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시승] 페라리 12칠린드리,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FAST & GLORIOUS

영어 ‘Glorious’는 뜻이 많다. 영예로운(=honorable). 대단히 즐거운 =wonderful). 눈부시게 아름다운(=splendid).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아우른다. 12칠린드리와 함께한 순간이… 꼭 그랬다.

이현성 사진 페라리

12칠린드리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어떤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까요?

지난 4월,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자리한 페라리 본사에서 12칠린드리 공개 무대를 지켜봤다. 공식 행사를 마친 뒤 페라리 마케팅 총괄 엔리코 갈리에라에게 위와 같이 물었다. ‘이모셔널(감정을 자극하는)’.

그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미래를 달리는 디자인,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V12 자연흡기 엔진, 이와 함께 절정으로 치닫는 배기 사운드 등 12칠린드리는 말 그대로 정서적 폭발을 부르는 페라리”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말을 곱씹으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눈앞에 12칠린드리를 마주하고 있는 현재와 과거에 812슈퍼패스트, 푸로산게로 경험한 V12 엔진의 기억이 포개지며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12칠린드리를 타고 유럽 어딘가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던 듯하다.

깎아져 내리는 기암절벽, 때때로 나타나는 로맨틱한 성곽, 푸른 하늘과 초원을 배경 삼아 새까만 아스팔트 위를 유유히 거닐었다. 한낱 공상에 불과했지만 몽글몽글 예쁜 추억이라도 만들고 있는 듯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때 기분과 같았다.

HONORABLE

상상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넓은 황금빛 보닛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그 속 12개 드럼통의 강력한 폭발음이 귓가를 울리고 있다. 두 손은 스티어링휠을 휘휘 저으며 패들시프트를 튕기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다. 나는 지금 12칠린드리를 타고 유럽의 작은 도시 룩셈부르크를 여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바위와 숲으로 뒤덮인 고지대로 유명한 북쪽 지방의 깊은 골짜기를 따라 달리고 있다. 지형이 워낙 험난한 까닭에 인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을이라 부를 수 있는 빌츠에 인구 4000여 명이 살고 있을 뿐이다.

때마침 빌츠를 지나는 중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또는 중학생쯤으로 보였는데, 그들은 12칠린드리를 보고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하필 도로는 아이들을 태우러 온 차들 탓에 정체를 빚었다. 마치 투명한 어항 속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얼굴은 금붕어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창피함도 잠시.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만은 없었다. 새로 부임한 V12 황제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남겨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차오른 까닭이다. 결국 양쪽 패들시프트를 당겨 기어를 N으로 뺀 뒤 가속 페달을 짓이겼다. 금요일 오후의 한가했던 마을은 때아닌 황제 행차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뿌듯했다. 한편으로는 영광이었다. 페라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최신 V12 모델을 이 세상 누구보다 먼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페라리가 V12 엔진을 살뜰히 생각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최고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페라리의 치열한 역사를 함축한다. 최신 12칠린드리를 시작으로 1947년 카발리노 람판테(도약하는 말) 엠블럼을 처음 가슴팍에 달고 나온 125 S까지, V12 엔진의 발자국을 따라 오르다 보면 진화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V12를 품은 모델 중에서도 앞에 엔진을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2시트 그랜트 투어러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페라리의 시작점이자 부흥을 일으킨 주역인 까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을 누렸다. FR 구성의 V12 페라리는 범접할 수 없는 출력과 유려한 외모를 바탕으로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페라리의 곳간에는 풍요가 찾아왔다. 덕분에 경주차 제작에 더 몰두할 수 있었고 곧이어 전성기를 맞이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성장 배경에 V12 모델이 있던 셈이다. 페라리가 12칠린드리를 대중에 처음 공개할 장소로 미국을 점찍은 이유다. 시기도 딱 맞아떨어졌다. 올해로 페라리는 미국 진출 70주년을 맞았다.

잠깐 계보가 끊긴 적은 있다. 1968년에 출시한 365GTB/4를 끝으로 플랫 12기통 엔진을 차체 중앙에 얹은 미드십이 그랜드 투어러 자리를 대신했다. 성능과 속도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당시 프런트 엔진, 뒷바퀴굴림 구성은 운동 성능 한계가 명확했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정통성을 회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페라리는 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FR 구조의 한계를 극복했다. 이때 등장한 차가 1996년 550 마라넬로다. 20년 만의 정통성 회복. 어쩌면 이름 뒤에 페라리의 고향 마라넬로를 붙인 계기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페라리는 다시 품에 찾은 FR V12 모델을 기념하기 위한 방법을 그들이 나고 자란 뿌리에서 찾았다.

WONDERFUL

오늘날 V12 페라리는 또 한 번 과제를 맞닥뜨렸다. V12 페라리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브랜드의 꼭짓점을 담당했다. 특히 성능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점점 더 야박하게 구는 배출가스 규제가 자동차 생태계를 뒤흔들었다. 자연흡기 엔진으로는 규제를 맞추는 동시에 엔진 성능을 높이기가 쉽지 않다.

전동화 파워트레인은 달랐다. 기술 발전을 거듭할수록 출력은 진화에 가까운 개선을 이룬다. 페라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변화를 택했다. 이제 마라넬로 마구간에서 경주마의 몫은 SF90 스트라달레와 296 GTB 차지다. 대신 V12 모델은 GT카의 장점을 더욱 극대화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췄다.

디자인만 보더라도 변화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기존 812슈퍼패스트는 페라리의 최상위 포식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듯 과격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차체를 조각하듯 파내 화끈한 성미를 그대로 드러냈다. 날카로운 공력 성능을 위해 커다란 구멍을 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12칠린드리는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표독스럽지 않다. 매끈한 선과 면이 우아하고 유려하다. 이탈리아어로 보닛과 펜더의 합성어인 ‘코팡고’ 보닛 역시 미려한 분위기 연출에 한몫한다. 앞모습뿐만 아니라 12칠린드리는 차체 패널을 최소화해 파팅 라인을 극적으로 줄였다. 그래서 눈을 쉽게 뗄 수 없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차를 빙 둘러 가며 보게 된다.

페라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통성을 불어넣었다. 1950~1960년대를 풍미한 V12 페라리의 몸매와 비율로 12칠린드리를 그렸다. 얼굴에는 데이토나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365 GTB/4에서 영감받아 까만 마스크를 씌웠다. 흥미롭게도 아이디어는 과거 유산에서 찾았지만 미래를 달리는 분위기가 물씬하다.

페라리 디자인 총괄 플라비오 만조니에 따르면 공상과학 영화를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뤘다고. 콘셉트카를 보는 기분 역시 지울 수 없다. 비결은 812슈퍼패스트보다 1인치 더 큰 휠에 있다. 21인치 휠을 짝지어 디자인 스케치에서나 볼 수 있는 비율을 실현했다. 더불어 차가 더 가볍고 옹골차 보이는 효과도 챙겼다.

V12 페라리의 유산, 새로운 변화,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미래를 음미하며 달리기를 이어나간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비가 흩날리는 통에 도로는 마를 틈이 없었다. 살짝 젖은 노면을 생각해서 주행 모드는 스포츠로 타협했다. 서스펜션은 마네티노 스위치를 꾹 눌러 범피 로드에 맞췄다.

그러면 12칠린드리는 탄탄하게 조인 다리 근육 긴장을 풀어 울퉁불퉁한 노면에 부드럽게 녹아든다. 요철을 만나도 공중 부양하는 일은 없다. 네 발은 언제나 도로를 꼭 붙들고 바른 자세를 유지한다. 12칠린드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가득 메웠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기 그지없다.

발끝에서 꿈틀대는 최고출력 830마력은 수치상으로 대단히 위협적이다. 69.1kg∙m에 이르는 최대토크도 마찬가지. 하지만 따스한 손길로 다루면 평화와 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넉넉한 출력은 걸음걸이마다 풍요를 선물하고, 풍요는 곧 마음에 평안을 찾아준다.

언제 어디서나 운전을 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한숨 쉬어가도 원하는 속도까지 사뿐히 다다르고, 백 번 양보해도 목적지까지 누구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다. 가속 페달 조작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아도 좋다. 출력이 갑자기 널뛰기하는 터보 엔진과 달리 자연흡기는 점진적으로 힘을 쌓아 올린다. 덕분에 운전이 쉽고 편하다.

SPLENDID

두 시간 남짓 달려 콜마베르그에 위치한 굿이어 서킷에 도착했다. 12칠린드리는 출고 시 총 3가지 타이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공도 시승을 함께 한 미쉐린 파일롯 스포츠 S5, 그리고 굿이어 이글 F1 슈퍼스포츠가 기본이다. 나머지 하나는 런플랫 기능을 추가한 F1 슈퍼스포츠다. 서킷에서는 이글 F1 슈퍼스포츠를 경험할 참이다.

시승 코스에서 차마 들춰보지 못한 12칠린드리의 잠재력까지 엿볼 생각이다. 굿이어 서킷은 길이가 3.26km로 짧지만 모두 12개의 코너를 품고 있다. 그런데 타이어 연구 개발을 목적으로 설계해서 일반 서킷과 다른 특징이 있다. 활주로처럼 쭉 뻗은 직선 구간이 절반을 차지하고 바로 맞은편은 창자처럼 배배 꼬인 코너의 연속이다. 긴 직선 주로를 활공한 뒤 불규칙적인 슬라럼 구간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다행히 노면은 말라 있었다. 인스트럭터에 따르면 비가 오전에만 조금 내린 뒤 금방 갰다고. 시승은 페이스카의 뒤를 쫓아 달리는 방식이다. 서킷에는 오직 인스트럭터가 운전하는 페이스카와 나 둘만 오른다. 짧은 설명을 마치고 인스트럭터는 곧장 자신의 12칠린드리에 올라타 출발 신호를 보냈다. 그는 성미가 정말 급하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피트를 빠져나가자마자 쏜살같이 도망가 버린다.

“저… 저기요, 선생님? 저는 이 서킷이 처음인데요?” 애처로운 구제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그저 12칠린드리를 최대한 빨리 몰기를 바라는 듯했다. 마네티노 스위치를 굳이 레이스에 맞춰 놓으라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간격을 좁히긴 힘들었다. 인스트럭터의 꽁무니는커녕 먼발치에서 타이어 냄새만 쫓아 달릴 뿐이다.

믿었던 12칠린드리마저 나를 호되게 다그쳤다. 서킷 밖에서 살갑게 대하던 친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레이스 모드에서 서스펜션은 돌덩이로 변한다. 코너 각도와 깊이에 상관없이 차체가 기울어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타이어 반응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섣부른 조작으로 균형을 깨뜨리거나 한계를 벗어나면 뒷바퀴를 옆으로 흘리며 서늘한 경고를 날린다.

그런데 여기서 가속 페달을 조금 더 깊이 밟으면 정말 짜릿하다.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순간 스티어링휠을 반대로 꺾어 자세를 바로잡을 때 쾌감은 이루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떻게든 예리한 선을 그리며 랩타임을 줄여나가는 재미도 좋지만, 이처럼 꽁무니 미끄러뜨리며 스릴을 즐기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전자는 미드십 V8 페라리와 함께할 때 특히 맛이 좋다면, 12칠린드리는 후자가 더 자극적이다. 마치 전두엽에서 감정이 폭발하고 있다는 찌릿찌릿한 신호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직선 구간에선 기어코 계기판에 숫자 300을 띄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스트럭터의 타이어 냄새도 맡지 못했을 터다. 가속 페달을 꾹 밟는 동시에 뒤쪽에 자리한 액티브윙이 날개를 펴는 모습을 사이드 미러로 포착했다. 시속 60km를 넘어서면 양쪽 날개를 10도 들어 올리는데, 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재빨리 초점을 사이드미러로 맞춰야 한다. 2.9초면 시속 100km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물론 시속 50km에서 지긋이 속도를 높여도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꼭 내가 추천하는 방식으로 감상하기 바란다. 섬뜩한 가속과 함께 보면 감동이 배가되니까.

FAST & GLORIOUS

페라리는 기존 모델을 계승하는 후속작을 낼 때 같은 이름을 쓰는 법이 없다. 매번 극적인 진화를 거듭하는 까닭이다. 똑같은 이름은 진화의 의미를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퇴색할 뿐이다. 12칠린드리도 다르지 않았다. V12 페라리는 이제 더는 성능에 목메지 않지만, 이는 후퇴를 뜻하지 않는다. 타협이란 없는 페라리는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역시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3보 전진을 통해 뜻을 이룬다. 12칠린드리는 파괴적인 힘, 우아한 주행성, 기품이 넘치는 디자인 등 3보 전진에 성공했다.

12칠린드리라는 이름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페라리가 V12 자연흡기 엔진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12기통을 뜻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그런데 페라리는 12칠린드리로 V12 모델의 새로운 챕터를 열어젖혔다. 페라리는 앞으로 V12 모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설정했다.

이제 V12 페라리는 빠르기만 하지 않다. 영예로우며, 대단히 즐겁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더 알맞지 않을까? 끝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