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자체 설계 칩 생산 일부를 미국 반도체업체 인텔에 맡기는 예비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가 최종 성사될 경우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안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애플이 자사 기기에 탑재되는 칩 일부를 인텔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설에서 생산하는 내용의 예비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양사는 이에 대한 논의를 1년 넘게 이어왔고 최근 몇 달간 예비 합의를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소식통은 인텔이 생산하게 될 애플 칩이 어떤 제품에 탑재될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전했다. 애플은 연간 2억대 이상의 아이폰을 출하하며 수백만대의 아이패드와 맥도 생산한다.
애플은 최근 수년간 아이폰과 맥 등의 핵심 칩 대부분을 직접 설계하며 자체 칩 개발을 확대해왔다.
앞서 블룸버그통신은 애플이 자사 기기에 탑재되는 메인 프로세서의 미국 내 생산을 위해 인텔과 삼성전자와 초기 단계 논의를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애플 임원들은 최근 텍사스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애플과 인텔의 합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권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에게 직접 인텔과의 협력을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여름 약 90억달러 규모의 연방 보조금을 인텔 지분으로 전환했고 이를 통해 10%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후 지난 1월 트럼프는 “나는 인텔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미국 정부가 인텔 거래를 통해 “수십억달러”의 수익을 거뒀고 정부 지원이 엔비디아 등 중요한 파트너들의 유입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이 최종 체결될 경우 최근 몇 년간 경영난을 겪어온 인텔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신뢰가 크게 강화될 전망이다. 그동안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은 낮은 수율과 반복된 일정 지연으로 외부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현재도 주요 외부 고객이 없는 상태이며 주로 자사 기기에 탑재될 중앙처리장치(CPU) 등을 생산한다.
애플 입장에서는 중대한 구조적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현재 애플은 자사 기기에 탑재되는 최첨단 칩 생산을 위해 대만 TSMC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애플은 엔비디아에 이어 TSMC의 두 번째로 큰 고객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 칩 수요 급증으로 반도체 산업 전반의 공급 부족이 심화되는 가운데 TSMC의 생산 능력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크리에이티브스트래티지스의 벤 바자리언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이 거래가 100% 성사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인텔은 실질적인 두 번째 공급처로서 생산을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시점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인텔은 실제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인텔의 최신 공정인 18A(1.8나노급) 기술이 적용되는 애리조나주 챈들러에 있는 신규 반도체 공장은 현재 대량 생산에 돌입했다. 인텔의 18A는 현재 TSMC가 대만에서만 생산하는 2나노 공정과 경쟁하기 위한 것이다. TSMC 역시 애리조나에 신규 공장을 건설 중이며 애플은 해당 시설에서 일부 칩을 생산하기로 했다.
바자리언은 애플이 인텔의 차세대 첨단 공정인 ‘18A-P’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하며 내년쯤 양산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현재 18A 공정에 대해 “다소 미흡하다”라고 평가하면서도 18A-P가 많은 부분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텍사스 오스틴에 건설 예정인 1190억달러 규모의 테라팹에서 향후 인텔의 14A 공정(1.4나노급)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당 시설에서 테슬라, 스페이스X와 스페이스XAI용 칩이 생산될 예정이다. 립부 탄 인텔 CEO는 14A 공정이 2029년 양산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바자리언은 애플과 인텔의 계약이 이미 생산 능력을 최대치로 가동 중인 TSMC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현재 AI용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기업인 삼성, 인텔, TSMC 모두 “충분한 속도로 생산 능력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TSMC는 최근 인텔을 “강력한 경쟁자”라고 언급하며 기존과 다른 어조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바자리언은 “최대 고객 중 하나가 경쟁 파운드리와 계약을 맺을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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