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영
[생생 디자인] 한국인의 해학이 담긴 '네이밍'
얼마 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일상에 지칠 때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나누면, 피로가 가시고 스트레스도 가신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고, 반갑게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가 챙겨온 술을 꺼낸다. 처음 보는 술이였다. 술병의 디자인도 낯설었지만, 술의 이름을 보고 그만 파안대소를 하고 말았다.
술병에는 22F 건-물-주 라고 써있다. 서민이 꿈꿔오는 그 건물주와 동일한 이름이였지만, 마지막 "주"는 아마도 "主"가 아닌 "酒"였으리라. 그러고 보니 병의 디자인은 빌딩처럼 직사각형이고 라벨 디자인 역시 빌딩이 새겨져 있었다. 22F는 술의 도수. 만든이의 유쾌한 발상에 웃음이 지어졌고, 그덕에 술자리가 내내 즐겁고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센스가 넘치는 이름이 대세인듯 하다. 편의점 술 냉장고를 지날 때마다 호기심이 든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술병들의 이름을 하나씩 읽어보는 것이 나름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캬', '건물주', '개빡', '꿀주', '오늘도 수고했어'...
누군가는 이런 이름들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술병들의 이름만 봐도 마음이 편해진다. 가끔은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 안에는 무심한 듯 놓여 있는 생활의 흔적들이 있고, 그 흔적 속엔 누군가의 위트와 배려가 숨겨져 있다.

캬
술 한 잔 마시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탄사 '캬~'를 그대로 이름으로 옮긴 맥주다. ‘캬’라는 짧고 강렬한 이름에서 오는 즉각적인 시원함과 청량감을 고객에게 직접 전달한다. 이름만 들어도 마치 얼음장처럼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 갈듯한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또 간결한 한 글자 표현이 시각적, 청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는 ‘마시는 즐거움’을 강조하는 효과를 전한다.
건물주
단순히 보면 ‘건물주’라는 부자의 꿈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건강하게 물처럼 마시는 주류’라는 중의적이고 재치 있는 뜻이 숨어 있다.
한국인의 공통적인 욕망인 '경제적 자유'와 맞닿아 있는 ‘건물주’라는 단어는 듣는 순간 피식 웃게 만든다. 동시에 가벼운 농담으로 긴장감을 풀고 술자리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병을 들어 잔에 따르면서 ‘건물주 한 잔 하자!’라고 외치는 순간, 술자리의 즐거움과 소소한 위로가 담긴 우리의 팍팍한 삶과 정서를 해학적으로 반영한 네이밍이다.
개빡
'개빡’은 속어로 ‘매우 화난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술 이름에서는 이를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준다’는 느낌을 준다.
현대인의 일상적 분노와 스트레스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과감한 접근을 하고 있다. 첫 대면에서 오는 강렬한 어감 덕분에 듣자마자 웃음이 터지면서도, 동시에 일상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술 한 잔으로 쿨하게 털어내라는 메시지가 자연스레 전달된다. 네이밍 자체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작은 의식처럼 느껴지며, 직장인이나 젊은 소비자들에게 즉각적인 공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꿀주
꿀’과 ‘술’을 결합한 단어로, 달콤한 맛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꿀맛 같은 시간’을 고객에게 약속하는 의미를 담았다. 꿀주는 달콤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일상적 즐거움의 이미지를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술을 즐기는 기분 좋은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한 ‘꿀맛’이라는 표현이 한국에서 즐겁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상징하는 만큼, 소비자들에게 달콤한 휴식과 여유로운 시간을 연상시킨다.
오늘도 수고했어
감정적 친밀감과 공감을 극대화한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가장 듣고 싶은 말인 ‘오늘도 수고했어’가 병에 새겨져 있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는 자신이 존중받고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하루의 고된 일상을 위로받는 하나의 의식이 된다. 소소한 행복과 따뜻한 인간관계의 가치를 강조하는 따뜻한 네이밍이다.
브랜드에서 네이밍의 역할
브랜드 네이밍은 단순한 이름 붙이기를 넘어 소비자와의 첫 번째 접점이자 브랜드 정체성을 압축한 핵심 요소다. 좋은 네이밍은 기억하기 쉽고, 의미를 전달하며, 감정적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특히 한국 시장에서는 단순한 기능적 네이밍을 넘어 유머와 재치를 담은 네이밍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가 많다. 이는 브랜드에 친근함을 부여하고, 입소문 효과를 극대화하며,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이루는 강력한 마케팅 도구로 작용한다.
네이밍의 본질은 문제 해결이다. 수많은 제품들 사이에서 소비자의 주목을 끌고, 기억에 남으며, 구매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 과정에서 한국의 네이밍들은 특별한 길을 걸어왔다.
왜 유독 술 이름에 유쾌한 네이밍이 많을까?
술의 특별한 사회적 역할
술은 다른 상품과 달리 감정과 깊이 연결된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스트레스받을 때도 우리는 술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술 브랜드의 네이밍은 단순히 제품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의 감정과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음주 문화는 '정(情)'과 '한(恨)'이라는 독특한 정서와 맞닿아 있다. 함께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문화. 그 속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물론 지나친 음주는 해롭다)
자조적 유머의 힘
우리네 한국인들은 힘든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건물주'라는 이름을 보며 웃는 이유는 누구나 바라고 있지만, 사실 그 소망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유머로 감싸는 여유가 바로 한국인의 정서다.
공감대 형성의 마케팅
이런 네이밍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강한 공감대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이름을 보며 미소짓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순간 브랜드와 소비자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고객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게 아니고 하루의 고단한 피로를 푸는 의식이다. 마찬가지로 브랜드는 단순히 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삶과 감정을 이해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선조들의 해학, 풍자의 DNA
조선시대 해학 문화의 뿌리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은 양반 사회의 허례허식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를 남겼다.
"벼슬아치 나리들아 / 백성의 고혈을 / 어찌 그리 쉽게 빨아먹나 /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나"
이런 직설적인 풍자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지적했지만, 동시에 해학적 표현으로 탄압을 피해갔다. 현재 술 브랜드들이 사회적 현실을 유머로 포장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탈춤의 해학적 저항
하회탈춤의 '양반과 선비' 대목에서는 허세 부리는 양반이 조롱받는다.
"나는 양반이로소이다. 학식이 높고 덕망이 깊소이다"라고 뽐내던 양반이 결국 바보가 되는 모습을 통해 계급사회의 모순을 비웃었다. 이는 직접적인 비판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우회적 저항이었다.
신윤복 화백의 은유적 풍자
신윤복의 작품은 높은 계층의 화려한 삶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유머와 애정을 담아낸다. 대표작인 '단오풍정'(端午風情)에서는 여성들이 그네를 뛰는 모습을 몰래 바라보는 스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신윤복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할 스님’이 여인을 몰래 훔쳐보는 장면을 통해,종교적 위선을 해학적이고 은근히 비꼬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때문에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쩍 미소를 짓게 만든다. 신윤복은 이처럼 일상의 작은 순간을 포착해 감추어진 욕망과 호기심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헬조선'에서 'N포세대'까지
2010년대 들어 젊은 세대들은 "헬조선", "N포세대", "흙수저" 같은 용어로 자신들의 현실을 표현했다.
이는 절망적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전통적 해학의 현대적 버전이다.
'워라밸'이라는 신조어
Work-Life Balance를 줄인 '워라밸'도 마찬가지다.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재치와 위트는 공감의 가장 큰 무기다.
한국의 재미있는 네이밍 문화는 단순한 마케팅 기법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정서적 유산이자 문화적 자산이다. 힘든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해학의 전통이 현대 상업 문화에서 창의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네이밍으로 돌아가보자.
브랜드 네이밍은 단지 제품의 이름을 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 감정의 문을 여는 '디자인 행위'이자, 소비자와의 첫 대화다. 그 이름에 담긴 재치, 위트, 그리고 해학은 무장된 마케팅 언어보다 훨씬 더 진심 어린 공감과 연결을 만든다.
‘캬’ 한마디에 담긴 청량감, ‘건물주’에서 피어나는 소소한 희망, ‘개빡’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웃픈 현실은 우리 모두의 일상을 반영하고,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술 한 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가 된다.
이처럼 위트와 유머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읽고, 사람을 위로하며, 브랜드가 기억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조선의 화가 신윤복이 그러했듯, 오늘날의 브랜드 디자이너들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해학의 힘을 빌린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한 것이고, 말 한마디의 위트는 때로 수백만 마케팅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재치와 위트는 공감의 가장 큰 무기이다.
이제는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 진지한 전략이 되는 시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름 한 줄에서 비롯된다.

PS. 얼마전 또 전시회에 가서 또 재미난 술을 발견했다. 역시 우리민족은 위트 넘치는 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