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 울려 퍼진 마지막 휘슬은 단순한 한 경기의 끝이 아니었다. 페퍼저축은행 AI페퍼스가 디펜딩 챔피언 흥국생명을 셧아웃으로 눌러버린 순간, 이 팀은 과거의 ‘막내·만년 최하위’라는 낡은 꼬리표를 떼내고 리그 선두로 뛰어올랐다. 스코어는 3-0(25-19, 25-18, 25-19). 지난달 30일 현대건설을 3-0으로 꺾은 데 이어 2경기 연속 무실세트 승리다. 시즌 성적 3승 1패, 승점 8. 한국도로공사와 승점·다승이 같지만 세트득실률에서 앞서 창단 이후 처음으로 ‘단독 1위’라는 표지를 가슴에 달았다. 선수들은 코트를 한 바퀴 돌며 팬들과 눈을 맞췄고, 장내 스피커보다 큰 함성이 쏟아졌다. 이날의 함성은 성적표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팀이 드디어 도약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선언이었다.

무대 중앙에는 복귀하자마자 팀의 무게중심을 잡아준 조이 웨더링턴이 있었다. 부상으로 데뷔가 미뤄졌던 조이는 1세트 중반 교체로 투입돼 리듬을 찾더니 3세트에는 선발로 나와 16점을 쓸어 담았다. 꼭 화려한 난타가 아니어도 공격 각을 깔끔히 만들고, 템포를 바꿔 상대 블로커 타이밍을 무너뜨리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왔다. 숫자만 보면 ‘최다 득점자’였지만, 더 중요한 건 그의 존재가 공격 루트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레프트 이한비의 자신감 있는 오픈, 주장 박정아의 퀵오픈과 블로킹, 그리고 시마무라 하루요의 속공과 이동이 얽히며 파도가 겹치듯 몰려왔다. 시마무라가 13점, 이한비가 13점, 박정아가 10점. 한쪽에 쏠림 없이, 네 방향에서 공급된 득점이 흥국생명의 블로킹 라인을 흔들어댔다.

경기의 흐름을 바꾼 건 결정적 순간마다 솟구친 블로킹이었다. 1세트 17-17에서 맞바람이 불 뻔한 타이밍에 페퍼저축은행은 연속 득점으로 24-17까지 치고 나갔다. 단순한 공격 성공이 아니라, 높이를 앞세운 차단으로 상대의 템포를 끊고 리턴 볼에서 다시 속도를 높이는 ‘두 번 이기는’ 장면들이 반복됐다. 2세트 12-12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시마무라의 속공과 오픈 연속 득점으로 찢어놓은 뒤, 박사랑과 시마무라의 연속 블로킹이 박차를 가했다. 상대의 공격 선택지를 줄여놓고, 흔들린 리시브 위에 서브 압박을 덧칠하니 점수는 자연스레 벌어졌다. 이 팀이 그동안 가장 갈망하던 메커니즘, 즉 서브—리시브—블로킹—전환공격의 사슬이 ‘경기 전체’로 확장돼 돌아갔다.

3세트 초반 흥국생명이 10-6으로 앞서며 반격을 예고했을 때도, 페퍼저축은행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이가 한 박자 빠른 퀵오픈으로 흐름을 끊었고, 박정아가 블로킹과 퀵오픈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상대 숨을 막았다. 그 사이 수비 라인은 비는 공간을 집요하게 메웠고, 리바운드 볼을 살리는 집중력이 살아나면서 무려 8연속 득점으로 14-10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시마무라와 임주은의 블로킹이 다시 가세했고, 마지막은 예고편처럼 깔끔했다. 24-18에서 박정아의 차단으로 매치 포인트를 잡고, 조이의 오픈이 네트를 스치며 상대 코트에 꽂혔다. 이 팀답게, 이날의 상징답게, 속도와 높이와 정확함으로 마무리했다.

이 승리는 단지 한 경기의 결과가 아니다. 지난 3시즌 내내 최하위에 머물렀고, 올여름 컵대회에서도 조별리그 전패로 고개를 숙였던 그 팀이, 시즌 개막과 함께 달라진 얼굴을 연달아 증명하고 있다. 장소연 감독은 “순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창단 첫 1위의 의미는 선수들과 함께 오늘만큼은 충분히 나누고 싶다”고 했다. 말과 표정 사이에는 꽤 긴 여정이 겹쳐 보였다. 컵대회의 씁쓸함이 오히려 선수단의 감각을 깨웠고, 훈련의 방향이 명료해졌으며, 출전 자원의 조합을 몇 번이고 갈아 끼우며 찾은 답이 코트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즌 초반이라지만, 같은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초반이기 때문에 더욱 귀하다. 초반의 손맛은 자신감을 낳고, 자신감은 패턴을 단단하게 만든다.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뼈아픈 밤이었다. 시즌 개막전 승리 이후 4연패, 그것도 페퍼저축은행에게는 셧아웃 패배다. 레베카 라셈은 10점에 묶였고, 공격 성공률은 20%대 중반에 머물렀다. 피치와 이다현이 블로킹 3개를 포함해 22점을 합작했지만, 전체적인 조직의 톱니가 맞물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3세트 10-6에서 연거푸 8실점을 허용한 장면은 흐름 관리와 리시브 안정, 세터 연계 모두에서 과제가 선명해졌다는 신호였다. 요시하라 도모코 감독은 경기 뒤 “진다는 건 힘이 약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말은 차갑지만 울림은 따뜻하다.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고백이자 선언이기 때문이다. 김연경의 시대가 막을 내린 뒤 처음 맞는 본격적인 재정비의 계절, 흥국생명은 선수층을 다시 세우고, 세터 라인을 정비하고, 점유율을 버티는 외인 의존도를 건강한 수준으로 낮추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페퍼저축은행의 반대편에는 하나하나 쌓아 올린 변화의 결과가 놓여 있다. 조이의 가세가 공격에 넓이를 부여하고, 시마무라가 중앙에서 속공과 이동으로 상대 블로킹의 시선을 잡아준 덕에 좌우 날개가 숨을 쉬었다. 이한비의 리시브 범위를 넓혀 박정아의 부담을 덜어주는 미세 조정도 경기 내내 체감됐다. 블로킹은 ‘양적’으로 늘어난 게 아니라 ‘질적’으로 결정적 타이밍에 터졌고, 서브는 강약 조절을 통해 상대 레프트 라인을 흔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결과적으로 점수는 꾸준히 쌓였고, 위기 때는 길게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장면 사이의 연결’이다. 득점 다음 랠리의 서브 위치, 블로킹 매치업을 맞추는 이동, 리시브가 길게 뜨면 중거리 세트로 템포를 바꿔 막히는 블로킹 손을 맞고 나가게 만드는 계산까지, 세밀함이 경기 전체를 지배했다.
이제 질문은 다음으로 건너간다. 초반 돌풍을 ‘계절풍’이 아닌 ‘무풍지대 없는 바람’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리그는 길고, 상대들은 곧 적응한다. 페퍼저축은행이 이 기세를 유지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해 보인다. 첫째는 수비의 평균값을 더 끌어올리는 일이다. 오늘처럼 블로킹 타이밍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날에도 디그와 커버로 두 번의 기회를 만드는 루틴을 굳혀야 한다. 둘째는 조이의 점유율을 서서히 높여가되, 그에 맞춰 국내 자원들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한비의 리시브 참여도, 박정아의 결정력 분배, 센터진의 속공 빈도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배분표가 시즌 중반의 체력을 좌우한다. 초반 1위라는 문패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이 문패는 상대의 준비도를 끌어올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키워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오늘의 페퍼저축은행은 그 어려움을 반기는 팀처럼 보였다.

흥국생명 역시 길을 잃은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은 지도를 다시 펴야 할 시간이다. 세터 조합의 안정, 레베카의 효율 회복, 피치와 이다현의 중앙 활용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작업이 동시에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패를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은, 첫 번째 세트에 ‘자기 리듬’ 한 조각을 심는 일이다. 초반 리시브 두세 개만 정리돼도, 공격수의 손끝 감각은 확 달라진다. 감독의 말대로 ‘힘’을 붙이는 과정은 반복 훈련과 작은 성공의 축적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흥국생명은 팬들에게 친숙한 근성의 팀으로 다시 서야 한다.
페퍼저축은행은 6일 홈인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GS칼텍스를 맞는다. 상대 에이스 라인의 화력과 레이나의 변칙 리듬은 또 다른 형태의 시험지다. 그러나 시험지의 난도가 높을수록, 답을 적는 손은 단단해진다. 창단 첫 1위의 달콤함을 오늘까지만 즐기고, 내일부터는 다시 한 포인트씩 챙기는 일. 이 팀이 진짜 강해졌는지의 기준은 그 반복에 있다. ‘어제보다 좋은 오늘’을 두 번 만들었다면, 이제는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예고할 차례다. 그리고 그 예고는 이미 코트 위에서 시작됐다. 두 경기 연속 셧아웃 승리로, 선두 배지를 달고, 미소로 하나가 된 팀워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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