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뜰날》로 희망 말하고 《네 박자》로 위로 전한 송대관, 국민 가슴속으로
(시사저널=하재근 국제사이버대 특임 교수)
58년 트로트 대부, 가수 송대관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월7일 오전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한 것이다. 많은 이가 크게 놀란 건 그가 2024년 11월에 정규 앨범 《지갑이 형님》을 냈기 때문이다. 정규 앨범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젊은 사람도 선뜻 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건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규 앨범은 발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 활동으로 이어진다. 올 들어 방송 출연, 공연 등이 진행 또는 준비되고 있었다. 그렇게 활동이 이어지던 중 그의 별세 소식은 국민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송대관은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 전주방송 전속가수로 활동하고 서울 노래경연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했다. 어린 시절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을 정도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 유공자인 송영근 선생인데, 일제강점기에 집안의 모든 재산이 사라졌다고 한다.
어머니가 물건을 머리에 이고 오일장에 나가 장사해 겨우 4남매를 먹였다. 당시는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어머니가 포목을 머리에 이고 시골길로 나섰다가 고구마, 감자 등으로 바꿔서 이고 힘겹게 돌아왔다. 당연히 어머니에 대해 애틋할 수밖에 없다. 훗날 송대관이 전 재산을 잃고 활동도 제대로 못 하는 시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 어머니는 아들의 추락에 낙심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일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정주영도 좋아한 자수성가 스타
고향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 송대관은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기차표를 살 돈이 없어 무임승차했다. 훗날 《차표 한 장》이 히트한 후 과거 무임승차 운임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서울역에 돌려줬다.
1967년 마침내 《인정 많은 아저씨》로 가요계에 데뷔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남진, 나훈아가 인기몰이를 하던 시점이었다. 송대관의 자리는 없었다. 무명가수로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살기도 했다. 결혼 후엔 만삭의 부인이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나중에 미국에서 자리 잡을 때도 부인의 공이 커서 송대관은 그 고마움을 평생 간직한 것 같다. 부인 때문에 전 재산을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다.
1973년 《세월이 약이겠지요》가 알려지면서 방송 출연을 하다가 1975년에 낸 《해뜰날》이 '초대박'을 친다. 어머니가 아파도 치료비를 댈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오히려 낙천적으로 "내 인생에도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마음을 담아 송대관이 작사한 노래다. 이 희망의 메시지가 당대의 시대정신과 조응했다. 그때는 거국적 낙관주의가 용솟음치던 때였다. '우리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믿음이 퍼져 나갔다. 1960년대의 경공업 성장을 발판으로 중화학공업 발진이라는 국가적 도전을 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석유파동 때 경제가 주춤하자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순간 들린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에 온 국민이 열광했다. 당시 경제 개발 총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 노래를 듣고는 "그래, 노래는 이렇게 신이 나야지"라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도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노래를 애창했다고 한다. 일부 군부대에서 마치 군가처럼 이 노래를 틀기도 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쨍! 하고 해 뜰 날 고국 간단다'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며 이 노래로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경제 개발 시대에 우리 국민을 응원해준 대표적인 국민가요였다.


차 안에서 쪽잠 자며 하루 5개 행사 소화했을 정도
1970년대 초 청년문화인 포크 음악이 맹위를 떨쳤다. 그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대중문화계가 한순간에 보수화된다. 그러면서 록 느낌의 트로트가 인기를 끌게 되는데 그 출발점 중 하나가 《해뜰날》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헌의 《오동잎》,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 등이 그런 흐름 속의 히트곡들이다. 이들이 말하자면 그때의 '신트로트'였다.
송대관은 《해뜰날》로 성공을 만끽했다. 그는 "굶는 것을 밥 먹듯 하던 긴 무명 시절을 지내다 《해뜰날》을 만나 진짜로 쨍하고 해 뜰 날이 찾아왔다. 5만원밖에 안 되던 출연료가 단숨에 3000만원까지 수직 상승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3000만원은 현재 가치로 환산한 액수인 걸로 보인다. 당시 돈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돈을 바닥에 깔고 자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대관의 당시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극장쇼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또 생활고가 찾아왔다. 분식집을 운영하며 부인이 아이를 배달 중에 낳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부인 주도로 미국 이민을 선택한다. 미국에서 처음엔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샌드위치 가게, 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며 갖은 고생으로 겨우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1988년에 귀국했다. 신의 한 수였다. 바로 그때부터 송대관의 가수 인생은 정말로 쨍하고 해가 뜨게 된다.
1989년에 《정 때문에》가 히트하더니 1992년 《차표 한 장》, 1998년 《네 박자》, 2003년 《유행가》 등 발표하는 싱글마다 인기 행진을 이어갔다. 급기야 19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트로트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자리 잡는다.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등 4대 천왕은 트로트의 성격을 바꿨다. 과거 트로트는 한 서린 구슬픈 음악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4대 천왕의 트로트는 신나는 음악이었다. 이런 음악으로 1990년대 댄스음악 부흥기에 트로트의 명맥을 이었다.
태진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콤비플레이로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서부터 인연이 시작돼 두 사람은 한집안처럼 지냈다. 올해도 두 사람의 합동 공연이 계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4대 천왕으로 절정기를 누린 그는 500억원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의 부동산 투자 사기 문제로 한순간에 애지중지하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날리고 160억원대 빚까지 졌다고 알려졌다.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부인을 옹호했다. 그는 "내 아내처럼 시집와서 날 위해 헌신하고 산 사람이 없다.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 나는 아내가 만들어준 결과물이다. 아내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며 변치 않는 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빚을 갚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쪽잠을 자며 하루 5개까지 행사를 소화했다. 그렇게 오뚝이처럼 일어서면서 《해뜰날》의 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해뜰날》로 개발 시대 국민들을 응원해 주고 《네 박자》 같은 구수하고 따뜻한 노래로 위로를 전해준 국민가수 송대관. 영결식에선 후배들이 《해뜰날》을 합창하며 고인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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