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남 여수 해초 ‘잘피’ 서식지 복원 현장 | 여수 앞바다 탄소 흡수 기적… 해삼·민꽃게·갯지렁이 돌아왔다
축구장 네 개 크기 잘피숲 덕
해양 생물 56종으로 늘어나
LG화학, “생물 보호로 되갚겠다”
8월 30일, 전라남도 여수 신월동 소경도 선착장. 여름의 끝자락은 뜨거웠다. 태양은 바다 수면을 부서트리며 오후 내내 내리쬐었다.바닷바람에도 이내 땀이 흘렀다. 배를 타고 남쪽으로 10분가량 지났을까. 고래 모양의 작은 섬 ‘대경도(大鏡島)’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팀은 하루에 세 번, 40분씩 바다에 함께 들어갑니다. 지난해 10~11월엔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에 2000주씩 잘피(거머리말)를 심었어요.”
지난해부터 LG화학이 주도한 ‘잘피 서식지 복원 및 연구 사업’에 참여 중인 연안관리기술연구소 소속의 잠수부 박진웅(52) 팀장의 말이다. 25년 잠수 경력의 그는 여수 앞바다에서 잘피를 심는 ‘바다 농부’가 되었다.
잘피는 탄소 흡수 능력이 우수한 다년생 해초다. 해양생태계에서 탄소를 흡수·저장하는 주요 ‘블루 카본(Blue Carbon)’ 중 하나로 꼽힌다. 오랫동안 바다는 대기 중에 배출된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며 지구온난화의 완충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해수면 온도의 급격한 상승과 연안 부영양화로 해양 환경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해초류가 죽어가며 바닷속이 사막처럼 점점 황폐해지는 갯녹음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매년 여의도 면적의 약 네 배 크기인 1200㏊(헥타르)의 바다가 석회처럼 하얗게 변한다.
박진웅 팀장은 “지난 15년 동안 바닷물 온도가 너무 많이 올랐다. 잠수하면 사우나 열탕에 들어간 느낌이다. 어부 사이에서 ‘오징어가 푹 익어서 나온다’는 농담이 돌 정도다” 라고 말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 우리나라 해역의 해수면 온도는 23.9도로 최근 10년(2015~2024년) 평균보다 1.1도 높다. 이날 잘피 군락지를 모니터링하러 나온 김경률 한국수산자원공단 주임도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면 이산화탄소 흡수력이 떨어져 바다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서 “잘피 군락지가 해양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절대 작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잘피는 산림의 1.4배에 달하는 탄소를 흡수해 ‘바닷속 탄소 청소부’로 불린다. 우리나라 잘피 분포량의 약 60%는 남해안 지역이며, 그중 여수는 약 12%를 차지하는 곳이다. 잘피를 심는 작업은 수심 2m 정도의 얕은 바다에서 이뤄진다. 비록 수심은 얕지만, 작업을 위한 철저한 준비는 필수다. 잠수부가 산소통을 단단히 장착한 뒤, 세 명이 한 팀을 이루어 바다에 들어간다. 응급 상황에 대비해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은 잘피는 해수에 완전히 잠겨 자라난다. 모래, 진흙 등의 해저에 뿌리를 내리고 어류의 생육지 역할을 한다.
1976년부터 조성된 LG화학 여수 공장은 한국 석유화학 산업을 대표하는 중추 산업단지다. LG화학은 해양 자원의 혜택을 받은 만큼 되갚자는 취지로 여수 해양생태계 복원에 공을 들이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기금을 확보해 2026년까지 축구장 10개 크기의 잘피 숲 조성에도 나섰다. 지난해에는 5만 주의 잘피를 이식했으며, 올해는 2만 주를 추가로 이식할 예정이다.
한국수산자원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여수 앞바다에 이식한 잘피는 현재까지 탈락하거나 고사하지 않고 자연 군락지와 비슷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대경도 동쪽 해역에 이식한 30㎝ 길이의 잘피는 1년 만에 60~70㎝까지 자랐다.
기자가 직접 가보니, 잘피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생태계였다. 잘피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서 어류가 산란하는 안전한 쉼터가 되었다. 실제로 해삼, 민꽃게, 갯지렁이 등이 여수 앞바다로 눈에 띄게 돌아왔다고 한다. 잘피 서식지 복원 및 연구 사업의 중간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작년 말 발견된 생물은 불가사리와 갯지렁이 등 17종이었는데, 올해 6월에는 56종으로 늘었다. 생태계 복원의 지표로 꼽히는 해양생물들도 있었다. 특히, 갯지렁이, 옆새우류 등 같은 다양한 저서동물, 꽃게·갑오징어 등 유영생물, 1차 생산자 역할을 하는 식물 플랑크톤 등이 많이 늘었다. 지난해 42.7㏊ 수준이었던 대경도 앞바다의 잘피 군락지 면적도 1년 만에 45.5㏊로 늘어났다. 복원 이후 늘어난 면적은 2.8㏊로 축구장 네 개 크기다. 이는 자동차 780대가 매년 배출하는 탄소 1400t을 흡수할 수 있는 규모다. 대경도 앞바다의 잘피 군락지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무적이다. 잘피 서식지 복원 사업은 LG화학·땡스카본·한국수산자원공단이 협업하고 있다. LG화학이 4년 동안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잘피 서식지 복원과 연구는 한국수산자원공단, 세부 프로그램 운영은 기후 테크 스타트업 땡스카본 등이 담당한다. 10년 전만 해도 여수 남쪽 바닷가에서 잘피 같은 해초류는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게 어촌 주민의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생태계 복원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잠수부들이 심은 잘피가 내년에는 1m까지 자랄 것이라고 하니, 조용한 기적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여수 바다의 우거진 잘피 숲에 해양 생물이 떼지어 다니는 모습이 다시 흔한 일상이 될 수 있을까.
블루카본 해양 생물 등 해양생태계의 탄소흡수원으로, 갈대·칠면초 등 염생식물과 갯벌, 잘피 등을 포함한다. 육지의 탄소 흡수원인 침엽수림 같은 그린카본 대비 탄소 흡수 속도가 50배 빠르고, 5배 이상 많은 탄소를 흡수한다.
갯녹음 현상 해양오염과 지구온난화로 수온이 상승하면서 바닷속 탄산칼슘(석회가루)이 해저 생물, 바닥, 바위 등에 하얗게 달라붙는 현상. 1960년대 이후 노르웨이 북서부, 캘리포니아반도, 캐나다 동부와 서부, 남태평양 호주 연안, 일본 등에서 갯녹음 현상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후 남해안 일부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Plus Point
되살아나는 바다 숲 풍경…
‘블루 포레스트’ 월드 맵 440만 명 방문LG화학과 땡스카본은 잘피 서식지 복원 프로젝트를 광활한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 해양생태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ZEPETO)’에 ‘우리가 만드는 바다 숲 블루 포레스트(Blue Forest)’ 월드 맵을 개설한 것.
여기에선 누구나 가상의 잘피를 심어 탄소를 감축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내 아바타가 바다식목일 봉사활동 등 다양한 미션에 참여하면 잘피 군락지가 커지고 새로운 해양 동물도 만날 수 있다.
블루 포레스트에는 인공지능(AI) 챗봇 기능도 있다. 사용자가 블루포레스트 월드 맵의 커뮤니티존에 서 마스코트 ‘바다’와 대화하며 해양생태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있다.
블루 포레스트는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잘피와 산호로 ‘나만의 바다’를 꾸미는 것이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블루 포레스트 맵을 이용하는 한 10대 학생은 “월드 맵 체험을 통해 나만의 바다 숲을 꾸밀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유저가 어떻게 바다 숲을 꾸미고 잘피를 키우는지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면서 “친구들도 초대해 같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체험”이라고 말했다.
땡스카본에 따르면, 블루 포레스트의 누적 방문객은 최근 440만 명을 돌파했다.
김해원 땡스카본 대표는 “여수 잘피 서식 복원 프로젝트의 의미는 단순한 식물 복원에 그치지 않는다”면서 “생물 다양성 보전, 수질 개선, 탄소 감축, 어촌 상생 등으로 이어지며 지속 가능한 보금자리의 기반을 만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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