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업계 ‘탈중국’ 하는데…패션업계, 대륙 공략 나선 이유
세계 최대 규모 중국 소비시장을 두고 K뷰티와 K패션 기업의 전략에 상반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뷰티 업계의 당면 과제가 탈중국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패션 업계는 중국을 거점 삼아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화장품 위탁생산업체 힘을 빌린 C뷰티(차이나뷰티)의 저력에 K뷰티는 밀려났지만, 글로벌 브랜드의 라이센스를 확보한 국내 패션 기업에 중국은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의 땅이다.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패션 기업들이 앞다퉈 중국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같은 소비재로서 화장품 업계가 현지 기업의 경쟁력 상승과 궈차오(애국 소비) 직격탄을 맞고 하나둘 발을 빼려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물론 패션 분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양국 관계 등 외부 변수로 인한 휘둘림이 비교적 덜하고, 옷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소비 성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브랜드 라이센스를 통해 한국 이미지를 희석하는 전략도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탈중국이 살길이라는 K뷰티
중국은 초대형 소비 국가로서 핵심 공략 시장이지만 국내 화장품 제조 기업에는 옛말이 됐다. 사드 사태와 한한령(한류 수입 제한 명령), 코로나19 팬데믹, 궈차오 열풍까지 헤쳐왔지만 그 사이 C뷰티 산업이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은 물론, 현지 트렌드에 최적화된 디자인으로 무장하고 있어 K뷰티 업체가 경쟁력을 내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른바 ‘탈중국’의 필요성은 국내 기업들의 실적으로도 입증된다. 중국 철수, 북미 강화를 골자로 글로벌 리밸런싱에 적극 나섰던 아모레퍼시픽은 올해 3분기 연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78% 증가한 어닝서프라이즈를 거뒀다. 중화권 매출이 전년 대비 34% 하락한 976억원에 그치는 동안 미주 매출은 142% 증가한 1466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비교적 중국 탈출 속도가 더딘 애경산업의 경우 같은 기간 화장품 부문 영업이익이 53.2% 하락하는 성적을 받았다.
현지 화장품 기업들은 K뷰티 업체들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전체 화장품 소매액은 전년 대비 5.1% 늘어난 4142억위안(약 81조원)으로 집계됐다. 이때 자국 브랜드의 매출 증가율이 21.2%로 4배가량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C뷰티의 약진 배경에는 공교롭게도 국내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생산) 업계가 있다. ODM은 제조사가 고객의 제품 기획부터 개발, 생산 등을 책임지는 비즈니스 방식이다. 중국 기업들이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 국내 주요 ODM 기업에 의뢰해 사업을 전개한 덕분에 제품의 상향평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ODM을 통해 한국의 중저가부터 프리미엄 제품까지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는데, 굳이 한국 제품을 써야 하나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화려한 디자인과 그림을 선호하는 중국인 성향에 적합한 화장품이 너무 많이 나온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반일 감정처럼 일부러 자국 제품을 쓰는 현상이 뷰티 분야가 심하다”고 말하며 “가격 경쟁력까지 떨어지니까 국내 제조 기업으로선 중국 대신 미국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코스맥스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2억277만달러(약 2900억원)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면서 ODM 최초 수출 2억불을 달성했다. 중국 북경과 무석, 후저우 등 3곳에 현지 사업장을 갖추고 있는 한국콜마는 중국에서 올 3분기 누적 1280억원(화장품 부문)의 수익을 냈다. 5년 전인 2019년 3분기 545억원과 비교해 134.9% 증가한 수치다. 색조화장품을 ODM 방식으로 생산하는 씨앤씨인터내셔널 역시 지난해 중국에서만 178억원의 매출을 올려 역대 최고기록을 썼다.
대륙 땅 밟는 K패션
국내 패션 업계는 방향키를 중국으로 돌리고 있다. 아웃도어, 스포츠 시장 위주로 침투 여력이 많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라이센스 형태로 글로벌 브랜드 간판을 내걸거나 합자회사를 통한 진출 전략이 돋보이는 특징이다.
MLB를 전개하는 F&F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F&F가 해외에서 전년 대비 43.4% 증가한 924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 데에는 MLB의 역할이 컸다. 2019년 말 진출 이후 매년 보폭을 늘려 올해는 해외 소비자판매액이 2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기반으로 F&F는 올해 7월 아웃도어 브랜드 디스커버리를 보유한 미국 워너브라더스와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며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최근 오픈한 디스커버리 상하이 1호점을 시작으로 내년 현지에 100여개의 매장을 열 계획이다.
코오롱FnC는 지난달 글로벌 골프웨어 브랜드 지포어의 중국·일본에 대한 마스터 라이센스를 확보했다. 중국 대도시 위주로 향후 5년간 30개 매장 오픈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 최근 2025년 정기 인사에선 코오롱FnC를 이끌던 유석진 대표가 코오롱그룹의 중국 지주사 대표까지 겸직하기로 했다. 그룹이 글로벌 요충지로서 중국을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다.
이밖에 휠라홀딩스는 올해 2월 상하이에 ‘미스토 브랜드 매니지먼트’라는 신규 법인을 설립해 브랜드 사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국내 중저가 레깅스 1위 브랜드 젝시믹스는 현지 파트너사인 YY스포츠와 손잡고 7월 1호점을 열었다. 이후 이달 9일 9호점을 돌파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프리미엄 교복을 영위하는 형지엘리트의 경우 현지 기업 보노와 함께 세운 상해엘리트를 통해 소비자 접점을 늘리고 있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은 10월에만 연달아 2번 현장 경영을 실시하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K패션 업계가 라이센스·스포츠 위주로 중국 시장에 발을 들이는 건 로고플레이(로고를 강조한 디자인)를 즐기는 현지 소비 특성을 공략하기 위한 조치다. 글로벌 IP의 인지도를 빌려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디자이너 브랜드보다 대중성을 갖춘 만큼 상해, 북경 등 트렌디한 대도시 말고도 지방 도시의 수요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2012년 이후 중국 내 스포츠 산업 부가가치가 연평균 15.4% 증가하는 등 여행, 야영, 스포츠 오락 분야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영향이 크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책 ‘웹소설처럼 만들고 에르메스처럼 팔다‘를 쓴 박소현 작가는 “라이센스 진출의 경우 해외 브랜드라는 인식이 있어 정치적 민감도가 낮고 허들이 덜하다”며 “아웃도어나 스포츠 분야는 운동화, 가방 등 부수적인 요소도 많아 남녀 상관없이 볼륨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명품 플레이를 못 하게 하는 만큼, MLB처럼 로고 플레이가 가능한 브랜드에 대한 만족감이 높다”고 덧붙였다.
중국 안에서 K패션 산업을 보는 인식이 긍정적이라는 점은 전망을 밝히는 대목이다. 중국 최대 스포츠웨어 기업으로 꼽히는 안타스포츠가 자국 진출을 앞둔 무신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분 인수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 데 이어, 이달 초 중국 알리바바그룹이 국내 여성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의 글로벌 투자 유치에 참여해 1000억원을 조달한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박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