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패배의 쓰라림 신인감독 김연경, IBK 기업은행 알토스 경기 리뷰!

첫 장면부터 숨이 막혔습니다. ‘배구여제’라는 이름표를 벗고 벤치에 선 김연경, 그리고 카메라가 잡아낸 건 익숙한 여유가 아니라 낯선 무기력의 그림자였습니다. 전주 근영여고를 제압하며 동화처럼 출발했던 필승 원더독스가, 프로의 벽 앞에서 처음으로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그 멈춤은 곧 날카로운 각오로 번졌습니다. 방송 말미 김연경 감독의 말은 단순했습니다. “다 핑계다. 준비해서 이기겠다.” 다음 편성표에 적힌 단어는 더 선명했습니다. 한·일전. 이 팀의 첫 해외 원정이자, 감독 김연경의 첫 자존심 승부입니다.

IBK기업은행과의 경기는 이야기의 밀도를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1세트 17-25. 스코어도 아팠지만 더 아팠던 건 방식이었습니다. 리시브가 흔들리고, 세터 라인에서 작은 미스가 쌓이자 흐름이 무너졌습니다. 세계를 상대하던 시절에는 ‘내가 들어가서 때리면 된다’가 해답이었지만, 이제는 네트 밖에서 말로 풀어야 합니다. 감독의 말은 코트에 도착하기까지 길을 건넙니다. 그 길이 초보 감독에게는 더 멉니다. 김연경의 표정이 처음으로 낯설게 보였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2세트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20-24,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의도적인 비디오 판독. 결과를 바꾸려는 시도였다기보다, ‘시간을 사는’ 전술이었습니다. 그 짧은 공백에 코트는 다시 조립됐습니다. “레프트 블로킹 낮다. 거길 파자.” 메시지는 간결했고, 선수의 반응은 정확했습니다. 백채림의 백어택이 터졌고, 문명화의 서브 에이스가 공기를 바꿨습니다. 문명화가 살려낸 슈퍼 디그 하나가 벤치를 흔들었고, 윤영인의 서브가 넷마진을 스치며 코트를 찢었습니다. 마지막은 주장 표승주의 강스윙. 듀스의 공방 끝, 원더독스가 2세트를 집어 올렸습니다. 이건 단순히 한 세트를 따낸 게 아니었습니다. 감독의 언어와 선수의 손이 처음으로 완벽히 겹친 순간, 그 한 장면이었습니다.

3세트는 전술의 줄다리기였습니다. 원더독스가 레프트 연타와 페인트로 6-2까지 앞섰습니다. 여기서 김호철 감독의 카드가 바뀝니다. 중앙 속공, 좌우 분산, 김하경의 안정된 볼배급. 프로 벤치의 노련함이 흐름을 추격했고, 그 흐름은 곧 전세가 됐습니다. 이나연의 백토스가 흔들리면서 공격 템포가 늦어졌고, 하이볼에서 파워와 높이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김연경은 세터를 이진으로 교체해 박자와 분배를 바꿨습니다. 이진은 몸을 던져 공을 살렸고, 맞춤 토스로 한 점 한 점을 붙였습니다. 24-21까지 따라붙는 근성은 만들었지만, 전수민의 강타를 끝내 막지 못했습니다. 세트는 떠났지만,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이진–윤영인 조합이 ‘먹힌다’는 확신입니다.

4세트는 기세의 파도 위에서 균형을 찾는 싸움이었습니다. 문명화가 다시 서브 에이스를 꽂았고, 이진의 디그가 메가 랠리를 연장했습니다. 윤영인의 블록아웃 득점으로 21-18, 손에 잡힐 듯했지만 그게 마지막 점수였습니다. IBK는 황민경을 다시 투입해 사이드 압박을 높였고, 수비-리시브-전개-피니시로 이어지는 완성된 사이클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표승주의 스파이크가 블록에 걸린 순간, 스코어는 닫혔습니다. 1-3. 원더독스의 첫 패배였습니다.

패배 뒤의 라커룸은 조용했습니다. 구혜인, 이진 같은 ‘친정팀 출신’의 눈물은 이 프로그램이 예능의 포맷을 쓰되, 내용은 철저히 스포츠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줬습니다. 김연경의 독려도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못한 게 아니다. 사소한 실수들이 점수로 쌓였을 뿐이다.” 선수로서는 스스로 해버리면 풀렸던 문제, 감독으로서는 ‘선수의 손’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 익숙한 답을 떠나 낯선 답을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 화면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방송의 결도 분명했습니다. 군더더기 예능 장치보다 ‘실전’에 초점을 맞춘 편집, 코트 위에서 오가는 지시와 응답, 득점 하나가 만들어지는 작은 디테일들. 그중에서도 2세트의 전술 VAR은 상징적이었습니다. 규정 안에서 시간을 벌고, 그 시간에 한 문장을 꽂아 넣는 일. 그 문장이 코트의 선택을 바꿀 때, 감독은 스코어에 이름을 남깁니다. 김연경은 그 장면으로 ‘감독의 첫 사인’을 새겼습니다.

물론, 이 포맷의 한계도 동시에 드러납니다. 팀 서사는 어느 순간 ‘슈퍼스타 김연경’의 서사에 기대기 쉽습니다. ‘7전 4승 못 하면 해체’라는 칼날 목표는 긴장감이지만, 자칫 결과 집착형 분위기로 내러티브를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해지는 것이 지금 같은 ‘패배의 해석’입니다. 팬은 결과를 기억하지만, 팀은 과정을 훈련합니다. 오늘의 한 점, 한 선택, 한 장면을 내일의 승부 포인트로 바꾸는 일. 예능이 아니라 스포츠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턱입니다.

그렇다면, 원더독스가 당장 손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리시브 라인의 첫 발입니다. 1세트와 4세트의 실점 다수는 리시브가 반 발 길어지며 세터가 뒤로 물러난 장면에서 시작됐습니다. 팔 각도를 낮추고, 중심을 한 박자 일찍 세우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세터의 템포 분할입니다. 이나연이 긴장할수록 토스가 높아지고, 공격자는 하이볼 파워 싸움으로 밀렸습니다. 이진이 보여준 빠른 분배와 짧은 리듬이 해답의 힌트입니다. 셋째, 서브의 변주입니다. 문명화처럼 과감히 라인을 겨냥하는 에이스를 기본으로 하되, 토스 높이와 임팩트 타점을 바꾸는 리듬 서브를 섞어 상대 패턴을 끊어야 합니다. 넷째, 듀스·세트포인트 분기점에서의 타임 매니지먼트입니다. 2세트의 전술 VAR처럼 ‘말할 시간’을 만들어 코트의 호흡을 다시 맞추는 습관을 루틴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이 있습니다. 한·일전. 상대는 일본 고교 최강 슈지츠. 현지 심판, 홈 응원, 원정의 핸디캡. 게다가 노골적인 도발 멘트까지 얹혔습니다. “3-0 완승을 예상한다”, “한국은 수비가 약하다.” 이 모든 바깥 소음은 결국 네트 하나 앞에서 의미를 잃습니다. 김연경은 국제전의 공기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 팀에 지금 필요한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지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이기는 그림’을 미리 그려 넣는 것. 그 그림은 상세해야 합니다. 첫 서브 어디로, 첫 리시브 각도 몇 도로, 첫 공격은 누구에게, 블록의 첫 타깃은 어디로. 이 디테일들이 쌓여 ‘한·일전의 첫 공’이 됩니다.

흥행의 지표도 따라옵니다. 3회 시청률 4.7%, 자체 최고 경신. 그러나 이 수치를 끌어올리는 건 선정성이 아니라 리얼리티입니다. 코트에서 오가는 날숨, 라커룸의 침묵, 벤치의 한 마디. 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현실 속 작은 변화를 시청자와 함께 찾게 할 때, 이 프로그램은 스포츠로서도, 예능으로서도 길게 갑니다. 오늘의 패배가 그 길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원더독스는 지금 1승 1패. 남은 5경기에서 3승이 필요합니다. 숫자는 간단하지만,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 설렙니다. 이 팀은 이미 증명했습니다.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여전히 바꿀 수 있는 한 공이 남아 있음을. 2세트의 20-24에서, 그 한 공은 감독의 전술이었고, 선수의 손끝이었습니다. 한·일전의 첫 공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광판의 0-0이 열릴 때, 그 공을 먼저 붙잡는 편이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남기고 싶습니다. 김연경은 ‘선수라면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내려놓고, ‘감독이라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 과정은 때로 더디고, 어떤 날은 답답합니다. 하지만 2세트의 한 장면이 말하듯, 언젠가 말이 손이 되고, 손이 점수가 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배구여제’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일전의 네트 위에서, 그 장면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매주 같은 자리에 앉아 이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준비해서 이기자는 그 간단한 말이, 결국 이 프로그램의 가장 강력한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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