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희의 몸짓 탐구생활] [19] 김기민과 ‘볼레로’, 그 운명적인 만남

정옥희 무용평론가 2026. 4. 2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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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르발레로잔 '볼레로' 공연 리허설 무대에 선 김기민(가운데). /인아츠프로덕션
베자르발레로잔 '볼레로' 공연 리허설 무대에 선 김기민(가운데). /인아츠프로덕션

어떤 공연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설이 된다. 김기민의 ‘볼레로’가 그랬다. 발레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가 설립한 베자르발레로잔의 내한 공연에서, 그의 걸작 ‘볼레로’의 주역 ‘라 멜로디’ 역으로 마린스키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기민이 특별 출연했다. 두 차례 공연은 5분 만에 매진되었다.

무용수에게 배역은 운명의 상대와 같다.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노력한다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지겨울 만큼 익숙해진 배역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갈망해도 만날 수 없는 배역이 있다.

프로페셔널 무용수가 된다는 건 선택의 자유를 내려놓는 일이다. 학생 때의 배역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가깝다. 공주, 백조, 집시 역할을 마음껏 골라 콩쿠르에 나간다. 그러나 직업 발레단에 입단하는 순간 배역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군무 무용수가 함부로 주인공 역할을 연습하다간 눈총받기 쉽다.

주역 무용수라 해서 마음껏 배역을 가질 수 없다. 무용수는 배우와 마찬가지로 선택받는 존재이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소속 단체가 해당 작품을 선택해야 특정 배역이 가능해진다. 무용수의 삶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작품과 배역을 만나기란 어렵다. 이 때문에 무용수들은 진로나 이적을 결정할 때 급여나 단체 명성뿐 아니라 레퍼토리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볼레로’의 ‘라 멜로디’는 특별한 배역이다. 붉은 원탁 위에서 반복과 증폭을 거듭하는 움직임으로 군무를 끌어들여 끝내 폭발시킨다. 압도적인 집중력과 카리스마가 필요하기에 베자르는 극소수의 무용수에게만 허용했고, 그 계보 자체가 전설로 남았다.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자신의 50번째 생일 공연에서 ‘볼레로’를 추고 싶어 베자르에게 간청하여 겨우 허락받았다고 할 정도다.

베자르는 타계했으나 ‘볼레로’는 여전히 특별하다. 김기민은 학생 시절 스승과 함께 ‘볼레로’ 영상을 보며 언젠가 춤출 날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의 부상 복귀와 베자르발레로잔의 15년 만의 내한 공연이 맞물리며 막연했던 꿈이 실현되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관객보다 한국 관객이 먼저 그의 ‘볼레로’를 만났으니 이 또한 운명이다.

김기민의 ‘볼레로’는 처연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휘어잡는 리더가 아니라 쏟아지는 음을 받아내며 버티는 생존자, 끝나는 순간 먹힐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희생양 같았다. 이 작품을 다시 춘다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올까. 그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운명 같은 무대를 목격했으니 관객에게도 운명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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