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된 정암 조광조

노성태 2025. 7. 1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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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26)조광조

-능주에 유배, 사사되다
최인호의 역사소설 ‘유림’은 화순 능주에서 시작된다. 이는 유림의 큰 스승이며 문묘에 배향된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사약을 받은 곳이 능주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평안북도)에 유배 중인 김굉필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김종직의 학통을 전해 받는다. 1515년(중종 10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정6품)을 시작으로 수찬·교리·경연시독관·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한다. 과거 급제 4년 만에 종2품 대사헌의 수직 승진은 대단한 파격이었다.

조광조와 사림들은 향약 실시,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등 혁신정책을 중종으로 하여금 실행하게 했다. 특히, 경전의 내용을 테스트하는 과거 시험 대신 면접을 중심으로 관리를 뽑았던 현량과는 훈구파들의 기득권을 박탈한 것으로, 당시 훈구파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됐다.

조광조 등 사림이 훈구파들에게 내민 마지막 칼은 기묘사화의 불씨가 된 ‘위훈삭제’(僞勳削除)였다. 중종을 왕위에 앉힌 훈구대신 ¾에 해당하는 78명의 공훈을 삭제하자, 수세에 몰린 훈구파는 조광조를 몰아낼 무고를 꾸몄는데, 잘 알려진 ‘주초위왕’(走肖爲王)이 그것이다.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 세력은 후궁을 움직여 궁중의 나뭇잎에다 꿀물로 ‘주초위왕’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 먹게 하고, 궁녀들이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모아 임금에게 바치게 한다. ‘주초’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되는데, 이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위훈삭제를 결재한 중종은 조광조의 타협할 줄 모르는 급진적 개혁에 피로감을 느꼈고, 이를 눈치챈 훈구 세력이 역모죄로 반격한 것이다. 중종은 벌레들이 갉아 먹어 새겨진 주초위왕이 훈구파가 만든 쇼였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를 명분 삼아 그가 중용한 조광조를 투옥시켰고, 능주에 유배한 후 사사한 것이다.

능주 유배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519년 12월20일, 사약을 든 의금부 도사가 도착한다. 목욕 후 의관을 갖춰 입고 절명시 한 수를 읊은 후 사약을 마신다. 이때 조광조의 나이 38세였다.

사약을 마시기 직전 조광조가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는 것처럼 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을 걱정하듯 하였도다(憂國若憂家)/ 밝고 밝은 대낮의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白日臨下土)/ 거짓없는 내 마음 훤하게 비춰주리라(昭昭照丹衷)”

조광조는 권력 싸움에서 졌고, 그래서 죽임을 당한다. ‘주초위왕’은 훈구파들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다.

- 조광조와 인연을 맺은 남도인
1519년(중종 14) 11월18일 조광조에게 능주 유배의 명이 내린다. 유배지에서 조광조의 속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 이 몸을 마치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로 시작되는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다. ‘능성’은 능주의 당시 이름이고, ‘적중’은 유배 중이라는 뜻이다. 자신을 활에 맞은 가련한 새로 비유한 이 시를 건네받은 이가 바로 축 처진 조광조에게 위안이 됐던 유일한 친구, 능주 출신인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었다.

조광조는 유배 직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이었던 반면, 양팽손은 정5품의 사헌부 지평(持平)이었다. 조광조가 유배되자, 양팽손은 조광조 유배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파직당했고, 고향인 능주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 서로를 의지했다.

조광조적려유허추모비 옆에 복원된 적중거가(謫中居家)에 두 분이 담소를 나누는 인형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한 달을 채 넘지 못한다. 조광조를 찾아온 의금부 도사 유엄의 손에 사약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가 죽기 전 시종에게 ‘관이 무거우면 먼 길 가기 어려우니 가벼운 것으로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 찾았던 분이 양팽손이었다.

조광조는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라고 ‘사기’에 전해오는 공자(孔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는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절명한다.

조광조의 마지막 임종을 양팽손이 지킨 셈이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손수 염해 자신이 사는 화순 쌍봉사 근처에 가묘를 만든다. 양팽손이 없었다면 조광조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양팽손, 그는 조광조에게 하늘이 맺어준 친구였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의로움을 실천한 광주 출신인 눌재 박상(朴祥, 1474-1530)도 조광조와 인연이 깊다.

조광조가 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에 나아간 해가 1515년(중종 10)이었다. 중종은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천둥번개가 여러 번 치는 등 변란이 잦자 ‘구언’(求言)의 명을 내린다.

이때 광주 출신으로 담양 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의 첫 왕비였던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의 딸로, 중종반정 때 신수근이 살해당하고, 일주일 후 신씨는 폐위됐다.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을 편 것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아내가 쫓겨남은 남편에게 잘못이 있거나 시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을 때나 합당하므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왕비가 폐위됨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신비복위소를 올리자, 훈구파들은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박상과 김정을 탄핵했고, 둘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때, 상소를 올려 박상과 김정을 구한 이가 사간원 정언(정6품) 조광조였다.

자신을 위기에서 도와준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 온다는 소식을 접한 박상은 1519년(중종 14) 11월, 무등산 앞 분수원(分水院, 학동 원지교 근처)에서 조광조를 만난다.

박상은 조광조와 헤어지면서 다음의 시를 지어 위로한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을 잡았더니(分水前曾把手)/ 괴상하도다, 그대 황각(정승이 사무를 보던 관청)에서 주애(귀양지로 유명한 중국 남방에 있는 섬)로 떨어지다니(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을 구별하지 말라(朱崖黃閣莫分別)/ 구천에 이르러 보면 차등이 없으리(經到九原無等差)”

다시 중종의 부름을 받을 줄 알았는데, 사약을 받은 후 시신이 소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가는 모습을 먼 발꿈치로 본 박상은 또 만시(挽詩)를 써 통곡한다.

“누가 알았으랴, 사헌부의 옛 고관이(不謂南臺舊紫衣)/ 소달구지를 타고 초라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줄을(牛車草草故鄕歸)/ 후일 지하에서 서로 만날 때는(他年地下相逢處)/ 인간사의 그릇됨은 말하지 마세(莫話人間萬事非)”

무등산 자락 조선 시대 최고의 자연 정원인 소쇄원의 주인공 양산보(梁山甫, 1503-1557)도 조광조와 인연이 깊다.

양산보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조광조의 제자가 된 후 17살이던 1519년 현량과 시험에 최연소자로 급제한다.

그런데 그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돼 사약을 받고 죽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은거한다. 양산보가 평생을 자연 속에 숨어 살 수 있는 공간인 소쇄원을 조성하게 된 것도, 능주에 유배와 사사된 스승 조광조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 조광조 유배 현장을 찾다
조광조가 유배된 후 사사된 능주는 한때 정3품 목사가 통치하던 목사골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화순보다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옛 이름 능성(綾城)인 능주가 목사골이 되었던 연유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와 관련이 있다. 인헌왕후 구씨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추존왕인 원종의 정비(正妃)가 되고, 인조의 어머니가 된다. 인조반정으로 아들이 왕이 되자, 어머니 능성구씨의 관향 능성은 능주목으로 승격된다. 지금도 능주에는 옛날 목사골의 위용을 보여주는 관아 정문인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이 남아 있다.
조광조 유배지 전경(전남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

유배지였던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와 그의 절명시 “임금을 사랑하기를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의 첫 글자인 애(愛)와 우(憂)를 취해 만든 애우당(愛憂堂)이, 건너편에는 조광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 중 거처했던 집인 적중거가가 복원돼 있다.
적려유허추모비는 조광조 사후 150여 년이 지난 1667년(현종 8) 당시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우는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은 동춘당 송준길이 쓴다. 추모비 앞면은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를 두 줄로 새겼고, 뒷면에 송시열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바로 뒤에 번역문이 있어 비문의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조광조 영정 ‘조광조적려유허추모비

조광조 초장지에 세워진 ‘서원 유지 추모비’

애우당에는 그의 절명시를 비롯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자신의 처지를 활에 맞은 새에 비유한 시 ‘능성적중시’도 그중 하나다. 영정각에는 조광조의 영정이 걸려있고, 유배 중 거처했던 적중거가는 당시 모습처럼 초가다. 방 안에는 자신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너무 엄숙하고 딱딱하다.
복원된 조광조 유배지 초가

조광조 유허비가 있는 유배지에서 1㎞ 정도 떨어진 연주산 자락에 그를 기리는 사당 죽수서원(竹樹書院)이 있다. 서원 이름 죽수는 능주의 옛 이름 능성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조광조 사후 50년이 지난 1570년(선조 3)에 사액서원으로 건립된 후 1630년(인조 8),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의 위패를 추가해 모셨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능성의 별칭이 왜 죽수(竹樹)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나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서원 입구에는 죽수서원이란 표지석이 홍살문과 함께 서 있다. 200여m의 돌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야 외삼문인 서원의 입구 고경루(高景樓)가 나온다. 가파른 돌계단의 좌우는 온통 대나무밭인데, 서원 이름 죽수 및 정암 조광조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두 번째 문인 내삼문의 이름은 조단문(照丹門)이다. 그의 절명시에 나오는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의 ‘조단’, 즉 ‘임금을 향한 거짓 없는 내 마음’에서 따온 듯 싶다. 조단문을 지나면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3칸 규모의 사당 천일사(天日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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