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타워보다 눈부셨다, 용사님의 노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

기자 2024. 10. 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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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자유여행의 추억
일러스트 | 현재호 기자
아라이 부부와 함께한 오모테산도·하라주쿠·점자도서관, ‘도상’과 간 다이보 커피점…
관광지의 기억은 희미해졌어도 ‘만찬의 밤’ 날 살려준 노랫가락은 여전히 생생

20대의 나는 안마사 일을 하며 적금을 붓는 한편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까지 모아야 했다. 소문난 수전노로서 내 유일한 취미는 책을 듣는 것이었다. 잠을 자거나 일하는 시간 외에는 이어폰을 항상 귀에 꽂고 있었다. 독서는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즐거움이었다. 일본 소설을 들으며 아기자기한 시모키타자와의 골목을 상상했고, 홀로 고고히 빛을 밝히는 도쿄타워가 궁금해졌다. 7년짜리 적금이 만기되는 날, 반드시 일본으로 떠나리라. 그 계획은 고된 노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내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수백권의 책이 쌓여갔다.

그리고 7년 후 일본은 내 첫 자유여행지가 되었다. 우선 절친한 동료로부터 한국과 일본 시각장애인들의 교류를 돕는 직업학교 교사분을 소개받았다. 그는 흔쾌히 일본 저시력협회 회원들과 나를 연결해주었는데, 나는 이런 배려가 처음이라 신기했고 좀 얼떨떨했다. 그는 협회 회원들이 이런 교류를 매우 반기며 식사도 대접할 것 같으니, 답례 삼아 한국 간식거리를 사 가라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몇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사례를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즐겁게 여행을 다녀와서 밥 한 끼 사주며 여행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했다.

하네다공항에는 아라이 부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부부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으로, 공직에서 은퇴하고 봉사활동에 매진하며 노후를 즐기고 있었다. 고대하던 시모키타자와에서 점심을 먹고 오모테산도와 하라주쿠를 돌며 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주변 풍광을 설명하면 아저씨가 유창한 한국어로 통역했다. 다음 일정은 도쿄타워였지만 아라이 부부가 그전에 점자도서관에 들러보자고 했다. 내게 의미 있을 거라 말했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점자를 읽지 못했다. 맹학교에 다닐 때 점자 교육을 받았으나 저시력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점자를 읽었고, 확대 문자로 공부했으니 점자를 굳이 익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점자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라서 잠자코 따라갔다. 도서관 1층에서는 점자 시계를 비롯해 각종 점자용 도구와 책을 판매했다. 아저씨 말로는 한국인들이 이곳에 들러 기념품으로 필기도구를 잔뜩 사간다고 했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예의 없는 한국인이 되고 싶진 않아, 몇몇 용구들을 만져보고 2층에서 점자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성실히 견학했다.

도쿄타워는 해가 저물고서야 도착했다. 아라이 아저씨는 굳이 돈을 내고 전망대에 올라가지 말고 1층에 축소 모형이 있으니 그거나 실컷 만져보고 주변을 둘러보자 했다. 나도 그게 좋겠다고 동의했다. 매점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캄캄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철 구조물 주변을 걸었다. 건조한 바람이 수풀을 흔들었다. 요사스러운 풀벌레 소리가 수만개의 방울이 흔들리는 것처럼 짤랑댔다. 뜬금없이 아라이 아저씨가 내게 몇살에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 반쯤 농담으로 마흔다섯 살이라고 답했더니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엄청난 잔소리를 시작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재되어 내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루 중 가장 피곤한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라이 아저씨는 아주머니 대신 다른 안내자를 데려왔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로 재일교포 3세라 했다. 일본 이름과 한국 이름을 모두 알려주었는데 내 맘대로 한국 성을 따서 ‘도상’이라 불렀다. 도상은 항공사에서 지상직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아라이 아저씨가 오늘은 도상을 잡고 다니라 했다. 그의 팔을 잡고 두 걸음이나 뗐을까? 도상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내 몸도 그 방향으로 따라갔다. 알고 보니 도상은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그가 내 눈치를 살피듯 괜찮겠냐고 묻길래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상관없다고 말했다. 손에 힘을 빼고 그의 팔을 가볍게 잡은 뒤, 허리에 힘을 주고 반듯이 걸으며 머릿속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최대한 걷는 시간을 줄이고 욕심껏 넣었던 행선지를 삭제했다. 때때로 힘이 드니 좀 쉬다 가자고도 부탁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배려라 생각했지만 도상은 눈치가 9단이었다. 그는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할 말도 없고 어색한데 아라이 아저씨는 자꾸만 둘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제야 아저씨의 의도를 번뜩 깨달았다.

우리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커피숍이라는 ‘다이보 커피점’에 들렀다. 마스터는 70대 노인이었다. 의자며 테이블은 세월에 닳고 닳아 반들반들했다. 옆자리 선객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담배를 피우자 좁은 실내에 담배 연기가 자욱해졌다. 나도 질세라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도상에게 가서 재떨이를 얻어오라고 말했다. 내가 담배를 물자 실내의 소란이 좀 줄어든 듯싶었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참았던 흡연 욕구를 채웠다. 연거푸 담배 두 대를 피우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도상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원래 과묵한 건지, 숫기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내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을 보면 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그가 바짝 긴장하도록 일부러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될지 물었다. 여행을 오기 전 나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에 빠져 있었기에 도상에게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는지, 직장에서 차별은 없는지를 물었다. 도상은 예상했던 질문의 방향이 아니었는지 잠시 당황하다 성실히 답변했다. 그는 오사카 태생으로 유치원 때부터 일본기관을 다녀 교포라고 차별받은 기억은 없고, 그런 따돌림이나 차별은 자기 아버지 세대에나 있던 일이라 했다. 도상은 자기에게 그런 것만 궁금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냉큼 답하자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어느새 돌아온 아라이 아저씨는 오늘 저녁 저시력협회 회원들이 만찬을 준비했으니 참석해 자리를 빛내달라 말했다. 장소는 저시력협회 사무실이었다. 그곳에 무려 20명의 회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장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환영 박수에 얼굴이 화끈댔다. 네다섯 명 모여 간단히 술이나 한잔 마실 줄 알았지 이토록 대규모 행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도상이 내 옆에서 통역을 해주었다. 한 사람의 소개가 끝나면 모두가 박수를 쳤다. 나도 온 힘을 다해 손바닥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자 아라이 아저씨는 왜 일본을 방문했으며 며칠간 둘러본 일본은 어떠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착한 표정과 정제된 언어로 정치인 같은 뻔한 소감을 꾸며냈다. 나를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성의를 다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길게 말했다. 감사 인사를 꾸벅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어서 음식 소개가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누가 어떤 음식을 준비해왔는지 소개하면 모두 박수를 쳤다. 덕분에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맥주만 겨우 마셨다. 그다음은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누군가 엔카를 간드러지게 불렀고 어떤 이는 대중가요를 불러 흥을 돋웠다. 설마설마했지만 역시나, 내게도 순서가 넘어왔다. 나는 엄청난 음치다. 겸양이 아니라 진실이다. 맥주 두 캔으로 상기됐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좀 해주라, 도상을 툭툭 쳤지만 이 자식도 어느새 박수부대에 합세해버렸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노래는 동요 아니면 맹학교 교가뿐이었다. 이렇게 나라 망신시키는구나 다리를 떨며 일어서 교가라도 부르려는데, 아라이 아저씨가 내 옆에 서더니 한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멀뚱히 서 있을 수 없어 두 눈을 딱 감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날의 아라이 아저씨는 내 용사님이었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힘이 빠져 있는데 도상이 내게 한국에 놀러가면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맥주나 더 가져오라고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아라이 아저씨의 목과 어깨를 열심히 주물러드렸다. 아직도 일본을 떠올리면 그 모든 관광지 대신 그날의 만찬장이 생각난다. 그 식은땀 나던 순간과 눈부신 용사님의 노랫가락이.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펴냈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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