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서 ‘옵트아웃’은 도박이 아니다. 좋은 패를 손에 쥔 선수가 베팅을 키우는 행위에 가깝다. 김하성이 애틀랜타의 내년 보장 연봉 1,600만 달러(약 229억 원)를 포기하고 FA 시장으로 걸어 들어간 건 그래서 의외가 아닌 동시에, 용감하다기보다 계산이 선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핵심은 두 가지다. 이번 겨울 유격수 시장의 얕은 수심, 그리고 그가 시즌 막판 애틀랜타에서 보여준 ‘건강한 김하성’의 표본이다.

지난 2년 사이 김하성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2024년 시즌 끝에 FA 자격을 얻었지만 어깨 수술 변수로 기대만큼의 장기 대형 계약을 잡지 못했고, 대신 2년 2,900만 달러에 옵트아웃 장치를 심어 단기 재평가의 길을 골랐다. 2025년 초중반에도 종아리·허리 통증이 겹치며 리듬을 찾지 못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안전한 잔류가 나아 보인다. 그런데 9월 애틀랜타로 옮긴 뒤 유격수로 24경기 .253, 3홈런, 12타점—표본이 아주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기억하던 ‘볼넷을 고르고, 변화구에 흔들리지 않는’ 그 김하성이었다. 무엇보다 수비는 여전했다. 발과 어깨가 동시에 살아 있는 유격수는 리그 전체를 훑어봐도 드물다.
FA 시장 구조도 김하성 편이다. 올겨울은 특급 유격수 클래스가 비어 있다. 대체 자원으로 묶이는 선수들은 수비에서 물음표가 붙거나, 건강·나이 리스크가 더 크다. 반대로 김하성은 건강 리스크를 이번 가을에 일정 부분 지웠고, 유격수와 2루수, 상황에 따라 3루수까지 소화 가능한 멀티성으로 보수적인 구단의 ‘플로어(최저 성과)’ 걱정을 줄여준다. 시장이 얕을수록 희소성이 프리미엄이 된다. 그래서 평균 2,000만 달러 이상의 다년 계약 전망이 힘을 얻는다. 3년 보장에 팀·선수 옵션을 얹거나, 2+옵트아웃 형태로 유연하게 설계하는 시나리오도 현실적이다. 에이전트가 스콧 보라스라는 점을 고려하면 보장 총액보다 ‘탈출구(옵트아웃)’와 인센티브를 촘촘하게 깔아 상호 리스크를 나누는 협상 작법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디가 맞을까. 애틀랜타는 가장 손쉬운 답이다. 시즌 막판 ‘급한 불’을 김하성이 껐고, 그 덕분에 팀은 유격수 포지션의 내년 설계를 덜 불안하게 그렸다. 다만 애틀랜타는 페이롤을 탄력적으로 쓰는 팀이라, 다년·고평균 계약에는 신중할 수 있다. 같은 내셔널리그에서 샌디에이고도 다시 얘기가 나온다. 유격수와 2루의 퍼즐을 재배치하면서 수비 효율을 높이려는 팀이기에, ‘유격수 김하성-다른 내야 자원 재배치’ 그림이 깔끔하다. 아메리칸리그로 눈을 돌리면, 내야 안정이 필요한 구단—장기적으로 유격수 수비를 외주에 맡기기 어려운 팀들—이 후보군에 선다. 공격에서 대형 수를 기대하기보다, 수비·주루·선구안이 만드는 팀 전체의 승리 기여(특히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와 스케줄 내내 출전 가능한 내구성을 돈으로 사려는 구단이라면 더 그렇다.
물론 위험이 없는 계약은 없다. 김하성의 2025시즌 누적 타격지표만 놓고 보면(.234/OPS .649) 팀의 중심타선에 바로 꽂을 ‘파워 업사이드’ 카드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서는 보통 이렇게 타협이 이뤄진다. ①보장 연봉은 수비 프리미엄과 포지션 희소성에 맞춰 준수하게 책정 ②타격 기여(플레이트 어피어런스, 누적 WAR 지표 연동 등)에 따라 인센티브 단계 상승 ③부상 이탈 시 구단 보호 장치—이 세 줄을 균형 있게 엮는다. 선수 입장에서도 불리하지 않다. 건강과 볼넷·컨택만 유지되면, 2년 차 혹은 3년 차에 다시 옵트아웃을 당겨 시장 재도전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김하성이 스스로 증명해온 정체성이다. 김하성은 ‘슬럼프를 크게 타지 않는 선수’다. 잘 맞을 때도, 안 맞을 때도 스트라이크존 관리가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외야 깊숙이 뻗는 타구가 줄어들면 도루·주루로 점수를 만든다. 한마디로 공격이 막히면 수비와 주루로 득점 기대를 지켜낸다. 메이저리그 162경기의 피로한 일정에서 이런 유형은 감독에게 고마운 자산이다. 라인업을 짤 때 ‘김하성 자리’는 팀 컨디션이 요동치는 기간에도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이게 길게 보면 돈이 된다. 수비에서의 아웃 하나, 주루에서의 90피트 한 칸은 단기 체감이 둔하지만, 시즌 총량에서는 승수를 좌우한다. 구단이 ‘지속 가능한 승리’를 추구할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선수가 매일 출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매일 팀을 덜 힘들게 만드는가”—에 김하성은 ‘예’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FA는 타이밍의 예술이다. ‘한 시즌 더 보여주고 나가자’라는 말은 달콤하지만, 내년 겨울 유격수 풀(pool)이 지금보다 얕을지, 깊을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몸 상태와 수비력을 지금처럼 시장에 바로 내밀 수 있을 때, 즉 확실한 약점이 보정된 순간에 뛰어드는 쪽이 기대값이 높다. 큰 그림으로 보면 김하성의 커리어 전략은 일관돼 있다. ①첫 FA 때는 부상 리스크를 반영한 단·중기 계약으로 안전장치 확보 ②건강 회복 후 ‘옵트아웃’으로 시장 재평가 ③두 번째 FA에서 본인의 베이스라인—수비·주루·선구안—을 바탕으로 다년 계약 시도. 이건 무리한 올인보다는 리스크 헤지에 가까운 길이다.

한국 팬 입장에서 이 장면은 여러 감정을 겹치게 한다. KBO 리그 최고의 유격수 유망주가 메이저에서 ‘수비로 살아남고, 공격에서 팀을 돕는’ 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화를 시장이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자랑스럽다. 동시에 냉정해야 한다. 한 방의 매력이 아니라, 하루하루 쌓이는 작은 우위를 돈으로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협상 기술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수비의 가치를 숫자로 설명하고, 그 숫자가 승수로 이어진다는 다리를 끝까지 놓아야 한다. 김하성의 테이블엔 그런 얘기를 20년 넘게 해온 보라스가 앉아 있다. 구단 단장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가장 설득력 있게 ‘이 계약은 비싸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그가 어디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는 정답보다 방향을 보는 편이 낫다. 김하성이 ‘유격수 1번 옵션’으로 영입된다면 그 팀은 수비를 통해 실점 최소화 철학을 명확히 하려는 곳일 것이다. 반대로 ‘유격수/2루수 플래툰·로테이션의 핵’으로 데려간다면, 매일 다른 라인업을 섬세하게 굴리는 구단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경우든 요구받는 것은 화려한 누적 숫자보다 ‘빈 날’이 적은 시간 관리다. 그 점에서 김하성은 이미 답을 갖고 있다. 어깨를 고친 뒤 보여준 송구의 각도, 타석에서 초구를 쉽게 흘리지 않는 습관, 주루에서 타이밍이 애매한 순간에도 과감히 스타트를 끊는 결단. 이런 디테일이 쌓여 계약서의 숫자를 만든다.

옵트아웃은 결국 질문이다. “지금의 나를, 시장은 얼마로 평가할까?” 김하성은 그 질문을 피해가지 않았다. 유격수가 귀해진 겨울, 건강을 회복한 가을, 수비와 멀티성에 돈이 몰리는 흐름—세 가지 신호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그의 선택은 용기라기보다 논리였다. 이제 공은 구단들에게 넘어갔다. 어느 팀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김하성의 가치를 현금화할지 지켜볼 일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유격수 수비로 승부하겠다는 구단에게, 지금 김하성만큼 딱 맞는 조각은 시장에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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