을 유지하는 전략, 꾸준한 투자, 팬데믹으로 인한 평상복 시장의 부흥이 맞물리면서 이젠 유럽과 미국 시장이 성장을 주도합니다.
-카리스마 경영인 야나이 회장이 물러난 뒤에도 패스트리테일링은 이런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시장에선 누가 다음 후계자냐를 계속 묻지만 75세 야나이는 아직 이를 정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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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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