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때 보여주라"는 히틀러와 괴벨스, 결국 아이들도 '약탈'에 나섰다
[한 영국 신문의 베를린 특파원은 '그 방탕한 파티는 새벽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열한 곳의 시나고그(유대교회당) 중 아홉 곳이 거의 동시다발로 불에 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영국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쇠막대기와 벽돌로 무장한 반쯤 취한 군중들이 베를린 웨스트엔드에서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회당) 유리창을 부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뿌린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총통이여! 우리를 유대인의 전염병에서 구하소서!'](마틴 길버트, <크리스탈나흐트: 대학살의 전주곡>, 플래닛, 2009, 20쪽).
1938년 11월7일 프랑스 파리 독일대사관 안에서 외교관이 유대인 청년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죽는 사건이 터지자, 이를 빌미로 나치 정권은 11월10일 엄청난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베를린뿐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가 약탈당하고 부서지거나 불탔다. 돌격대원들은 주택가로 몰려가 잠자고 있던 유대인들을 침대에서 끌어내 마구 때리고 죽였다.
맨 위에 옮긴 글은 수정의 밤에 일어났던 광란의 유혈사태를 전하는 영국 언론의 보도 내용이다. 영국인 역사학자 마틴 길버트는 당시의 기사들을 바탕으로, 피해자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2009)를 써냈다(길버트는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공식 전기작가로 전기 8권 가운데 6권을 써냈고,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그런 공으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았다).
하이네의 경구(警句)가 현실이 된 '괴벨스 포그롬'
깨진 유리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고 해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 일컫는 그날의 유혈사태로 유대인들은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90~100명에 이르렀고 적어도 2만(일설엔 3만) 명이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 약칭 Gestapo)와 친위대(Schutzstaffel, 약칭 SS)에 붙잡혀 집단수용소(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에 갇혔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교 성직자(랍비), 교사, 언론인들이 포함됐다. '수정의 밤' 사건이 터지자, 유대인들은 절망한 나머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만 22명의 유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광기 어린 야만을 앞장 서 부추긴 자가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였다. (지난 주 글에서 봤듯이) 1933년 5월 '비(非)독일적'이라 낙인찍힌 책들을 불 태웠던 괴벨스는 5년 6개월 뒤 건물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는 범죄를 저질렀다. '책을 불태우는 그곳에서,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될 것'이라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구(警句)가 현실로 나타난 모습이었다.
1938년 11월10일 '수정의 밤'은 그때까지 독일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박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기에 '포그롬'(pogrom)으로 일컬어진다. 포그롬은 러시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규모 인종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학살을 가리킨다.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유대인 박해로 비롯된 유혈사태가 포그롬이다(연재 77 참조).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앞서 독일과 폴란드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박해도 '포그롬'이라 부른다. '수정의 밤'은 괴벨스가 앞장 서 일으켰기에, '괴벨스 포그롬'이라 일컫기도 한다.
한 유대인 청년 암살자의 분노
따지고 보면 '수정의 밤'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날이 갈수록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 가던 상황에서 벌어졌다. 지난 글에서 난민 문제를 다룬 프랑스 에비앙회의(1938년 7월)에 참석한 여러 나라들이 (입으로는 유대인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인 모습을 살펴봤다(연재 85 참조). 미국과 영국은 유대인 문제를 '독일의 국내문제'로 돌리며, 못 본 체 하려 했다. 히틀러는 말로만 유대인 난민 걱정을 하면서 실제로는 빗장을 걸어 잠그는 위선적인 태도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더욱 유대인을 겨냥한 탄압 정책을 밀어붙였다.
에비앙회의가 흐지부지 막을 내린 뒤인 1938년 10월18일, 히틀러는 1만 2,000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독일에서 내쫓았다. 그들 대부분은 10년, 20년 또는 30년 이상 독일에서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짐 가방 하나뿐, 그동안 고생하며 이뤄놓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했다. 다행히 그들 가운데 4,000명은 폴란드 영토로 들어갔지만, 나머지 8,000명은 국경에서 발이 묶였다. 폴란드 국경역 즈바슈니의 차가운 바닥이나 헛간에 앉아 오도 가도 못하는 고단한 처지에 빠졌다.
국경에 발이 묶인 사람들 가운데 독일 하노버에서 27년 동안 살다가 쫓겨난 부부가 있었다. 파리에서 혼자 공부하던 17살 아들 헤르셀 그린스판은 자신의 부모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됐다. 분노한 그린스판은 권총을 사들고 지하철을 타고 파리 독일대사관으로 갔다. '중요한 서류를 전해줄 게 있다'며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자 말자, 3등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향해 다섯 발을 쐈다. 그때 그린스판이 외친 말은 이러했다.
"이 더러운 독일 놈아. 박해 받는 1만 2,000명 유대인의 이름으로 네가 받아야 할 서류는 바로 이거다!"(마틴 길버트, 14-15쪽).
여배우와 스캔들 일으킨 괴벨스
1938년 가을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독일 여배우와의 염문을 둘러싼 사생활 문제로 히틀러의 분노를 샀다. 그 배우의 이름은 리다 바로바(1914-2000).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리다는 영화배우의 꿈을 지닌 미녀였다. 오디션을 보려고 베를린에 갔다가 하노버 출신의 유명배우이자 유부남인 구스타프 프롤리히의 연인이 됐다. 괴벨스는 리다의 미모에 끌렸다. 나치 선전장관으로 영화계를 쥐고 흔드는 권력을 배경 삼아 구스타프로부터 그녀를 떼어내 자신의 정부로 만들었다.
괴벨스는 리다를 히틀러에게 데려갔고, 히틀러는 그녀에게 선심 쓰듯이 독일 시민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괴벨스도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는 히틀러에게 "괴벨스가 여배우와 바람을 피운다"며 눈물로 도움을 청했다(마그다는 패전 무렵 히틀러의 지하 벙커에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1945년 4월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그 다음날 1남5녀를 독극물로 죽이고 남편 괴벨스와 자살했다).
괴벨스가 바람을 피울 무렵 히틀러는 체코 주데텐(Sudetenland) 합병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1938년 3월 게르만계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히틀러의 눈길은 체코에 쏠렸다. 주데텐 지역 주민의 70%는 독일계였고,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자결권과 생활공간(Lebensraum) 확보를 내세워 주데텐 병합을 요구했다.
나치의 부추김을 받은 주데텐 독일계 주민들은 자치운동을 벌여 긴장을 높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유럽 한복판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달래면서 뮌헨협정(1938년 9월29일)을 맺었다. 독일의 주데텐 합병을 눈감아 준 뮌헨협정은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이란 문구를 담았다. 하지만 '약소국인 체코를 희생시켜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냐'는 비난이 뒤따랐다.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체임벌린은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침략자 히틀러에게 잘못된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폄으로서 그의 간덩이(침략야욕)를 더 키웠기에 전쟁에 이르게 됐다는 비판이었다. 오늘날에도 국제관계에서 어떤 문제든 강경론자들이 유화론을 비판할 때는 체임벌린을 빠뜨리지 않고 불러 세운다.
주데텐 합병을 앞두고 히틀러는 괴벨스가 사생활 문제로 공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못 마땅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여배우와 당장 헤어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괴벨스는 여배우를 진지하게 사랑했던 듯하다. 본부인과 이혼하려 했으니 말이다. 히틀러는 이혼을 반대했다. 괴벨스에게 "굳이 이혼을 고집한다면 선전장관 직책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물론 이는 본심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괴벨스의 선전 재능을 높이 샀다. 히틀러에겐 괴벨스 같은 자가 필요했다.
괴벨스-리다의 로맨스를 그렇게 끝났다. 나치 선전장관과 체코 여배우의 스캔들이 외국으로 새나가는 것을 걱정한 히틀러는 보좌관에게 리다의 출국을 막도록 지시했다. 1938년 10월 독일군은 체코 주데텐을 무혈점령했고,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말미암아 한껏 몸을 낮추고 있던 괴벨스는 "주데텐 병합이 왜 바람직했는가" 하면서 선전에 열을 올렸다(리다를 주인공으로 괴벨스와 히틀러가 등장하는 영화는 여러 편에 이른다. 2016년에 나온 '리다 바로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영화 속에서 리다는 옛일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난 범죄자를 사랑했어요. 그게 범죄인가요?").
"유대인 범죄집단이 테러 부추겼다"
그 무렵 베를린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괴벨스와 체코 여배우 스캔들은 화제를 모았다. 괴벨스에겐 다행스럽게도, 스캔들로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돌리는 사건이 터졌다. 위에서 본 파리 독일대사관에서의 외교관 피습이었다. 사생활로 입방아에 올라 히틀러의 심기를 살피며 몸을 낮추고 있던 괴벨스는 피습 사건이 자신의 스캔들을 지울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괴벨스 평전(Joseph Goebbels, 1992)을 쓴 독일 저널리스트 랄프 로이트의 글을 보자.
[중상을 입은 라트가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괴벨스는 라디오와 신문에 대대적인 보도를 내보내 '유대인 이민자 도당'과 '국제적인 유대인 범죄 집단'이 그 테러를 부추긴 것으로 비난하도록 지시했다. (나치 선전매체인) <민족의 파수꾼>에 따르면, 수천 명의 유대인이 아직도 상점가를 장악하고 있고, 유흥업소들을 가득 채우며, '외국인 집주인'으로 독일인 세입자의 돈을 긁어모으고 있고, 외국에서는 그들의 '인종적 동지들'이 독일과 전쟁을 요구하면서 외교관을 쏴죽이고 있는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 했다](랄프 로이트,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2017, 600쪽).
라트 피격 다음날, 괴벨스의 지침을 받은 나치 언론들은 저마다 유대인을 비난․공격하는 기사들로 지면을 꽉 채웠다. 하나같이 그런 기사를 읽는 독일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폭력을 부추기는 내용들이었다. 괴벨스는 평소에서 이런 말들을 자주 했었다. "이성은 필요 없다. 감정에 호소하라."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제 됐다!"고 괴벨스가 기뻐한 이유
괴벨스가 바라던 대로 일이 벌어졌다. 독일 곳곳에서 유대교회당이 불타고, 상점이 약탈당하고 유대인을 모욕하면서 괴롭히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히틀러 연구자로 잘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의 글을 보자.
[괴벨스는 일기에다 난리를 지켜본 소감을 만족스럽게 적어나갔다. "헤센에서 반유대 시위가 크게 이어났다. 유대교회당이 불에 탔다. 이제는 사람들의 울분이 터져나오면 좋으련만!" 다음날에도 시위가 벌어져 유대교회당이 불붙고 상점을 때려 부수었다. 오후에는 라트의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제 됐다!" 괴벨스는 그렇게 적었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194쪽).
옮긴 글에 나오는 '헤센'은 독일 중서부 지역의 주(州)다. 오래 전부터 반유대 정서가 특히 높다고 알려진 곳이다(주도는 비스바덴). 그곳 유대인들은 총격 사건 소식을 듣자말자 나치 히틀러 정권이 피격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다. 유대인들끼리 만나면 "총알을 다섯 방이나 맞았다는 라트가 제발 죽지는 말아야 할 텐데..."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피격 이틀 뒤(11월9일) 라트는 숨을 거두었다.
괴벨스가 자신의 일기에다 "이제 됐다!"고 기뻐했던 것은 총격사건을 이용해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지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일어났던 베를린 제국의회 방화사건(1933년 2월27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웅장한 제국의회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괴벨스는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극장에서 느긋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 화재 소식을 듣고 둘은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곧바로 붙잡힌 방화 용의자는 정신질환이 있는 20대 네델란드인 공산주의자였다(그가 진범인지는 지금껏 분명치 않다. 나치가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그래서 나온다). 현장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계시다. 이번 방화가 내 짐작대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면 우리는 이 악랄한 병균에 철퇴를 가해야 한다"(이언 커쇼, <히틀러Ⅰ의지 1889-1936>, 교양인, 2010, 642쪽).
3월5일로 예정된 총선거를 엿새 앞두고 일어난 방화 사건을 빌미로 히틀러는 독일공산당(KPD)을 비롯한 정적들을 때려잡았고,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는' 긴급령에 이어 전권위임법을 밀어붙여 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괴벨스는 그 무렵의 일기에다 '방화사건은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썼다. 물론 그 기회란 정적들을 때려잡는 것을 가리킨다.
(사건사고를 틈 타 이득을 챙기려드는 것은 교활한 정치인의 생존 본능일까. 1950년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라 기뻐했다. 요시다의 예측 그대로, 한국전쟁 특수는 패전국 일본의 경제를 살렸다. 연재 26 참조).
히틀러, "유대인에게 본때를 보여야"
독일 외교관 라트가 숨진 날, 독일 전역에선 나치 당원들이 '뮌헨 거사'를 기념하는 정치행사를 열고 있었다. 15년 전인 1923년 11월8일, 히틀러 일당은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16명이 죽고 히틀러는 감옥에 갇혔다. 나치는 그 실패한 폭동을 '전설'로 승화시켰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다 죽은 16명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우고 해마다 이를 기념하는 집회를 크게 열었다(뮌헨 폭동은 1922년 10월 이탈리아 검은 셔츠단을 로마로 행진시켜 정권을 잡은 베니토 무솔리니 흉내를 낸, 준비가 신통찮은 어설픈 시도였다).
그날 저녁 히틀러는 괴벨스를 비롯한 당 거물들과 뮌헨 구 시청에서 열린 행사에 함께 하고 있었다. 전령 하나가 나타나 히틀러에게 귓속말로 라트의 사망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바로 옆자리의 괴벨스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책을 논의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유대인에게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짧게 지침을 주고 행사장을 떠났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195쪽 참조).
공은 괴벨스에게 넘겨졌다. 그 때가 저녁 10시 무렵이었다. 연단에 오른 괴벨스는 "슬프게도, 라트가 숨을 거두었다"면서 증오어린 독설을 이어갔다. 괴벨스의 연설은 "유대인에게 보복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괴벨스는 '유대인을 겨냥한 자연발생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괴벨스는 히틀러의 '본때' 지침을 당과 경찰에 알렸다.
1938년 11월10일 이른 새벽부터 독일 전역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그날의 유대인 박해는 겉으로는 독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따른 것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갈색 제복의 돌격대원(SA)들과 검은색 제복의 친위대원(SS)들이 방화와 더불어 폭력을 휘둘렀다. 히틀러 유겐트 대원들도 함께 나섰다.
어린 아이들도 약탈에 끼어
'수정의 밤'은 그때껏 독일에서 벌어졌던 어느 폭력사태보다 규모가 컸다. 많은 유대인 상점과 교회들이 약탈․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부서지고 약탈된 상점 앞에는 미리 준비한 현수막들이 내걸렸다. "폼 라트를 위해 복수하자!" 또는 "유대인을 쫓아내라!" 따위였다. 그 광란의 현장에는 독일 주민들도 함께 했다. 일부 지역에선 여성들도 거들었다. 네덜란드 국경에 가까운 도시 흰겐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자.
[(유대교 율법서 두루마리들이 길거리로 내팽개쳐지자) 여자들은 그 푸른 벨벳 천을 갈가리 찢어버렸고 모두들 은박으로 장식된 그 무루마리를 낚아채려 했다. 펼쳐진 두루마리들이 가을날 진흙투성이가 된 골목길에 나뒹굴었다. 아이들은 두루마리 위를 밟고 지나갔고, 어떤 이들은 율법이 쓰여 있는 고급 양피지를 조각조각 찢어버렸다] (마틴 길버트, 31-32쪽).
유대인 보석상들도 피해를 입었다. 유리창이 깨지자 폭도들이 저마다 서둘러 뛰어 들어갔다. 진열장의 보석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뒤늦게 보석상으로 달려온 폭도는 (길거리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가게 앞에 누군가 흘린 보석을 주워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약탈된 물건들이 모두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친위대원들은 상점에서 약탈한 물건을 연말에 열린 종교적 자선구호 행사장으로 보냈다.
10대 청소년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약탈에 끼어들었다. 유대인 장난감 상점의 유리창이 나치 행동대원들에게 깨지고 출입구가 부서지자, 아이들은 장난감을 두세 개씩 챙겼다. 그런 모습을 보고 몇몇 독일인 여성들이 '그러면 안 돼!'라고 나무라자, 폭도들은 그들에게 침을 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유대인들에겐 '수정의 밤'이 아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유대인 약탈 소문은 더러운 거짓말"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그날 밤을 독일에서 가장 바쁘게 지샜다. 독일 시민들에게, 그리고 국제사회에 이 사건을 어떻게 포장해서 알릴 것인가의 '보도 지침'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무엇보다 사건이 크게 보도가 되선 안 된다며 축소․왜곡하는 쪽으로 지침이 만들어졌다. 독일 언론들은 괴벨스에 충실히 따랐다. 유대인 상점과 교회당(시나고그) 유리창이 깨진 것은 그 원인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했다. 폭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도 '독일 외교관의 피살에서 비롯된 자연발생적 반응'이라 했고, '독일 국민들이 이해할만한 격분으로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괴벨스는 날마다 오후에 선전부 기자회견실에서 외국 특파원들을 만나곤 했다. '수정의 밤'을 겪은 당일 오후 회견에서 괴벨스는 사건을 축소․왜곡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유대인이 약탈당했다는 소문들은 모두 더러운 거짓말"이라 주장했다. "유대인들의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특파원들에게 괴벨스의 그런 주장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긴 어려웠다. 미 <뉴욕 타임스>와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를 비롯한 여러 외신들은 자체 취재원들을 동원해서 실상을 상세히 보도하려 했다(이즈음 전세계 주요 언론사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실상을 전하는 방식도 이러하다). 영국 신문 <데일리 헤럴드> 1938년 11월11일자 기사를 보자.
[돌격대원들이 유대인들의 집에 쳐들어가 커튼을 뜯어내고 카펫과 실내 기물들을 난도질하며 가구들을 때려 부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침대에서 쫓겨나며 흐느껴 울고 있을 때, 침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 파괴자들 중 다수가 10대 청소년들이었다](마틴 길버트, 24쪽).
위 인용문에 나오는 10대 청소년들은 히틀러 유겐트 소속일 가능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일부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곤봉이나 벽돌로 유대인 상점을 부수라고 부추겼다. 그에 따라 학생들은 유대인을 공격하고 유리창을 부수는 만행에 함께 했다. 학교 교장이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불타며 화염을 내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외신 기사를 독일 시민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해외언론들은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을 죽여라"하고 소리 질렀고 돌격대원들이 파괴를 마치고나서 대도시의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했다고 썼다. '그 사건들에 대해 깊은 당혹감을 느낀' 다수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그러한 보도들은 독일 국내에서는 읽을 수 없었다. 괴벨스가 이 신문들을 압수하여 독일 내 배달을 막았기 때문이다](랄프 로이트, 604쪽).
사건 다음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외국 기자들은 '수정의 밤 동안 파괴자들을 막으라고 경찰에 지시하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다. 괴벨스의 답변은 당당했다. "나는 우리 경찰들에게 독일인을 쏘라고 명령할 수가 없었소. 왜냐하면 내심 나도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오"(마틴 길버트, 32쪽).
'수정의 밤' 광풍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을 휩쓴 뒤 나치 정권 지도부 안에서는 "괴벨스가 무책임한 일을 저질렀다", "선동적인 분위기에 휘말렸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특히 헤르만 괴링이 괴벨스 성토에 앞장섰다. '수정의 밤'은 괴벨스의 역할이 컸기에 '괴벨스 포그롬'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히틀러의 책임도 크다. 다음 주 글에선 히틀러의 책임과 나치 지도부의 괴벨스 비판 근거를 따져보고, 아울러 '수정의 밤'이 1940년대 전반기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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